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깊게 아로새겨져 쉽게 잊혀지지 않는 영화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자립형 인간>이란 영화다. 4~5년 전의 <인디다큐 페스티벌>이었을 게다.  

1시간 남짓의 다큐였는데, 일흔 일곱의 나이의 가장이 주인공인 영화다.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현역으로 열심히 일하지만 어느 날 자신에게 치명적인 불치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열정적인 삶을 지향하는 그에겐 병원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에 주인공은 병원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걸 포기하고 적극적인 죽음, 즉 <자살>을 결심하고 가족들에게 협조을 구한다. 이런 그의 결정에 가족들은 그를 말리지만 결국 주인공은 가족들의 동의를 얻은 후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방법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카메라는 주인공이 자살이란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고뇌와 죽음을 위한 가족들과의 동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이 다큐가 나에게 던진 화두는 묵직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 가지고 있던 (우울증과 같은) 질병으로 인한 도피로서의 자살과는 그 이유와 (죽음에 도달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순전히 자신의 삶의 존엄을 위해 적극적인 방법으로서의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태어남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죽음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인간의 <자립성>에 경외감이 들기도 했다. 이 영화를 보고 비로소 '자살 = 생명경시 풍조'와 같은 구태의연한 등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자살 소식을 다루는 매스미디어의 기사가 항상 탐탁치 않았다. 한 사람의 자살에서 복잡다양한 원인과 목적, 의도가 뒤섞여 있을 터. 허나 <남녀문제>, <가정 불화> 등의 단편적인 사건을 원인으로 단정짓는 보도 행태말이다. 그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으로서의 예의가 아나라는 생각을 한다. 고통으로 잊기 위해 선택한 죽음이지만, 주검이 된 뒤에도 고통이란 유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도 있다.(특히나 연예인은 심하다)  

 

 

 

 

 

 

 

  

오늘 한겨레에 실린 칼럼도 자유 죽음으로서의 자살에 대한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준다. 대학 시절 읽다 만 뒤르켐의 <자살론>과 최근에 출간된 장 아메리의 <자유 죽음>을 읽고 자살에 대한 사유를 정리해 볼 생각이다.  

한겨레_[기고] 자살은 '질병사일 뿐이다'/정희진_2010.07.15  

 이 세상에는 몸 둘 곳이 없었을까? 무대 밖으로 영원히 몸을 숨긴 배우의 죽음을 수사한 경찰은, “(음주 후) 충동적인 자살”이라고 최종 발표하였다. 이유는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마음에 걸렸다. 자살 사건의 90% 이상이 비계획적이지만, 그것이 곧 ‘충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찰이 잘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충동’이라는 표현은 죽음을 선정적으로 수사(修辭)할 뿐 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감정을 가로막는다.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는 자살은, 질병의 경과점 혹은 투병의 과정으로서 자살이다. 예전에 어느 신문에서 방한한 외국 가수를, “한때 우울증에 빠져 방황했지만 재기했다”고 소개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우울증에 빠져? “빠져”는 자발적 탐닉이라는 의미로 대개 마약, 알코올, 도박 등과 결합하여 사용된다. “당뇨에 빠져”, “암에 빠져” 이런 말은 없다. 정신적 불편함(mental disease), 흔히 말하는 ‘정신병’은 몸도 마음도 편안하지 않은 상태라는 점에서 ‘육체적인’ 질병과 다르지 않다. 우울증은 독감이나 교통사고처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정상적인 질병’으로 인구학적 특징이 ‘없다’.

우울증에 대한 일반적 통념은 “누가 진짜 미쳤는지”를 생각하게 할 만큼 대단히 모순적이다. 우울증은 결정권(권력)이 많은 기업의 리더처럼 스트레스와 관련 있다는 인식도 있지만, 반대로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사치스런 병이라는 통념 역시 집요하다. 이를테면, ‘일하는 건강한 민중’은 우울증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 편견의 효과는 단 하나, 아픈데 돈 없는 사람들이 넘어서야 할 정신과 병원의 문턱만 높아지는 것이다. 또한 아픈 이가 누구냐에 따라 우울증은 다르게 인식된다. 천재나 예술가의 우울증은 예민한 재능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평범한 사람의 우울증은 경쟁 사회에서 낙오한 이들의 나약함으로 간주된다. 감기라는 비유처럼 가벼운 증상으로 치부하면서도, 우울증 병력자나 환자는 비정상, 비이성, 잠재적 폭력범 등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공포가 있다.

