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리바의 집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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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집에 발을 들인 순간, 원래의 당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집의 소유주는 누구인가? 인간인가 초자연적인 존재인가? 가끔은 인간이 아닌 존재가 집을 소유할 수도 있다고 저자 사와무라 이치가 말하는 듯 하다. 집에서는 아니지만 나도 초자연적 현상을 겪은 적이 있다. 언젠가 뜨겁게 태양이 내리쬐던 여름, 해수욕장을 다녀오는 길에, 꼬불꼬불 산길을 운전하던 후배가 갑자기 급정거하더니, 조수석에 앉아있던 나에게 이랬다. " 언니, 방금 누가 제 옆에서 깔깔거리며 웃었어요."

밖에서도 무서운 이런 경험을, 편안해야 할 집에서 겪는다고 생각해보자. 정말 무섭고 공포스러울 것 같다. 이 [ 시시리바의 집 ] 은 도저히 합리적으로 설명이 불가한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고 있는데, 집을 차지하고 있는 어떤 괴이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은 두 명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남편의 전근으로 인해 도쿄에서 살게 된 사사쿠라 가호. 그녀는 아는 이 한명 없는 대도시에서의 삶에 힘들어한다.

그러던 어느날, 어릴 적 친구였던 히라이와 도시를 만나게 되는 가호. 그런데 그의 초대를 받고 찾아간 도시의 집에서 기분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모래.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모래와 집의 구석구석에 쌓여있는 모래. 먹고 있는 밥에도 모래가 스며들어서 서걱서걱 거리는데 이상하게도 이 집 식구들인 히라이와 부부와 할머니 도시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한편, 남자 주인공 "나" 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하시구치네 가족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후 유령 저택처럼 되어버린 하시구치네 집 ( 그러니까 지금 도시의 집) 에 친구들과 ( 초등학교 시절 ) 놀러갔다가 이상한 경험을 한 후 ( 모래 폭풍을 겪고 두 눈이 빛나는 존재를 만남 ) 머리 속이 이상하게 꼬여버린다. 한마디로 사람이 망가져버린다. 사회 생활도 못 하고 사람들도 만나지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히게 된 "나". 그러나 주인공만 그런게 아니라 유령 저택에 갔던 친구들 모두 학교를 그만 두거나 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등 비극을 겪는다. 그런데 같이 갔던 " 히가 " 라는 여학생만 다른 의미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 보기왕이 온다 ] 로 섬뜩한 공포감을 조성했던 작가 사와무라 이치는 이 책 [ 시시리바의 집 ] 을 통해서 조금씩 조여오는 공포를 잘 표현하고 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나도 모르게 스며드는 비정상 혹은 빙의 현상. 정상적인 사람도 환자나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이 무시무시한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도시의 집에 다녀온 후 심한 기침과 깨질 듯한 두통에 시달리는 가호. 병원에 가보니 목이 염증에 의해서 심하게 망가진 상태. 남편 유다이는 절대로 다시 가지 말라고 하지만 알고 보니 결혼 반지를 거기에 두고 온 것 같다. 한편, 집에 틀어박혀 있는 주인공 남자 "나" 에게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 히가 고토코가 찾아온다. 유령 저택 방문 후 음침했던 그녀에게서 뭔가 힘을 느꼈었는데 알고 보니 그 후 유령이나 영가를 퇴치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는 히가. 그 집에 살고 있다는 " 시시리바" 라는 존재를 없애러 히가와 함께 가기로 한 주인공. 그들은 과연 이 괴이한 존재를 퇴치할 수 있을까?

공포물치고는 다소 심심하다고 느껴지는 [ 시시리바의 집 ]. 그러나 다 읽고 돌아서니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든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고 구석구석에 모래가 쌓이지 않았나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예전에는 그냥 지나갔던 현상 ( 갑자기 물건이 떨어진다던가) 도 갑자기 일어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한다. 우리 집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게 맞을까? 혹시나 우리 집에도 내가 모르는 괴이한 존재가 집을 차지한 채 내놓으라고 아우성대고 있는 건 아닐지.... 뭔가 불쾌하고 섬뜩하며 슬며시 내 집과 몸뚱아리 마저 차지할 듯한 존재에 대한 공포감을 너무나 잘 표현한 호러물 [ 시시리바의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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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전 떠나는 지옥 관광 - 고전문학, 회화, 신화로 만나는 리얼 지옥 가이드
김태권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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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왜 지옥에 끌리는가 "

인류가 수천 년간 상상해온 온갖 지옥들

그림으로 만나는 세계 지옥 백과

내가 좋아하는 영화 [ 콘스탄틴 ] 에는 지옥에 몇 번이나 다녀오는 남자가 그려진다. 그는 세상에 악마가 접근하는 것을 막는 일을 하는 일종의 영매사? 혹은 구마사? 인데 하루는 자살한 영혼을 찾으러 지옥을 가게 된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지옥에는 바싹 마른 미이라 같은 시체들이 머리가 뻥 뚫린 채 거미 같은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먹어치운다. 오마이갓! 진짜 지옥이 그렇다면 제발 가지 않도록 착하게 살아야겠다.

