장소의 국제정치사상
장인성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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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선 건담의 아버지로 유명한 애니메이터 야스히코 요시카즈(安彦良和), 사실 선 굵은 대하역사만화를 여럿 그려낸 거장이기도 하다. 근대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인상적인 건 단연 왕도의 개(王道), 청일전쟁기의 일본, , 조선을 넘나들며 공존공영의 이상사회를 꿈꾸는 가상의 인물 카노 슈스케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19세기 동아시아 올스타전이라는 모 위키의 평가에 걸맞게, 작중 카노는 망명객 김옥균의 경호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이홍장과 담판을 짓기도 하며, 손문과 혁명을 모의하고, 일본과 맞서는 전봉준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등 그야말로 쟁쟁한 인물들과 교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카노의 행보가 왕도(王道)’라는 유교적인 언어로 묘사된다는 사실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전봉준과 카노가 나눈 짧은 대화다. “나라의 이득이나 겨레의 형편을 넘어서는 도리가 있음을 믿느냐는 전봉준의 질문에, 카노는 그렇다고 답한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왕도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보편도덕의 실현인 셈이다. 반면 왕도의 대척점에 서있는 패도(霸道)’란 권모술수와 무력행사를 통해 자국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행위다, 만화에선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열강으로 등극하려는 일본의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가 이러한 패도의 체현자로 등장한다.

 

  유럽의 혁명가보다는 동아시아의 사대부를 떠올리게 하는 카노와 전봉준의 모습은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퍽 낯설게 느껴진다. 혹자는 카노 슈스케란 결국 가상의 인물이고, 작가 역시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며 이들에게서 유교의 파토스를 읽어내려는 시도를 부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서구와 일본의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왕도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사대부 겸 혁명가는 결코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다. 막말 일본에도 카노의 모델이 되었음직한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요코이 쇼난(横井小楠),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뛰어난 유학자였기 때문에오히려 국가평등관념이나 세계평화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장인성의 장소의 국제정치사상은 한국어 단행본으론 유일하게 쇼난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서다. 다만 저자의 관심은 유교적 근대의 현현으로 쇼군을 추켜세우는 게 아니라, 한 사상이 장소(topos)’에 따라 어떠한 변용을 보이는가에 있다. 따라서 저자는 쇼난의 카운터파트로 그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조선의 운양(雲養) 김윤식(이하 운양)을 끌고 온다. 조선과 일본이라는 장소의 성격을 보여주기에는 그만한 인물들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활동시기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역할로 보나 쇼난의 짝궁은 박규수가 되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운양을 조선의 쇼난으로 포장하는 재일코리안 연구자 조경달에 대한 비판 또한 이 책의 목적이니 그러려니 한다.

 

  『장소의 국제정치사상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쇼난과 운양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그들이 선 장소(topos)’를 들여다봐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시공간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장소야말로 사상가의 사유를 구속하는 의식의 존재근거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단순한 정치사상 연구자가 아니라, 동주 이용희로부터 이어지는 서울대 외교학과의 전통 위에 서있는 국제정치사상 연구자임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쇼난과 운양이 자리한 일본과 조선이라는 장소는,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나도 달랐다. 둘 다 (적절한 표현은 아닐지언정) 나라의 빗장을 닫아거는 쇄국체제를 유지했지만, 일본은 너무나 풍족하기에 구태여 외부와 교역할 필요가 없다며, 조선은 너무나 가난하기에 외부와 교역할 여력이 없다며 서구의 통상요구를 거절했다. 자기규정 역시 달랐다. 일본은 만세일계의 덴노가 다스리는 위풍당당한 신국(神國)이었지만, 조선은 중국 옆에 위치한 자그마한 동국(東國)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차이는 두 나라의 정치질서였다. 조선은 관념국가라 불릴 정도로 주자학 일원주의를 고집했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내질서와 청의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따라서 전환의 시대인 19세기의 조선에서 갈등은 어디까지나 서구의 만국공법과 동아시아의 조공-책봉체제를 두고 불거졌다. (물론, 동과 서의 국제질서가 충돌했다는 통념은 근래 많은 도전에 직면해있다. 두 국제질서를 연속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연구로는 유바다의 박사논문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가 있다)

 

  반면 조선에서 국왕의 통치가 정당한지, 다른 방식의 정치질서는 없는지에 대한 질문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엔 당연히 군주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일로 이해되는 혁명(革命)조차, 당시 조선에서는 무능한 왕을 끌어내리고 새 왕을 세우는 반정(反正)의 의미로 쓰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헌미의 박사논문 반역의 정치학 : 대한제국기 혁명개념연구를 참조하라) 운양 역시 평생을 주자학자로 살았고, 만년에 의회(衆議之院)와 헌법을 긍정했을지언정 끝내 근대적 의미의 혁명을 인정하진 않았다.

  조선과 달리 일본은 애초에 어디에 속하는 일 없이 자족적으로 살아온 만큼 딱히 국제질서의 충돌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보다 중요한 충돌은 쇼군과 덴노라는 두 권위 사이에서 발생했다. 교토에 기거하는 신비로운 금리(禁裏)18세기 후반 이후 국학과 유학의 서포트에 힘입어 에도의 공의(公儀)에 도전했다. 이러한 권위의 충돌은 독서하는 사무라이, 혹은 칼을 찬 사대부로 하여금 주자학은 물론이요, 양명학과 국학, 심지어는 서구의 정치사상까지 끌어다 쓸 여지를 허용했다. 쇼난이 주자학과 양명학, 소라이학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사고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다.

 

  ‘장소가 쇼난과 운양의 다름을 보기위한 도구라면, ‘맥락(context)’은 두 사람의 같음을 살피려는 도구다. 조선과 일본이 서구열강으로 상징되는 근대와 조우한 과정은, 비록 일정한 시차를 둘지언정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서구를 배척하는 쇄국’, 서구와 마주하는 응접’, 서구를 향해 문을 여는 개국으로 맥락을 구분하여 쇼난과 운양을 비교한다.

 

  먼저 쇄국의 공간에서 두 사상가가 보인 반응을 살펴보자. 쇼난은 켐페르(Engelbert Kaempfer)쇄국론을 읽고 남긴 독쇄국론이라는 독서노트에서, 태서(泰西, 서구)는 개통이 도이고, 일본은 폐쇄가 도라며 쇄국을 긍정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쇄국이란 어디까지나 안민(安民)을 위한 수단이라고 이야기하며 일본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쇄국을 고집하는 국학자들과는 선을 그었을 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 쇄국에서 개국으로 전환할 여지도 남겨놓았다.

 쇄국공간의 운양 역시 천주교를 배척하는 폐쇄적인 사고를 보였지만, 동시에 스승인 박규수처럼 천주교는 박멸이 아닌 교화의 대상이며, 정교(正敎)가 바로 서면 자연히 사교(邪敎)가 사라지리라는 여유로운 태도를 갖고 있었다.