이런 모순된 인식의 배후에는 다양한 정치경제적 이해(利害)관계와 담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양가적 인식들의 공통점은, 우울증에 대한 무지 그리고 이 무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무지를 자신은 그만큼 ‘정상’이라는 증거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울증이 자살로 연결될 만큼 고통스러운 질병이라는 것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살은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의미를 넘어 ‘패가망신’, ‘인생 실패’, ‘참극’ 등 과도한 낙인을 안게 된다. 새삼 지금 한국 사회의 자살사태(沙汰)를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자살을 예방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살 권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이고, 또 하나는 자살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는 것이다. 두 가지는 병행되어야겠지만, 나는 후자가 좀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떤 이는 우울증의 고통을 “살아 있는 죽음”으로 표현한다. 나는 자살에 관한 사회적 대책이 자살을 생명과 대립시키는 ‘자살 방지 캠페인’에서, 우울증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이냐 죽음이냐가 아니라, 고통이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살은 다른 질병에 비해 위로, 간병받지 못한 병사(病死)일 뿐이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통증의 해결이지 죽음 자체가 아니다. 자살은 ‘생명 경시 풍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생명의 고통을 경시하는 풍조에 대한 개인의 외로운 처방전이다. ‘병사로서의 자살’은 자살에 대해 관대해지자는 주장이 아니라 예방책에 대한 논의이다. 한때 죽고 싶을 만큼 아프고 괴로웠다는 병력이 이후 인생의 불이익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고통이 조금이라도 소통될 수 있다면, 자살은 줄어들 것이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말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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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아웃사이더>라는 잡지를 통해 이 둘의 글들을 처음 접했을 거다. 김규항의 글이 절제된 감정 속의 비장함을 드러냈다면,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풍자와 해학을 잃지 않았던 것이 진중권 문체의 일관적인 특징이었다.   

 

 

 

 

 

 

 

 

 문체는 달랐지만 보다 나은 사회로의 변화를  꿈꾸는 이들의 글은 20대인 나에게 사회의식과 비판의식을 동시에 길러 준 주역(?)이었다. 세월이 지나 어느 새 68운동의 주체들이 "30이 넘은 사람들은 믿지 말라"던 그 삼십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매일 <아웃사이더>가 아닌 이들 각자의 블로그를 통해 <비장함>과 <풍자>의 담긴 글을 읽으며 현실에 분노하는 동시에, 미래를 위해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 이들이 자신에게 할애된 지면을 통해 논쟁을 시작했다. 진보신당의 미래와 정체성에 대한 김규항의 한겨레 칼럼(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25949.html)이 계기였다. 김규항은 칼럼을 통해 진중권의 정치 성향(진정한 변화를 이룰 뜻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주의자)을 언급하며 이들의 대중성이 역으로 진보신당의 정체성에는 해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의 글을 썼다. 한국사회에 몇 안되는 진보정당인 진보신당의 위기에 대한 우려와 대중성 프레임이 갇히지 않고 그들만의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충고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며칠 뒤 진중권이 씨네 21 칼럼(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3029&article_id=61413)을 통해 자신과 진보신당에 날 선 펜 끝을 세운 김규항 글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 부었다. 다양한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진보신당 당원들에 동일한 정체성과 동일성을 강요,규정하는 김규항의 칼럼은 너무나 복고적이며,  이러한 강요 자체가  진보신당의 당원들에 가하는 폭력이라며 논쟁에 불을 붙혔다. 

이러한 진중권의 논박이 일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지방선거에서의 진보신당의 승리, 노회찬의 승리, 심상정의 승리를 위해 밤낮 없이 뛰어다니던 자신과 진보신당 당원들의 노력에 대한 격려는 커녕 선거 참패라는 결과만을 보고 애매호모해진 정체성이 진보신당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비판하는 김규항의 글에 화나 날 만도 하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진보정치가, 진보신당이 대중성과 정체성의 줄타기에서 그 어느 쪽으로도 제대로 도달하지 못해 선거에 참패한 것은 현실이자 사실이다. 수년 째 제기되어 온 진보정치의 위기는 MB 정권이 들어선 후 더 심각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 정치의 성공과 미래를 위해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칼럼을 통해 드러낸 김규항의 글은 과연 비판 받아야 될 글인가? 이런 글 쓰기 자체가 지식인의 책무 아닐까? 

