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번 잘 뽑았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책의 제목에 유난히 관심 많은 나로서는 근 10년만에 찾아온 레드 컴플렉스 만연의 시대인 지금, 사회성 짙은 예비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역사는 나를 한번도 비껴가지 않았다>라는 제목을 그대로 인용했다면 나 또한 이 책의 가치를 모르고 그냥 비껴나갔을지도 모른다.
출판사를 보니<보리>다. 최근에 <기획 회의>실린 보리 출판사 대표인 윤구병 선생의 다윈주의적 인터뷰를 본 뒤 책 장사꾼(긍정적 의미)으로서의 윤구병 선생에 대한 고정관념이 형성되고 있던 터라 독자 시선을 단번에 사로 잡을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책 제목을 뽑으려고 노력했을 담당 에디터의 노고가 먼저 떠올랐다. 책 표지의 붉은 색이 공산주의 이미지인 동시에 에디터의 피 눈물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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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다>는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화다. 그림은 언뜻 아트슈피겔만의 <쥐>나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가 연상된다. 판화체 형식의 만화라서 그런지 이전에 봤던 그 어떤 만화보다도 독특하며 새롭다.
책은 1954년 8월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돼 꼬박 36년 동안 감독에 갇혀 있다 출감한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옹>의 개인사를 담고 있다. 원작의 제목처럼 그것은 역사의 한 복판에서 치열하게 산 주인공의 개인사인 동시에 현재 진행형인 한반도 비극의 역사다.
무엇이 그를 무려 36년 동안 채 1평도 안되는 공간에서 인간이란 자존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한 것일까?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그에게는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세상>과 <통일 조국>이란 두 가지 꿈 말이다. 사회주의라는 도구을 통해 통일 조국의 과업을 달성하고 싶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소련이 무너졌다고 사회주의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크게 보자면 역사는 과정이지 완성된 것이 이니기 때문이다.(중략) 소련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한때 퇴보했어도 반드시 좀 더 나은 사회주의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전형이 나와야 할때다. - 2권, 23 Page -
이러한 그의 사상적 투철함에 그의 아들은 편지를 통해 반문한다.
" 아버님, 사상은 인간이 인간의 편의를 위한 방법이고 도식일 뿐, 인간의 사상을 위해서 존재할 수 없으며 사상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야 됨은 명확한 것이 아니겠어요. 희망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고 했듯이 희망이 없는 삶을 어떻게 삶이라고 하겠습니까. 또한 삶이 없고서야 무슨 사상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물론 이제사 전향한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생각이 되시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제는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내일을 희생하는 것이 되니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 2권, 267 Page -
이러한 아들의 반문에 그는 답한다.
" 나도 너희들과 같이 인생人生을 살고 싶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사는 이 민족의 불행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오늘 이 민족 앞에 제기된 과업은 조국 통일이다. 반드시 공산주의일 필요는 없다. 나는 무엇보다 통일을 갈망한다." - 2권, 268 Page -
이러한 그의 강철처럼 단단한 사상의 바탕은 장풍군 인민위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경험했던 장풍군의 이상적인 사회상의 영향이 컸다. 남쪽과는 달리 인민들에게 군림하지 않고 존중받으며 이론과 실천에서 모범을 보였던 지도부의 모습과 누구나 평등했던 잠시간의 유토피아적 사회 체제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건설하고 싶었던 사회주의 모습 자체였을게다.
한편으론 죽기 전까지 무한한 지지를 보낸 사상의 고향 북한이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일당 독재국가로 세계의 골칫덩어리로 전락한 걸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한 송환된 몇몇의 비전향 장기수 분들을 영웅 대접하며 이데올로기 선동에 활용하는 북한의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가족을 동원해 전향을 강요하고,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36년간 사람을 가두는 게 가능한 대한민국의 야만성을 생각하니 분노가 일었다. 결국 <허영철 옹>을 굳은 신념이 투철한 사회주의자로 만든 건 36년간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전향 시키려 발악을 한 대한민국이 아닐까? 이에 답하듯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사상의 문제가 아니지. 양심의 문제지" - 2권, 306 Page -
박쥐같은 기회자주의자들이 판치고 자본의 법칙에 놀아나는 2010년 대한민국에서 굳은 신념 하나로 자신의 이상 사회를 꿈꾸며 죽는 날까지 양심을 지킨 허영철 옹의 이야기를 접한 건 나에게 행운이었다.
PS. 얼마 전 신문 기사를 통해 <허영철 옹>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 가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좀 덜 치열하게 좀 덜 투철하게, 단 헤픈 웃음은 잃지 마시고 편안히 지내셨으면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