 

  닫혔으되 여유가 있던 두 사람의 사유는, 그러나 서구열강과 본격적으로 마주하는 응접의 공간이 열리며 이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쇼난의 경우 아무리 유교적 교양을 익혔던들 근본은 사무라이였던지라 에도 앞바다로 흑선을 몰고 온 미국의 페리제독에 분개하며 양이(攘夷)를 부르짖었다. 운양 또한 병인양요(1866)를 계기로 위원(魏源)해국도지에 근거해 잘 훈련된 정예병(精兵)과 정밀한 대포(精砲)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조선의 유자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자세였다. 비록 쇼난은 적극적인 승출(乘出), 운양은 수동적인 근수(謹守)를 고집했으나 두 사람 모두 서구를 자국의 도()를 해치는 이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보편적이어야 마땅할 도를 특수화, 개별화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난 셈이다.

 

  물론 서구와의 교섭이 진행되며 이들에 대한 이해가 심화됨에 따라, 쇼난과 운양이 가졌던 적개심은 차차 누그러졌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구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고, 일정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가령 18536월 러시아 사절 푸차친이 나가사키에 내항했을 때 쇼난이 사절응접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제시한 이로응접대의(夷虜應接大意), 그간 마루야마 마사오 등에 의해 근대적 국제의식의 표명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쇼난이 도와 신의를 내세운 건 어디까지나 상대를 설유하고 논파하기 위해서였지, 결코 이들을 동등한 도의 담지자로 인정해서가 아니었다고 냉정히 분석한다.

 

  러시아에 당당하게 논리로 맞선 쇼난과는 대조적으로, 미국과의 교섭에 임한 운양은 시종일관 순응적인 자세였다. 그 역시 쇼난과 마찬가지로 신()을 내세웠으나, 이는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안전과 체면을 지키려는 약소국의 자구책이었다. 은밀히 개국을 권하는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만국공법이 그리 공평무사하면 어찌 터키는 보전하고 류큐는 멸망시켰냐며 빈정댄 영의정 이유원처럼, 운양도 결코 만국공법을 맹신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만국공법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조선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는 심정에서 그리 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마침내, 서구가 주도하는 세계체제에 편입된 개국의 공간에 이르러, 두 사람은 서구마저 도의 담지자로 포용하려는 열린 사유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쇼난은 미국을 오랑캐로 규정하던 과거의 입장을 뒤집어, 오히려 우매한 쪽은 일본이고 미국은 일본을 깨우쳐주려 했을 뿐이라고 반성한다. 나아가 그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을 세계 평화를 위해 힘쓰고 선양함으로써 왕정을 종식시킨, 요순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추켜세우기까지 한다.

 

  물론 쇼난은 이내 약육강식이 횡행하며 사사로운 이해관계가 판치는 세계의 모습에 깊이 실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할거견(割拠見)을 종식하고자 그가 꺼내든 건 또다시 유교였다. 쇼난은 일본이 천리에 따라 인의의 대도를 일으켜 세계의 후견국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에게 주어진 길은 식민지 인도(印度)가 되거나 세계 제1등의 인의의 나라가 되는 것뿐, 다른 길은 없다.

 

  운양 또한 성()을 확충하여 멀리 있는 서양을 어루만지고 이들을 믿음으로 대한다면 패연(沛然)히 덕교(德敎)가 사해에 넘칠 것이며, 사해의 나라들이 반드시 서로 앞다투어 와서 제물을 바치고 유도의 나라임을 칭송하리라고 이야기했다. 문명국의 지식인다운 자부심이 느껴지지는 발언이지만, 운양이 이 말을 한 게 그가 정치적으로 실각한 1887년 뒤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자못 묘한 기분이 든다. 풋내기 개화당의 쿠데타를 조기에 저지하고 고종에게 반성문을 요구할 정도로 노회한 관료였던 운양은, 야인이 되고서야 비로소 유교의 도를 긍정할 수 있었던 걸까. 도가 자연히 넘친다()’는 표현 또한 세계를 상대로 강한 승출(乘出)의 의지를 내보였던 쇼난에 비하면 적극성이 떨어진다.

 

  다른 장소, 같은 맥락에 놓인 두 사상가의 행보는 유교를 고정불변의 무언가로 생각하려는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쇼난은 유학자였지만 특정 학파에 얽매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무라이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 쇼난이 유교라는 무기를 큰 칼처럼 휘둘러 무도한 서구를 계도하려는 승출(乘出)의 자세를 보인 건 이처럼 그가 칼 찬 사대부혹은 독서하는 사무라이였기에 가능했다.

 

  반면 운양은 군사요충지인 강화의 유수(留守)를 역임하는 등 병학(兵學)에 밝았으나, 어디까지나 천생 주자학자였다. 그런 만큼 쇼난처럼 다른 학문으로 쉽게 갈아탈 수 없었고, 그저 묵묵히 근수(謹守)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청이 없으면 존립조차 위태로운 약소국 조선의 정치인이라는 페널티까지 더해졌기에, 운양의 운신 폭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훨씬 좁을 수밖에 없었다. 운양과 조선이 유달리 보수적이었다거나, 쇼난과 일본이 유달리 진보적인 게 아니었다. 그저 조선과 일본이라는 장소, 그곳에 서서 바라본 풍경이 달랐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아무리 장소의 차이가 존재했다 해도, 쪼다처럼 눈치나 보던 운양보다는 서구열강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일본이 세계 제1등의 인의의 나라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 쇼난이 훨씬 유교적이고 또 멋지지 않느냐고 말이다. 글쎄, 왕년의 자유민권운동가로 평민주의를 주창했으나 훗날 군국주의자로 전향한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쇼난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들으면 생각이 좀 달라지시려나. ‘왕도적 제국주의자’, 소호는 쇼난을 이리 불렀다. 부친이 쇼난 사숙(私塾, 서당)의 첫 입문자였고, 숙모가 쇼난의 후처였던 만큼 쇼난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내릴 수 있는 평가였다.

 

  물론 저자의 말마따나 이는 명백한 곡해(曲解)지만, 문제는 쇼난의 정치적 사유에 그러한 곡해를 허용할 여지가 다분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메이지 일본에서 많은 자유민권운동가는 중국과 조선을 도와줄것을 주장했고, 그 도움의 성격은 많은 경우 분명치 않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동아시아를 풍미한 아시아주의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었을 뿐 아니라, 그 성격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었다. 중국의 혁명을 돕고자 고군분투하는 왕도의 개의 카노 슈스케와 극우 정치단체 현양사(玄洋社)의 거리는, 생각만큼 넓지 않다.

 

  오늘날 일부한국인들께선 자신들이 믿는 정의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를 주변에 적극적으로 퍼뜨려야 직성이 풀린다. 의도가 좋으면 결과 역시 좋으리란 명제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이들은 쇼난과 그를 곡해한 아시아주의자들의 후예다. 일부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건, 쇼난의 호연지기보다는 운양의 찌질함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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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대만은 발전했는가 - 쌀과 설탕의 상극, 1895-1945
커즈밍 지음, 문명기 옮김 / 일조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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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만은요, 일제에겐 처음 산 핸드폰 같은 거에요

 

  지인이 대만여행 중 가이드에게 들었다는 이 말처럼 일제의 대만 식민지배를 극명히 보여주는 비유가 또 있을까? 1895,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대만과 펑후(澎湖) 열도를 할양받는다. 가장 눈독을 들인 요동반도는 러시아의 간섭으로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만큼 사실상 유일한 전리품이었다. 이에 더해 아직도 자신을 노란 원숭이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서구열강의 코를 눌러주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식민지 대만을 성공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깟 섬 하나에 왜 막대한 돈을 쏟아 붓느냐며 식민지 포기를 요구한 국내의 반발을 찍어 누르면서까지 대만 경영에 올인한 이유다.