물론 이러한 글 쓰기 내용에 대한 반론과 반박이 있을 수 있다. 논쟁 자체는 발전적인 담론 형성과 대안 도출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론은 반드시 <논쟁>의 형식을 띄어야 한다. 이러한 논쟁의 제 1 철칙이 있다면 성질을 배제한 언쟁의 형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규항의 말대로 '의견'이 아닌 '성질'을 드러내면 이미 글은 논쟁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중권의 반박 글은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으며, 그 중 악질 중의 악질인 '인신 공격'이라는 폭력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합리적인 논쟁이 사리지게 만들었다. 사람이 너무 센치해지는 새벽에 글을 썼는지 자신의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감정을 적나라하게 배설했다.  

진보정당의 미래를 점치고 논할 수 있는 오랜만의 좋은 논쟁거리가 그만 진중권의 '감정 배설'로 인해 끝나고 말았다. 진중권의 완패. 물론 이와 상관없이 김규항이 블로그를 통해 대응을 한다고 하니 한번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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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여도, 좋은 옷을 사줘도 아이가 자유롭게 뛰어 놀지 못하게 강제하는 것은 결국 부모 자신의 만족과 안위를 위하는 일이다, 아이의 미래를  위한다는 것은 결국 핑계에 불과하다. 그 어느 것보다 김규항의 이런 가치관(교육관)이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아닐까? 이런 가치관을 닮고 싶고 실천하고 싶다. 오늘 실린 김규항의 한겨레 칼럼을 옮겨본다.  

<이제 됐어?>_gyuhang.net and 한겨레신문_100708 칼럼

교육문제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정현 신부님이 그랬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중고생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가 갈수록 어렵더라고요. 걔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못 알아듣겠고 걔들도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즘 아이들 어릴 때부터 생활하는 걸 보면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농부들은 농사는 정직한 거라고 말한다. 땀 흘려 수고한 만큼 결실을 얻는다는 뜻이다. 시기에 맞추어 꼭 해야 할 일들 가운데 하나라도 빠트리면 어김없이 농사를 망치게 된다. 교육이란 게 농사와 같다. 아이가 다섯 살 무렵에, 열 살 무렵에, 열다섯 무렵에 꼭 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걸 하나라도 못하고 넘어가면 그 상흔은 일생에 거쳐 남는다.
이를테면 초등학생 연령대 아이들이 꼭 해야 할 일은 ‘노는 것’이다. 제대로 놀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정신적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 된다. 대개의 아이들이 어머니가 저녁 차려놓고 ‘잡으러 다닐 때까지’ 놀던 시절에 자란 내 또래에도 어떤 사정 때문에 제대로 놀지 못한 사람은 겉보기엔 멀쩡해도 인성이나 대인 관계에 반드시 문제가 있다. 특히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면서 스스로는 모르는 사람을 보면 십중팔구 어릴 때 제대로 못 논 사람이다.
그런데 2010년의 한국의 초등학생 가운데 제대로 노는 아이가 있던가? 어지간한 집은 저녁까지 교육 좀 시킨다는 집은 밤늦게까지 학원을 돈다. 세계화가 어떻고 국제경쟁력이 어떻고 하지만 거의 모든 초등학생들이 이 따위로 생활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국뿐이다. 도무지 사회에 미래가 안 보인다 탄식들 하지만 한국엔 분명한 미래가 하나 있다. 이대로라면, 10년 후 한국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병든 청년들로 가득 찬다는 것이다.
지난번 얼핏 적었듯 내가 ‘대학을 꼭 가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내 딸과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한 이유도 그래서다. 두 아이는 공부를 곧잘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일류대학에 갈 수 있는가 없는가와는 별개로 그에 이르는 20여 년이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준다는 사실을 고려했다. 요컨대 나는 그들이 유리한 학벌과 경제적 안락을 가진 로봇으로 자랄 가능성보다는, 소박하게 살더라도 정상적인 인성과 감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해가 다르게 부자의 아이들이 외고와 일류대를 채워가고 있다. 하긴 영어학습지 하는 아이와 방학이면 두어 달씩 미국에서 살다오는 아이가 경쟁을 하고 있다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앞서가는 아이들도 역시 사람인지라 대가를 치른다. 근래 서울의 부자 동네엔 잘 꾸며진 아동심리상담센터와 소아정신과가 부쩍 눈에 띈다. 아이들의 정신 건강과 성적이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생각이 그곳 엄마들에게 일반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아이가 심리상담을 하고 정신치료를 받는 일은 학원을 다니고 과외를 받는 일과 같다.
얼마 전 한 외고생이 제 엄마에게 유서를 남기고 베란다에서 투신했다. 유서는 단 네 글자였다. “이제 됐어?” 엄마가 요구하던 성적에 도달한 직후였다. 그 아이는 투신하는 순간까지 다른 부모들이 부러워하는 아이였고 투신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런 아이였을 것이다.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아이들이 매우 빠르게 늘고 있다. 아이들은 끝없이 죽어 가는데 부모들은 단지 아이를 좀 더 잘 살게 하려 애를 쓸 뿐이라 한다. 대체 아이들이 얼마나 더 죽어야 우리는 정신을 차릴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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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번 잘 뽑았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책의 제목에 유난히 관심 많은 나로서는 근 10년만에 찾아온 레드 컴플렉스 만연의 시대인 지금, 사회성 짙은 예비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역사는 나를 한번도 비껴가지 않았다>라는 제목을 그대로 인용했다면 나 또한 이 책의 가치를 모르고 그냥 비껴나갔을지도 모른다.  

