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조금 뜸하다지만 나 어릴 적부터 이미 문단문학계의 핫이슈로 그 지위를 굳건히 한 장정일의 장편 소설이다. 90년대에는 나름 신세대 축에 속했던 나에게 장정일의 문학은 ‘텍스트’가 아니라 ‘영상’으로 기억된다. 중학교 시절 대학생 누나가 빌려온 비디오 ‘너에게 나를 보낸다’ 정선경의 엉덩이로 추억되고, 대학 시절 P2P사이트에 불법 다운로드한 무삭제판 ‘거짓말’ 김태연의 교복으로 회고된다. 
 

 

 

 

 

 

 

 

 

 

 

 

 이전 소설 ‘보트하우스’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소설에서도 저자는 위선과 욕망으로 가득 찬 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소설 속 ‘그’는 처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의 언니와 결혼한 별난 사람이지만, 그가 속해 있는 현실은 너무나 익숙하다. 잠에 취해 간신히 일어나 출근하고, 비디오와 양파링으로 시간을 죽인다. 토할 것 같이 지루한 일상에서 쾌락과 성적 욕망만이 그를 구원해 줄 수 있다. 삶의 원동력이자 근근히 버텨낼 수 있는 모르핀인 것이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서부터 시가작하지. 원죄니 윤회, 구원이니 해탈 따위가 모두 인간은 불완전하고 죄에 물들어 있다는 수작 아니야? 그들은 나약하고 비천한 인간의 심리를 담보로 잡고서 이성과 금제의 규율을 하늘 높이 세우지.”

그에게 종교란 인간의 원죄를 덮어 씌워 금욕을 강요한 악에 불과하다. 종교적 유토피아란 없다. 쾌락과 자유만이(그게 상상에 그칠지라도) ‘너희를 구원하리라’고 단언한다.

너희가 쾌락을 믿느냐? 장정일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답은 명확해진다. 그의 글을 읽을 때 느끼는 ‘내면의 수치심’은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의 그 느낌과 일맥상통한다. 자신이 위선과 욕망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고 자기 기만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PS. 책을 다 읽고 문득 의문이 하나 생겼다. 바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르주아들과 기독교의 어색한 교접. 욕망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에게 종교가 웬 말인가?
쾌락적 욕망의 완성체인 자본주의, 그 세계의 맹주로 자리 잡은 부르주아와 금욕과 금제의 규율을 강요하는 기독교의 조합. 언뜻 보면 비키니 입은 씨름 선수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비틀어 생각해 보니 그 조합은 어느 무엇보다 자연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부르주아들에게 기독교란 자신의 자본주의적 쾌락과 욕망에 손대기 전 (더 큰 욕망을 위해) 깨끗이 손을 씻는 성수이며, 자기 안의 욕망을 불사르기 전 행하는 거짓 구원이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쾌락 추구를 위한 수단이며 한갓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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