 

  과연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대만은 제국의 미운오리새끼에서 화려한 백조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사실상 대만총독이나 다름없었던 민정장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의 묘수로 대만은 식민지경영 10년만인 1905년 재정자립을 달성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온난한 기후의 대만은 사탕수수농사에 안성맞춤이었기에, 이내 당업(糖業)은 제국의 효자사업으로 떠올랐다. 대만은 식민지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균형적이고 균혜(均惠)적인 발전을 경험했고, 이는 내지와의 경쟁을 촉발하지도 않았다. 제국 일본과 식민지 대만은 그야말로 호혜적인관계였다.

 

  대만의 이러한 번영을 근거로, 그간 서구 학자들은 일본의 식민지배는 서구의 그것과 다르다며 그 특수성에 주목해왔다. 심지어 진보적지식인인 노엄 촘스키조차 일본은 서구와 달리 식민지들을 경제적으로 발전시켰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서구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특수성에 대한 믿음은 뿌리가 깊다.

 

  하지만 대만사 연구자 커즈밍(柯志明)은 일본 제국주의를 서구와는 다르다고 여기는 시각이야말로 식민지배의 보편성을 실감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의 책 식민지 시대 대만은 발전했는가는 일찍이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原忠雄)로부터 이어지는 수탈론의 입장에 서되, 탄탄한 실증을 기반으로 수탈근대화의 복잡한 얽힘을 드러내는 역작이다.

 

  일본이 청으로부터 대만을 막 넘겨받았을 무렵, 최대의 현안은 오랜 시간 묵혀온 복잡한 토지문제였다. 비교적 늦게 중화질서에 편입되었다는 특성상, 청의 중앙조정은 대만을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현지의 유력자인 간호(墾戶)에게 징세와 치안유지를 일임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며 간호 밑에서 땅을 부쳐먹던 소작농인 전호(佃戶)가 실질적인 토지소유자로 등극해갔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간호의 권리는 점차 유명무실해졌으나, 그렇다고 그 ()’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간호는 간호대로, 전호는 전호대로 불만이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청이 프랑스와 일본의 위협에 직면해 푸젠(福建)으로부터 대만을 독립시켜 별도의 성을 설치한 1880년대에 이르면, 법적인 토지소유자인 대조호(大租戶, 간호에서 유래)와 실질적인 토지소유자인 소조호(小租戶, 전호에서 유래)의 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다. 당시 여타 동아시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만 역시 소농사회의 심화에 따른 중층적 토지소유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제아무리 무능해도 이런 문제를 아예 모른 체 할 수는 없었기에, 청 조정은 유능한 관료인 유명전(劉銘傳)을 대만순무(臺灣巡撫, 성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여 지세제도를 개혁하게끔 독려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비록 이빨 빠진 호랑이일지언정 그간 대만의 행정을 책임져왔던 대조호의 반발이 만만찮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소조호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낸 것도 아니었다. 이들이 대조호에게 납부하던 지세를 완전히 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지지도 얻지 못한 유명전의 지세개혁은, 비록 훗날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받을지언정 결과적으론 실패했다.

 

  그러나 대만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일제는 청처럼 대조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무력 또한 갖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제는 반대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찍어 누르는 한편, 대조호를 남의 노동에 기생하는 봉건적인대지주로 몰고 감으로써 여론전에서도 승리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뒤이은 지세개혁을 통해 소조호는 사실상의(de facto)’ 토지소유자에서 법적인(de jure)’ 토지소유자로 인정받았다. 조선이나 대만이나 소농사회의 완전한 정착은 식민통치자인 일제가 중층적인 토지소유를 정리함으로써 이루어진 셈이다.

 

  일단 근대적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자, 흥미롭게도 대만의 토지소유는 계속해서 영세화의 길을 걷는다. 저자에 따르면 기존 연구에서 주장하는 토지소유의 집중이란 결코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더라도 굉장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흔히 자본주의하면 으레 떠올리곤 하는, 수탈을 통한 원시적 축적이란 대만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토지소유의 측면에선 말이다.

 

  어째서 대만에선 우리의 통념과는 반대되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근대 이전부터 사적 소유에 대한 관념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집착 역시 강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만과 기후조건이 비슷한 네덜란드령 자바와의 비교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바 역시 식민권력에 의해 근대적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었으나 대만과 달리 대부분의 토지는 공동체의 소유였고, 사적 소유라는 관념은 미미한 상황이었다. 그 결과 자바에는 결국 여타 동남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에서 쉬이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대규모 플랜테이션이 들어서고 말았다.

 

  반면 대만의 소농가정은, 차야노프(Chayanov)의 말마따나 혹독한 자기착취를 통해 끝끝내 자기 땅을 지켜냈다. 뒤집어 말하면 자본의 입장에선 그냥 작은 땅뙈기 한 뼘만 내주고 소농가정으로부터 얼마든 이윤을 뽑아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토지만 보장받는다면 얼마든지 제 살을 깎아먹을 수 있는, 경제논리에서 약간 비켜난 독특한 존재였다. 요컨대, 식민지 대만에선 소농사회화자본주의화가 함께 진전되었다. 시장에서 수출용 봉래미(蓬萊米)를 팔고 자신들이 먹을 저품질의 재래미를 사오는 소농가정의 모습은, 당시 대만에선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이처럼 자본주의화된 소농사회인 대만에서 일제가 가장 주력했던 사업은, 앞서 말했듯 당업(糖業) 즉 사탕수수 농사였다. 식민통치 초기 일제는 대만의 농업을 생계작물인 재래미 생산과 수출작물인 사탕수수 생산으로 재편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주 교활하게도 두 작물의 가격을 연동시켰다. 1905년 성립된 악명 높은 미당비가법(米糖比價法)이다. 사탕수수의 가격을 계속해서 낮게 유지하는 동시에, 사탕수수를 생산하는 자농(蔗農)이 유일한 대체재인 재래미로 쉽게 옮겨갈 수 없게끔 강제하는 절묘한 수였다. 덕분에 쌀과 설탕은 서로가 서로를 끌어내리며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했고, 대만농민의 생활수준 역시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그간 많은 학자들이 대만 경제의 특질로 꼽은 미당상극(米糖相克)’의 본질이다.