출판사를 보니<보리>다. 최근에 <기획 회의>실린 보리 출판사 대표인 윤구병 선생의 다윈주의적 인터뷰를 본 뒤 책 장사꾼(긍정적 의미)으로서의 윤구병 선생에 대한 고정관념이 형성되고 있던 터라 독자 시선을 단번에 사로 잡을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책 제목을 뽑으려고 노력했을 담당 에디터의 노고가 먼저 떠올랐다. 책 표지의 붉은 색이 공산주의 이미지인 동시에 에디터의 피 눈물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화다. 그림은 언뜻 아트슈피겔만의 <쥐>나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가 연상된다. 판화체 형식의 만화라서 그런지 이전에 봤던 그 어떤 만화보다도 독특하며 새롭다.    

책은 1954년 8월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돼 꼬박 36년 동안 감독에 갇혀 있다 출감한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옹>의 개인사를 담고 있다. 원작의 제목처럼 그것은 역사의 한 복판에서 치열하게 산 주인공의 개인사인 동시에 현재 진행형인 한반도 비극의 역사다.  

무엇이 그를 무려 36년 동안 채 1평도 안되는 공간에서 인간이란 자존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한 것일까?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그에게는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세상>과 <통일 조국>이란 두 가지 꿈 말이다. 사회주의라는 도구을 통해 통일 조국의 과업을 달성하고 싶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소련이 무너졌다고 사회주의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크게 보자면 역사는 과정이지 완성된 것이 이니기 때문이다.(중략) 소련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한때 퇴보했어도 반드시 좀 더 나은 사회주의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전형이 나와야 할때다. - 2권, 23 Page -

이러한 그의 사상적 투철함에 그의 아들은 편지를 통해 반문한다.   

" 아버님, 사상은 인간이 인간의 편의를 위한 방법이고 도식일 뿐, 인간의 사상을 위해서 존재할 수 없으며 사상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야 됨은 명확한 것이 아니겠어요. 희망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고 했듯이 희망이 없는 삶을 어떻게 삶이라고 하겠습니까. 또한 삶이 없고서야 무슨 사상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물론 이제사 전향한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생각이 되시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제는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내일을 희생하는 것이 되니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 2권, 267 Page -

이러한 아들의 반문에 그는 답한다. 

" 나도 너희들과 같이 인생人生을 살고 싶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사는 이 민족의 불행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오늘 이 민족 앞에 제기된 과업은 조국 통일이다. 반드시 공산주의일 필요는 없다. 나는 무엇보다 통일을 갈망한다." - 2권, 268 Page -

이러한 그의 강철처럼 단단한 사상의 바탕은 장풍군 인민위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경험했던 장풍군의 이상적인 사회상의 영향이 컸다. 남쪽과는 달리 인민들에게 군림하지 않고 존중받으며 이론과 실천에서 모범을 보였던 지도부의 모습과 누구나 평등했던 잠시간의 유토피아적 사회 체제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건설하고 싶었던 사회주의 모습 자체였을게다. 