 

  상황이 바뀐 건 1920년대 중반부터다. 일본의 급속한 공업화로 내지의 쌀 수요가 높아지며 대만에서 수출용 봉래미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미와 수확시기(11~이듬해 2)가 겹치는 조선미와 달리, 대만의 봉래미는 정확히 일본의 보릿고개에 수출되었기에(6~10) 아무런 견제 없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자연히 그동안 재래미를 재배해오던 대만의 많은 소농가정은 하나 둘 봉래미로 작물을 바꾸며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그 결과, 그간 농민의 임금을 안정적으로 통제하는 도구였던 미당비가법이 이번에는 정 반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쌀과 설탕의 가격을 연동시켜놓았기에 봉래미 가격이 올라가며 설탕수수 가격 역시 올라갔던 것이다. 게다가 설탕의 경우 가공과 유통을 일본 자본이 장악했기에 통제가 용이했던 반면, 쌀은 대만의 토착 정미업자인 토롱간(土礱間)이 꽉 쥐고 있었으므로 총독부가 손을 쓸 수도 없었다. 많은 서구 학자들이 예찬한 식민지 대만의 균형적이고 균혜적인 발전은, 사실 총독부가 제 꾀에 넘어간 결과였던 것이다. 1930년대 후반 전시통제를 이유로 미곡전매제를 실시하기 전까지, 총독부는 쌀과 설탕의 가격이 함께 오르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대만에서 발생한 아이러니를 통해 저자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분명 소농사회라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관철된 식민지배의 보편성이었으리라.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눈이 가는 건 아무래도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쪽이다. 그것이 오로지 대만만의 성격이 아니라,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가 공유하는 보편적 특수성이기에 더욱 그렇다. 가령 오늘날 온 가족을 동원해 어떻게든 인건비를 아끼려는 한국의 자영업자들은, 어쩌면 자기착취를 통해서라도 제 땅을 사수하고자 안달이었던 소농가정의 후예는 아닐까? 어디까지나 망상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달리 높은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장기지속하는 소농사회의 유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쉬운 건 그간 한국에서 이 소농가정의 후예들을 결집시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움직임을 만들어보려는 시도가 전무하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소농가정은 필요하다면 얼마든 제 살을 깎아먹어가며 존버할 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랬기에 일본 자본도 대만의 소농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플랜테이션을 만드느니 그냥 내버려두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물론 일본 자본은 구태여 소농과 충돌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들을 착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소농가정의 이러한 강인함은, 당연하겠지만 두 가지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겠다. 만일 뜻 있는 이들이 소농가정을 독려해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개혁적인 정당을 결성했다면, 이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맞서는 유력한 제3세력으로 우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치경제학자 김종철이 금융과 회사의 기원에서 이야기했던, 기본자산제를 통해 만인이 든든한 밑천을 갖는 소자산가의 사회를 꿈꿔볼 법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끝끝내 혈연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한 소농가정은 그 에너지를 오로지 가족의 출세에 쏟아 부었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으로 비로소 자기 것이 된 토지는, 대부분 아들들 대학 뒷바라지나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가게를 여는 밑천으로 쓰였다. 그 결과는 기껏 공부시켜놨더니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장남에 분통을 터뜨리는 노부모, 그리고 오늘도 온 식구가 총동원돼 불철주야 일하는 자영업자 가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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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이광수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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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고대국가 중에서도 가야는 유달리 신비로운 이미지가 강하다. 일단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네 번째나라라는 사실부터가 어딘가 비밀스럽고 애잔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가야는 질 좋은 철을 생산했고, 해상무역을 주요 업으로 삼았다. 자연히 땅이나 파먹고 살던 농업국가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개방적이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심지어 가야는 여섯 나라의 연맹으로 이루어졌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반도에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중세풍 판타지 속 도시동맹을 떠올리게 하는, 정말이지 한 설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야는 그야말로 덕질을 위해 만들어진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가야 판타지의 결정판은, 아마도 허왕후 신화일 것이다. 인도 아유타(阿踰陁國)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은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많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에게 시집을 가 왕비가 되었다. 허왕후가 김수로왕과 낳은 아들 열 명 중 한 명은 아비를 이어 가야의 왕이 되었고, 나머지 일곱은 산으로 들어가 신선 혹은 부처가 되었다. 딸 둘은 동쪽으로 건너가 일본에 나라를 세웠으며, 오빠 장유화상은 가야에 불교를 들여왔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가야는 건국신화마저 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의 저자 이광수는 허왕후 신화란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물론 지역과 민족을 막론하고 건국신화란 다 어느 정도 뻥이 섞여있다는 점에서, 굳이 가야의 허왕후 신화만 끄집어내 면박을 주는 건 좀 너무하다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저자가 애써 이를 비판하는 이유는, 유독 허왕후만 신화가 아닌 역사속의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고조선의 단군은 천신과 짐승 사이, 고구려의 주몽과 신라의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기에 애시당초 진짜라고 믿을 수가 없다. 반면 허왕후는 그런 미신적인요소는 일절 없는데다 상당히 구체적이기까지 해서 역사를 좀 안다싶은 사람도 혹하는 것이다. 바로 이 그럴싸함을 이용해먹고자 사람들은 허왕후 신화에 살을 붙여 제 욕망을 채워왔고, 대중은 대중대로 여기에 속아주며 가야 판타지를 충족시켰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허왕후 신화의 원형은 신라 혜공왕 대(재위 765~780) 김지정의 난(780)이 일어나 김유신계가 모조리 숙청당한 뒤 처음 등장했다. ‘패밀리의 구성원 대다수가 처형당하거나 육두품으로 강등되는 위기 앞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김유신의 뿌리인 가야의 위대함을 찬양함으로써 결속력을 다지고 열패감을 보듬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게 개황력(開皇曆)혹은 개황록(開皇錄)이고, 이는 고려 문종 31(1076) 편찬된 가락국기(駕洛國記)의 모본(模本)이 된다. 승려 일연이 그 가락국기를 참고해 삼국유사가락국기를 지은 건 이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뒤이다.

 

  승려 일연의 손을 거친 허왕후 신화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불교색 짙은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애초에 김유신 가문에 의해 창작되었을 때만해도 허왕후는 그냥 바다 건너 어디메에서 넘어온 존재였다. 그러나 일연은 허왕후의 출신지를 아유타국으로 둔갑시켰다. 아유타국이란 힌두 최고의 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사리유(Saryu) 강변에 위치한 힌두 제1의 성도(聖都) 아요디야의 음차로, 그저 신화 속의 도시일 뿐이다. 오늘날 북인도 웃따르쁘라데시(Uttar pradesh) 주에 아요디야라는 도시가 있긴 하지만, 허왕후가 김해 앞바다에 닿았다던 서기 48년 무렵 이 도시의 이름은 사께따(Saketa)였다.

 

  한때 번영을 구가했으나 라마야나의 최종 편찬이 이루어지던 5~6세기경에는 몰락한 황성옛터가 된 사께따는, 이 무렵 비로소 라마야나의 성도 아요디야로 불리기 시작한다. 그랬기에 5세기 초에 인도를 다녀온 법현은 불국기에 사께따(沙祗)만 달랑 언급한 반면, 7세기 중반에 인도를 다녀온 현장은 아요디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요디야, 음차해서 아유타(阿踰陁)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도시보다는 불교의 나라 인도 자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였고, 허왕후 신화에도 정확히 그러한 의미로 삽입되었다. 천축국(天竺國)이라 했으면 그래도 좀 허구 같았을 텐데, 하필이면 현존하는 도시인 아요디야에서 왔다고 해서 쓸데없이 사실감을 높인 셈이다.

 

  허왕후와 김수로왕이 결혼한 곳에 452년 왕후사를 세웠다거나, 풍랑을 만난 허왕후가 아유타국으로 다시 돌아와 파사석탑(婆娑石塔)을 가지고 간 덕에 무사히 가야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모두 거짓이다. 통일국가를 이루지도 못한 가야가 백제와 신라보다 100년 앞서 불교를 받아들일 턱이 만무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랬다 해도 흥국(興國)이나 흥복(興福), 흥륜(興輪)처럼 이데올로기적인 이름이 아니라 시조의 결혼 따위를 기념하는 이름을 사찰에 붙이는 건 어불성설이다. 파사석탑 역시 기이한 돌을 숭배하는 김해 지역의 풍습에 따라 만들어진 돌무지가 허왕후가 배를 타고 올 때 가지고 온 석탑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저자는 추측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허왕후 신화는 불교라는 틀을 넘어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욕망을 투사하는 장으로 진화했다. 그 시작은 성리학의 확산과 발맞춘 족보 붐을 타고 가문의 격을 높여줄 수 있는 매력적인 소스를 물색하던 양천허씨 집안이었다. 조선 중기의 유력한 권력자였던 허엽(1517~1580)과 허적(1610~1680)은 모두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재임 중 수로왕릉을 크게 보수했다. 김수로왕을 추켜세움으로써 그의 아내인 허왕후 역시 역사 속 인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 것이다. 이들은 허왕후가 여성이기에 성씨를 물려줄 수 없다는 페널티조차 그가 열 아들 중 두 명에게 허씨 성을 잇게 했다는 민간설화를 끌어옴으로써 해결했다. 물론 허적의 12촌 형인 허목이 양천허씨족보서(陽川許氏族譜序)에 적었듯, 양천허씨의 시조는 허왕후가 아니라 고려의 개국공신 허선문이었다.

 

  사찰이라고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오늘날엔 흥국사로 이름이 바뀐 김해 명월사는 증수과정에서 허왕후의 오라비 장유화상과 관련된 기와가 나왔다며 신도들을 현혹했다. 아예 이름부터 장유화상을 연상시키는 장유사는, 사찰이 왕후사 터에 지어졌다고 자랑스레 비문에 기록했다. 왕후사는 허왕후와 김수로왕이 식을 올린 곳에 세웠다고 일컬어진 사찰인데, 앞서 보았듯 이는 명백한 날조다.

 

  이른바 이성합리의 시대라는 근현대에 접어들고도 허왕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은 도무지 식을 줄 몰랐다. 아동문학가 이종기는 탐사문 형식의 소설인 가락국탐사에서 허왕후가 북인도의 아요디야에서 서기 20년경 출발해 몇 년 뒤에 태국 아윳티야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48년 음력 5월에 마침내 김해에 왔다고 주장했다. 1977년 발표한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에서는 허왕후에게 열 아들뿐 아니라 두 딸이 있었으며, 그 중 한 명은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는 어디까지나 아동문학가고, 저자가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이런 작업을 했다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버젓이 학자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들이 이종기의 상상을 고대로 베껴와 마치 사실인 양 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고고학자 김병모는 서울대-옥스퍼드라는 탑티어 학벌을 무기삼아 이종기의 주장을 교묘히 자신의 연구 성과로 둔갑시켰다. 그는 200년도 채 안된 수로왕릉의 쌍어문이 아요디야 시의 공식 문장이라거나, 단청의 요상한 그림이 인도에서 신성시하는 코끼리라고 주장한다. 전부 이종기의 소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옮겨온 것이다.

 

  김병모의 발랄한(!)’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허왕후 집안은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 출신으로 인도로 건너가 꾸샨국을 세웠고 그 일파가 아요디야로 이주했으나 전란에 휘말려 고향인 보주로 돌아온 뒤 서기 48년 김해의 금관가야에 당도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허왕후는 결혼예물로 운남·사천의 명산물인 차나무 씨앗을 가져와 가야에 차문화를 널리 전파했단다. , 이토록 아찔한 트랜스내셔널함이란!

 

  정치권 역시 김병기를 비롯한 유사역사학자들의 재롱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유력한 김해김씨 정치인인 김종필과 김대중은 1999429일 김해숭선전춘향대제에 자신을 허왕후의 후손이자 아요디야 왕손이라 주장하는 미슈라(Mohan Pratap Mishra) 씨를 초청해 주한 인도 대사와 함께 허왕후릉에 참배하게 했다. 사실 대다수의 김해김씨와 마찬가지로 김종필과 김대중 역시 조선후기 언제쯤에 족보를 구입한 평민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말이다.

 

  전 국민의 판타지로 떠오른 허왕후 신화는, 급기야 본국 인도로 역수출되기까지 했다. 2002년 아요디야시에 검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멋을 낸 허왕후 탄생 기념비가 들어섰다. 당시 인도의 집권 여당이었던 극우 인도국민당의 적극적인 후원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57월에 개최된 허왕후 관련 국제 심포지엄 역시, ‘위대한 인도를 알리려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에게 한국정부가 놀아난 꽃놀이패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 선생님껜 죄송한 얘기지만,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허왕후 신화의 왜곡은 분노나 안타까움보다는 오히려 감탄과 놀라움을 자아낸다. 본디 아주 보잘것없었을 한 줄의 이야기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살이 붙고 개연성을 갖춰가며, 끝내 그럴싸한 역사로 거듭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굉장히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허왕후 신화의 역사는, 역사란 곧 저마다의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첨부, 생략, 변형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묻게 된다.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유사역사학 진영에 팩트체크만으로 대응하는 기존의 전략은 과연 유효했던가? 엄밀한 사료비판의 중요성을 부정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어차피 첨부, 생략, 변형이 이야기의 운명이라면, 사료를 기반으로 하되 보다 재밌고 풍요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유사역사학의 구림을 만천하에 까발릴 순 없느냐는 것이다. 요컨대, 젊은역사학자모임의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만큼이나, 곽재식의 역적전역시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작업은 전문 역사학자들에게 맡길 수 없다. 일단 그들은 너무 바쁘다. 무엇보다 좋은 연구자라 해서 언제나 좋은 이야기꾼인 것도 아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한 얘기지만, 저자 선생님의 필력은 유사역사학자 김병기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애초에 재미를 염두하고 쓴 책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두 사람의 재능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에는 이미 역사를 소재로 재밌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이 여럿 있다. 소설가 곽재식과 이문영, 만화가 굽시니스트와 박시백 등이 그들이다. 전국의 수많은 역사학과에서 이런 사람들을 보다 전문적으로육성할 수는 없을까? 학내 구성원의 반발을 깡그리 무시하고 기왕에 역사문화콘텐츠학과로 이름을 바꾸었다면, 그에 걸맞은 새로운 인재라도 길러내야 한다. 그게 갑작스런 학과 통폐합과 명칭 변경으로 혼란스러워하는 학생들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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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과 한국 기독교
이혜원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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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역사에서 (중원과 만주를 포괄하는) 대륙의 존재는 상수에 가까웠다. 중원의 역대 왕조는 별달리 먹을 게 없었던데다 알아서 납작 엎드리기까지 했던 한반도를 대체로 건드리지 않았지만, 일단 중원에서 뭔 일이 터졌다하면 그 불똥은 무조건 한반도로 튀었다. 고조선, 백제, 고구려, 고려가 그렇게 대륙의 불길에 휩쓸려 멸망했다. 그 뒤를 이은 조선 역시 국토의 세 면이 바다라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다 끝내 임진년의 참극을 맞은 반면, 대륙과 이어진 나머지 한 면만큼은 언제나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가 있기에 유달리 자주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국사 교과서에서도 웬만한 대륙의 변고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X변수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푸대접을 넘어 아예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사건이 있으니, 바로 의화단 운동이다.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기치로 북중국을 휩쓸고 한때는 서태후의 지지까지 등에 업었으나 끝내 8개국 연합군의 총탄에 스러진 이 영적인 복서들(The Spirit Boxers)’, 그간 한국에선 미지의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저 러시아가 의화단 토벌을 이유로 만주를 점령함으로써 러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짤막한 설명만 전해질 따름이다. 좀 더 파고들면 깜냥도 안 되면서 출병카드를 만지작거렸다던 고종의 웃픈일화 정도를 찾을 수 있겠다.