한편으론 죽기 전까지 무한한 지지를 보낸 사상의 고향 북한이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일당 독재국가로 세계의 골칫덩어리로 전락한 걸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한 송환된 몇몇의 비전향 장기수 분들을 영웅 대접하며 이데올로기 선동에 활용하는 북한의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가족을 동원해 전향을 강요하고,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36년간 사람을 가두는 게 가능한 대한민국의 야만성을 생각하니 분노가 일었다. 결국 <허영철 옹>을 굳은 신념이 투철한 사회주의자로 만든 건 36년간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전향 시키려 발악을 한 대한민국이 아닐까?  이에 답하듯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사상의 문제가 아니지. 양심의 문제지" - 2권, 306 Page -  

박쥐같은 기회자주의자들이 판치고 자본의 법칙에 놀아나는 2010년 대한민국에서 굳은 신념 하나로 자신의 이상 사회를 꿈꾸며 죽는 날까지 양심을 지킨 허영철 옹의 이야기를 접한 건 나에게 행운이었다.    

PS. 얼마 전 신문 기사를 통해 <허영철 옹>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 가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좀 덜 치열하게 좀 덜 투철하게, 단 헤픈 웃음은 잃지 마시고 편안히 지내셨으면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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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다 2
허영철 원작, 박건웅 만화 / 보리 / 2010년 5월
구판절판


소련은 무너졌다고 사회주의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크게 보자면 역사는 과장이지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어서, 물러서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22쪽

자본주의도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뒤에 몇번이나 퇴보와 전진을 계속하다가 1871년 파리 꼬뮌 이후에야 비로소 부루주아의 승리를 확인하지 않았던가. 소련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한때 퇴보했어도 반드시 좀 더 나은 사회주의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전형이 나와야 할 때이다. -23쪽

"지도부로서 권력을 누리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맞는 존중만 받을 뿐이라구요?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요? 역사를 보면 권력을 가진 자가 그 힘을 누리지 않고 그저 자신의 역할만 충실히 수행한다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니깐요"-178쪽

"지도부가 권위를 가지기는 해요. 하지만 이론과 실천에서 모범이 될 때 주어지는 거예요. 제대로 인민을 위하지 못한다면 절대 권위를 가질 수 없는 겁니다. 남쪽처럼 사람들에게 군림하는 지위가 절대 아니라는 거지요. 오히려 정책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일은 다 당원들이 맡아요."-178쪽

"그곳에서 선생님이 부딪치고 깨지고 하면서 마음으로 크게 느끼고 보신 것이 과연 무엇일까 여쭙고 싶네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을 직접 하면서 이제껏 꿈꾸었던 이상향을 장풍군에서 경험한 것이지요."-183쪽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좀 더 높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점에서 나는 '인간의 의식 개조'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사유 제도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272쪽

맑스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 발전의 동력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문제로 본다는 거예요.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생산 관계는 따라서 발전한다고 맑스주의는 설명해요.

그 때문인지 맑스주의는 눈에 보이는 노동 도구를 인간의 정신이 결합하는 노동력보다 앞세웠던 것 같아요.

바로 그런점에서 맑스주의도 인간의 의식 개조에 소홀한 면이 있다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정신이 물질보다 먼저라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했지만 물질세계를 바꿀 수 있는 막강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거죠. "이론도 대중을 파악하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전화한다"라고 하잖아요.-267쪽

혁명이란 과거의 제도를 바꾸는 거에요. 왕이 하는 일을 '천명天命"이라고 했어요. 천명은 사람이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사람이 고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혁명革命"이에요.
여기서 '혁革'은 사람의 손질이 가해진 가죽을 뜻해요. 자연 그대로의 가죽인 '피皮'와 다르지요. 곧 천명을 손질할 수 있다. 천명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인 것입니다. -269쪽

젊었을 때는 미래에서, 장년기에는 현실에서, 늙어서는 추억에서 산다고 하더라. -290쪽

인간이 가지는 적응력과 인내의 한계성이란, 개성의 차이는 있으나 진정 생각해도 놀랍습니다. 화장실을 합해서 한 평 정도의 공간에서 35년간의 장시간을 독방 생활 해 왔습니다.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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