 

  하지만 역사학자 이혜원이 보기에 한반도 역사에서 의화단 운동은 결코 러일전쟁의 원인정도로 자리매김 될 수 없다. 원말의 홍건적이나 명말의 모문룡 일당만큼은 아닐지언정, 청말의 의화단 역시 이 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반()서양, 구체적으로는 반기독교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의화단 운동은 한반도 기독교의 나아갈 길을 사실상 결정지었다.

 

  이혜원의 책 의화단과 한국 기독교는 일본과 미국으로부터의 영향만을 중시하던 그간의 풍조에서 벗어나 중국, 구체적으로 의화단과의 관계 속에서 한반도 기독교의 역사를 새로이 써내려간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혹은 동아시아사는 불가능할지언정 세계사/동아시아사 속의 한국사는 충분히 가능하며 또 필요하다는 확신을 안겨주는 책으로, 논문 모음집임에도 마치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계획된 양 탄탄하고 짜임새가 있다.

 

  중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지만, 그것이 소수의 신앙을 넘어 보다 광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건 19세기 중반 이후이다. 18447월 청은 미국과 맺은 망샤조약(望廈條約)에서 조계지 내에서의 예배당 설립을 보장했고, 같은 해 12월 도광제(道光帝)는 이금(弛禁, 기독교 금지령의 해제)을 허가하는 조서를 내렸다. 비록 북경의 천주당 몇 곳을 내줌으로써 중국 내륙에서의 선교를 막아보려는 예방적 조치였을지언정, 천주교가 사교(邪敎)가 아닌 엄연한 정교(正敎)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윽고 1860년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중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중요한 전기를 맞이한다. 개신교와 가톨릭, 정교회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을 뿐 아니라 허가증만 발급받으면 외국인일지라도 자유롭게 중국 내륙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 교파의 선교사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중국 각지에 믿음을 퍼뜨렸고, 치외법권의 보호와 발전한 문물이 뒷받침된 결과 1900년에 이르면 개신교와 가톨릭은 세례교인만 각각 10만 명, 72만 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를 확장했다.

 

  기독교가 중국에서 보여준 경이로운 활약상은, 그러나 그만큼의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중국의 향촌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공묘(孔廟)와 문묘(文廟)를 중심으로 행해진 제례와 마을축제에 기독교 개종자들이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용부담 역시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종교란 개인의 사적인 믿음이 아니라 사회를 규율하는 거대한 체계였던 만큼, 어쩌면 갈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거창하게 세계관 충돌까지 갈 것도 없이, 외국인 선교사가 누리는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제 잇속을 챙기는 일부 중국인 역시 이웃들의 공분을 샀다. 기독교는 어느새 중국의 평범한사람들 사이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 그 자체와 동일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1898, 오랜 시간 쌓여온 갈등이 마침내 폭발했다.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의 갈등이 유독 심했던 산둥(山東)에서 무술단체 대도회(大刀會)와 비밀 종교결사 백련교(白蓮敎)가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기치로 의화단(義和團)을 결성한 것이다. 본래 서양 사교에 맞서 중국의 전통과 도덕을 바로 세우는 게 목표였던 의화단은, 마침 발생한 대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대거 유입되며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가진 민중봉기로 거듭났다. 이들의 에너지는 금세 산둥을 넘어 화북, 만주, 내몽골로 뻗어나갔고, 한때는 제국의 수도 베이징까지 장악하는 등 엄청난 위세를 자랑했다.

 

  흥분도 잠시, 19008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키며 의화단은 이내 정리되었다. 누군가는 이들을 반세기 넘게 중국에서 오만하게 군림해오던 서양에게 한 방 먹인 유쾌한 혁명투사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북중국에 거주하던 기독교도에게 의화단은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는 메뚜기 떼에 불과했다. 개신교 선교사 188명과 신도 19000여 명이, 가톨릭 선교사 47명과 신도 3만여 명이 의화단의 무자비한 폭력에 목숨을 잃었다. 의화단은 당시 놀랄만한 성장세를 보이던 중국 기독교계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북중국 평원에서 일어난 폭동의 여파는 저 멀리 남중국 해안지대까지 닿았다. 중국 최남단인 광둥(廣東)에서도 겁에 질린 신도들이 교회와 학교에 나가지 않고 선교사를 방해하는 일들이 속출했다. 오늘날까지도 중원과는 물리적·정서적 거리감이 강한 광둥이 그랬을진대, 황해와 요동만 거치면 바로 대륙과 연결되는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비록 1985년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독립을 이뤘을지언정, 이번에도 한반도는 의화단이라는 X변수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는 Y변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시작은 역시 도망 온 피난민들이었다. 서양인 선교사들과 중국인 신도들이 의화단을 피해 바다로, 육지로 밀려들어왔다. 일종의 난민캠프가 들어선 인천항과 평안북도는 낯선 풍습과 언어의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저 사람이 들어오기만 한 게 아니었다. 당시 한반도에 들어와 농업이나 건설업에 종사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고향에서 일어난 변란 소식에 예정보다 일찍 대륙으로 떠났다. 한국 성공회의 경우 영국 해군의 요청으로 의료 선교사들을 대거 중국으로 파견했고, 그 결과 서울에 있는 둘 뿐인 병원이었던 성마태병원과 성베드로병원 모두 문을 닫았다.

 

  물리적 충돌 또한 잇따랐다. 8개국 연합군에 격퇴당해 만주로 패주한 의화단과 청나라 군대의 패잔병들은 일단 이 지역의 한인(韓人)교회를 공격했다. 1884년 호러스 알렌이 최초의 정주(定住) 선교사로 한반도 땅을 밟기 5년 전인 1879년 이미 첫 삽을 떴고,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최초로 간행하는 등 여러 면에서 앞서나갔던 만주 한인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의화단의 마지막 물결에 휩쓸린 셈이었다. 평안북도 의주, 함경북도 삼수, 갑산을 비롯한 국경지대에서도 의화단과 청의 패잔병들이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켰다. 급기야는 의주 군수 이창권이 청국 비도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이처럼 대륙으로부터 낯선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고 이들을 둘러싼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한반도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비기독교도는 우리도 중국처럼 서양을 몰아낼 수 있다는 흥분에, 소수의 기독교도와 선교사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것이다.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북쪽 평안도에서는 동학당이, 남쪽 경상도에서는 활빈당이 들고 일어나 기독교 척결을 외치고 다녔다. 제주에서 가톨릭 신자가 300명 넘게 살해된 1901년의 신축교안 역시 직접적인 원인은 가톨릭을 믿던 마름의 가혹한 수탈이었지만, 저자는 그 정도의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건 의화단의 영향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의화단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최대의 사건은 190011월의 도륙밀지사건(屠戮密旨事件)일 것이다. 비록 언더우드의 기지와 알렌의 노력으로 미수에 그쳤지만, 몇날 며칠에 일제히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도륙하라는 고종황제의 가짜밀서가 전국 각지에 유포되었던 이 사건이 현실이 되었다면 그 피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터였다. 지금까진 내장원경 이용익과 평리원재판장 김영준의 이름으로 밀서가 배서, 유포되었던 만큼, 당연히 이들이 사건의 주모자라는 해석이 정설로 자리잡아왔다. 하지만 저자는 두 사람이 고종의 총애를 입었던 데다 사건 후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은 기록이 없다며, 이들은 그저 이름을 도둑맞았을 뿐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렇다면 도륙밀지사건의 진정한 주모자는 누구인가? 특정할 순 없지만 의화단 운동에 영향을 받은 반기독교세력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당시 한반도에 주재하던 선교사들이 하나같이 도륙밀지사건과 의화단의 연관성을 지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1900년 가을과 겨울은 한반도가 의화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날조된 밀지 말미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모든 전봇대를 파괴하라는 명령 역시, 중국의 기를 억누르는 모든 전선과 철도를 파괴하려던 의화단을 모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다 건너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친 의화단의 엄청난 에너지, 그 가공할 폭력성에 세계 선교사 사회는 일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그 충격은 극동의 야만성에 대한 경악이 아닌, 지금까지의 선교방식에 대한 진지한 회의와 성찰로 선교사들을 이끌었다. 대표적으로 1900921, 미국과 캐나다를 대표하는 개신교 교파 32개의 대표가 뉴욕에서 모인 초교파 선교회의에서는 하루 빨리 중국으로 돌아가 선교지를 안정화하되, 본국의 힘을 선교에 이용하거나 중국 정치에 개입하지 말 것을 결의했다. 또한 이들은 부패한 중국 지방 관리가 죄 없는 빈민들을 쥐어짤 우려가 있다며 선교사의 사망과 고통에 따른 위로금마저 청구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다.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로 1901년 중국과 한국, 필리핀, 태국 등을 방문한 아서 브라운 역시 놀라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는 선교사들이 외국인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 현지의 각종 송사에 개입함으로써 중국인들의 공분을 샀다며, 중국에서의 선교는 철저한 정교분리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브라운은 광대한 중국을 서양인 선교사만으로 복음화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미국 교회가 유럽으로부터 독립했듯, 중국 교회 역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으로 목사를 길러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브라운의 제안은 곧바로 한반도 선교에 반영되었다. 1900년까지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말하며 가까운 미래에 별도의 신학교를 세울 계획은 없다고 단언하던 장로회 선교사들은, 브라운의 한국방문 이후 입장을 바꿔 이듬해 평양에 신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같은 해 9월 새문안교회에 모여 연합공의회를 개최한 한국의 네 장로교회는 대한(大韓) 나랏일과 정부 일과 관원 일에 대해 도무지 그 일에 간섭 아니하기를 작정했다며 정교분리를 천명했다.

 

  수많은 선교사와 신도들이 무참히 살해된 초유의 사태 앞에서, 미국 기독교계는 결코 분노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의 민중이 기독교에 갖는 적개심을 이해하고자 했고, 그간의 잘못을 냉정하게 반추했다. 이를 토대로 미국 기독교계는 정교분리현지인 목회자 자체 양성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진보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시대의 진보는 다음 시대의 퇴보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일부를 제외한) 식민지시기 한국 기독교계의 침묵은, 결국 브라운의 보고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건 아닐까? “교우를 가르치기를 교회가 나랏일 보는 단체가 아니요 또한 나랏일은 간섭할 것도 아니라는 한국 장로교 연합공의회의 결의는, 총독부의 지배를 합리하화는 그럴싸한 알리바이는 아니었을까? 식민지시기 내내 기독교가 천도교에 맥을 못 추었던 것 역시, 전자와 달리 후자에겐 어쨌거나 자신들이 주도하는 국가에 대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브라운은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불의를 참지 못한다고 보았고, 청교도혁명이나 미국혁명처럼 그 에너지로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킨 사례 역시 얼마든지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의 정치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그 방향을 고민할 수는 없었을까.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필요할 때만 요긴하게 써먹는 정교분리’,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등장한 전광훈 같은 이들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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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 음식문헌 연구자 고영이 읽고 먹고 생각한 것들
고영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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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근래 사람들은 더 이상 음식을 먹고() 마시기만() 하지 않는다. 이제 음식은 무엇보다 보고 듣는 무엇이다. 영세 유튜버에서 지상파까지, ‘매체를 자처하는 모든 이들이 이른바 먹방에 열을 올리는 탓이다. 카메라에 담아낸 음식의 맛깔스런 자태, 그리고 이를 게걸스레 해치우는 셀럽들의 짭짭대고 후루룩거리는 소리에 대중은 열광한다. 바야흐로 미각을 대신해 시각촉각이 음식을 느끼는 주된 감각으로 떠오른 시대다.

  먹고 마시라고 만들어놓은 음식을 보고 듣는 하 수상한 시절에, 음식문헌연구자 고영은 생뚱맞게도 음식을 읽는다.’ 읽는 감각, 굳이 한자로 옮기면 독각(讀覺)’ 정도 되려나. 그의 책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는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음식을 읽어간 기록들의 모음이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카스테라를 본뜬 노란 표지인데, 매끄럽게 빤딱거리는 재질로 만들어서 카스테라보다는 커스터드 푸딩을 닮았다. 고전문학 전공자답게(?) 리듬감이 느껴지는 그의 글은 보드라운 카스테라보다는 탱글탱글한 커스터드 푸딩과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지금껏 접한 책 디자인 중 최고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오른쪽 아래에 떡하니 박힌 “2019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마크만 없었다면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 고영은 음식문헌연구자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그의 이름만 뜨는 걸로 보아 스스로 만든 직함인 듯한데, 이만큼 고영의 정체성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말도 없으니 한 번 찬찬히 뜯어보자. 우선 그는 음식을 연구한다. 또한 문헌도 연구한다. 무엇보다 그는 문헌과 음식의 얽힘을 연구한다. 말장난 같다고? 조금만 더 읽어보시라.

  우리가 음식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기까지의 과정은 찰나에 비견될 정도로 짧다. 우리가 느낀 음식의 감촉과 맛을 어렵사리 말로 꺼내보기도 전에, 음식은 이미 꿀떡하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버리기 일쑤다.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을 찾아내는 일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렇기에 형언(形言)할 수 없는그 맛을 어떻게든 형언해보려는 노력은, 동시에 언어를 가꾸고 그 경계를 넓히는 일이기도 했다. 음식은 언어를 북돋았고 언어는 음식을 증언했으므로, 음식의 역사는 곧 언어의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음식문헌연구자가 음식문헌을 기계적으로 이어붙인 직함이 아닌 이유다. 음식과 문헌의 복잡한 얽힘은 그 자체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고영은 음식을 읽는 감각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살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의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또 그 맛을 적확히 표현하고자 고심해왔다. 희대의 이단아 허균은 1610, 유배지인 전라도 함열에서 읽는 먹방도문대작을 썼다. 혀로 느낄 수 없다면 글로라도 실컷 맛보자는 심보였다. ( 허균, ‘먹방의 추억)

  1720, 아버지를 따라 세계 최대의 도시인 북경을 방문한 멋쟁이 도련님 이기지는 보다 정교하고 관능적으로 음식을 감각했다. 총명함과 친화력으로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사로잡은 그는 유럽의 식사와 간식, 무엇보다 와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빛깔, 풍미, 촉감, 마시고 난 뒤의 감각까지, 이기지가 남긴 조선 최초의 와인 시음기는 오늘날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 이기지, 떠나고 먹고 감각하다) 다만 전근대의 기록이란 어디까지나 양반 엘리트가 한문으로 쓴 것이었기에, ‘읽는 먹방을 향유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상황이 달라진 건 이른바 근대(modern, 책에서는 현대라 표현)’라는 미증유의 시대를 맞이하고부터다. 아직까지 근대를 둘러싼 여러 정의들이 옥신각신하고 있지만,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한정한다면 근대란 무엇보다 사람들이 넘치는 활자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된 시대다. 국가를 초월한 교양인의 보편언어를 저잣거리의 입말이 밀어냈고, 비밀스레 유통되던 필사본 대신 대량으로 찍어낸 활자본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유라시아 동쪽의 궁벽진 반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제 한문이 아닌 언문으로 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몇몇은 이를 새로 주조한 활자에 찍어 널리 퍼뜨렸다. 그 결과, ‘한국어혹은 조선어라는 오래된 미래는 식민지라는 제약 속에서도 산업현장, 이주 노동, 분규, 쟁의, 파업, 민족 같은 근대의 개념들을 너끈히 품어낼 수 있게 되었다. ( 소금 한 톨에 깃든 사연)

 

  언어만 바뀐 게 아니었다. 음식 역시 근대라는 롤러코스터에 올라탔다. 은자의 나라 조선은 이웃한 청과 일본, 대만은 물론이고 저 멀리 서양까지 이어진 글로벌한 연결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청의 호빵과 일본의 팥빵, 유럽의 맥주 등 새로운 음식들이 조선으로 물밀 듯 밀려왔다. ( 한국 빵 문화사의 원형/ 맥주나 한 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에 뿌리내려온 음식이라 해서 근대의 파고를 피해갈 순 없었다. 대표적으로 소금은 일본의 자본, 대만의 기술, 중국 산둥(山東)의 노동력이라는 트랜스내셔널한 조건에 놓이며 자염(煮鹽)에서 천일염(天日鹽)으로 새롭게 태어나다시피 했다. ( 소금 한 톨에 깃든 사연)

  이처럼 근대를 맞아 환골탈태한 음식을, 역시 환골탈태한 언어가 가만둘 리 없었다. 새로운 맛을 담아내려는 궁리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다. “전정(前程, 앞길)이 구만리라는 고리타분한 수사로 애써 주인공을 위로하던 무정속 하숙집 노파는, 어느새 조선중앙일보기자에게 우유 넣어드려요?” 하고 새침하게 물어보는 다방 마담으로 탈바꿈했다. 1917년에서 1936, 불과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 빙수 한 그릇/ 음식이 만든 풍경들)

 

  모름지기 냉면은 초여름에 먹어야 제맛이라는 조선중앙일보와 이에 질세라 냉면은 원래 겨울음식이라는 매일신보의 기싸움, 커피와 코코아를 선전하는 화려한 신문광고들, 퇴근길에 맥주잔을 기울이는 경성의 화이트컬러 남성까지, 정말이지 하지 아니할 수 없다. ( 냉면 먹방/ 음식이 만든 풍경들/ 맥주나 한 잔) 이게 바로 -이구나 싶어 그 흥취에 한껏 거나해지려는 찰나, 저자는 명랑하게 부글거리는 -의 거품을 슬그머니 걷어버린다. 거품이 사라지고 남은 건, 어느 하나 내 것 아닌 초라한 잡동사니뿐이다.

  요즘엔 흔히 도란스(ドランス, trans의 가타카나 표기)’란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된다만, 한국의 근대가 곧 일본과 미국을 짬뽕한 열화판이란 사실은 모두가 아는 비밀이다. 가령 오늘날 우리가 빵이라 부르지만 사실 빵도 과자도 아닌 그 무엇은, 일본식 제빵제과의 산물을 미국의 원조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로 찍어내 대량으로 유통함으로써 탄생했다. ( 한국 빵 문화사의 원형) 그 기원과 내력을 살피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은 결과, 이제 대부분의 한국인은 빵과 과자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한국 근대의 이러한 족보없음, 명실상부 1세계의 말석에 걸터앉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하나의 족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의지할 중심이 없으니 바깥에서 뭐가 유행한다 하면 앞뒤 가릴 것 없이 일단 들여오고 본다. 대만카스테라가 그렇게 한 차례 골목상권을 휩쓸고 지나갔고, 이제는 흑당버븥티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잘 되기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되기에만 치중한 결과는 이토록 아리고 쓰리다. ( 아리고 쓰린 카스테라 담론)

 

  저자는 힘주어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카스테라와 카스텔라의 사이를 느끼는 감각이라고 말이다. 일본의 카스테라(カステラ)16세기 말 포르투갈 사람들이 전해준 카스텔라(castella)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일본은 물론이고,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카스테라는 카스텔라와는 다른 일본의 전통과자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식 달걀찜인 챠완무시(茶碗蒸) 조리법을 응용하여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카스테라와 카스텔라에 사이를 만들어주는 건, 내 입맛의 기호와 공동체의 선택을 동력삼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온 역사 그 자체다. (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되돌아본다. 한국이라는 공동체는 지금껏 어떠한 감각과 방법, 태도로 음식을 대해왔는지, 그리고 나는 내 입맛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우리 한국어 화자들은 옛 문헌을 뒤져가며 음식을 읽는감각을 기르기보다는 먹방에 탐닉하며 먹어보지 못한 음식에 대한 선망과 환상만 키워가진 않았던가. 혹은 조선의 선농제로부터 설렁탕이 시작됐다거나 커피를 처음 마신 사람이 고종이라는 흰소리를 주워듣곤 낭설 수집을 음식 문화사 공부로 착각하진 않았던가. ( 차례 앞두고 기억할 말, 가가례)

  또 나는 어떠했는가. 매 끼 식사를 제대로 챙겨먹기보다는 스누피 커피로 때우고’, 내 입맛을 섬세히 계발하기보다는 펄펄 끓는 마라탕을 조지고’,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분들에 대한 감사 없이 허겁지겁 해치우지않았던가. 저자는 온전한 밥그릇을 누리는 삶이야말로 진정 인간답다고 이야기한다. ( 온전한 밥그릇을 누리는 삶) 일단은 밥 먹을 때 락앤락 통에서 반찬을 꺼내 그릇에 옮겨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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