우리가 죽어보지 않는 이상,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세상인지 우리가 알 겨를이 없다. 그러나 이 책 [ 살아생전 떠나는 지옥 관광 ] 을 쓴 저자 김태권은 우리가 익히 들어본 명화 속에 그려진 지옥과 악마를 통해서 우리가 그동안 그것들을 어떻게 상상해 왔는지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번째 : 악마는 미남일까? 추남일까?

피터르 브뤼헐이 1562년에 그린 [ 반역한 천사의 추락 ] 에서 천사는 잘생겼고 악마는 기괴한 모습이다. 벌레나 개구리 물고기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 악마들. 반면에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19세기 그림 [ 타락천사 ] 에서는 근육이 예쁘게 잡힌 꽃미남으로 그려진다. 헐... 악마가 아이돌같네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렇다면 악마는 미남일까? 추남일까? 시대마다 다르게 상상했다는게 정답이다.








두번째 : 악마는 지옥에서 무엇을 할까?

신의 힘에 한계가 없다고 쳤을 때 지옥은 '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라' 며 신이 악마에게 위임한 공간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런 궂은 일을 야차라는 존재가 맡는다고 한다. 천사에 가까운 야차는 신의 뜻을 받들어 생전에 못된 짓을 도맡아 한 죄인을 벌준다고 한다.








김태권 저자는 이런 지옥이나 악마에 대한 재미있는 궁금증 풀이와 더불어 명화에 얽힌 뒷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이해 주고 있다. 얼마전까지 한국에서 절찬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부부의 세계" 에서는 불륜을 다루고 있는데 주인공 이태호가 억울하다는 듯 내지르는 대사가 한때 널리 회자되기도 했다. " 사랑에 빠진게 죄는 아니잖아 ." 글쎄? 잘못된 사랑에 빠진 건 죄가 된다고 하는데...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1814년도에 그린 그림에 등장하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는 시동생과 형수 사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사랑이 없었지만 그들은 사랑에 빠졌고, 하루는 사랑 이야기를 둘이 읽다가 입을 맞추었는데, 그 순간 질투심을 이기지 못한 형 잔초코가 그 둘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그림으로 묘사된 것이다. 죽어서 지옥에 간 둘은 " 모든 빛이 침묵 " 하는 어두운 곳에서 " 잠시도 쉬지 않는 지옥의 태풍" 에 이리저리 휘몰리는 벌을 받는다고 하는데,,,음,, 벌이 무서워서라도 남의 남자에게는 눈도 돌리지 말아야할 듯 하다.







서울대학교에서 미학과 서양 고전 문학을 공부하고 본업이 만화와 일러스트를 그리는 것이라는 저자 김태권. 어쩐지 서양 고전 명화에 등장하는 지옥을 설명하는데 얼마나 유쾌하고 재치있던지, 죄인을 부글부글 끓는 탕에 데치고 죄인의 몸에 칼을 관통시킨다는 지옥이 무섭기보다는 흥미로운 장소로 느껴졌다.

예를 들어, 책 138쪽에 나오는, 뒤로 걷는 죄인들 얘기를 동네 뒷산에서 자주 목격되는 어르신들과 ( 뒤로 걸으시면서 박수 치시는 분들 ) 비교했을 땐 정말 빵 터졌다. 그러나 곧바로 빵 터진 나 자신을 반성하게 만드는 김태권 저자의 방대한 배경 지식을 보라.

" 뒤로 걷는 지옥이 있다. 벌 받는 사람들 목이 반대로 꺾여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그런 무서운 장소치고는 벌이 약해 보인다. 뒤로 걷는 어르신이라면 이른 아침 동네 약수터에서도 자주 만나지 않던가. 심지어 뒤로 손뼉도 치시는데 말이다. "

" 바로 예언가와 점쟁이, 인간에게 허락된 지식을 넘어서려던 사람들이다. ' 보아라, 너무 앞을 보려 했기 때문에 이제는 뒤를 바라보며 뒤로 걸어간단다.' 앞을 내다보던 사람을 뒤만 보게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 이 벌의 핵심이다 "

지식으로 중무장하였지만 가볍게 읽을 수 있고, 고전 명화가 등장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책 [ 살아 생전 떠나는 지옥 관광 ]. 어쩔 수 없이 집콕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명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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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이
로미 하우스만 지음, 송경은 옮김 / 밝은세상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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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아직 살아있는 한 탈출을 포기할 수 없다.

레나, 나는 당신을 대신할 수 없어! "

이 놀라운 책을 단 한 마디 문장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바로 위의 문장이 아닐까? 로미 하우스만의 데뷔 소설인 이 [ 사랑하는 아이 ] 는 사랑과 트라우마라는, 인간 본성을 강렬한, 저자만의 시각으로 꿰뚫고 있다. 그녀가 TV 방송 제작 회사에서 편집국장으로 일하면서 많은 사건의 피해자들 ( 성폭행, 전쟁, 학대 등등 ) 과 인터뷰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는 듯 하다.

리뷰를 잘못 했다가는 온갖 떡밥들이 노출될 것 같지만, 최대한 조심해서 줄거리를 이야기해보자면, 한 여인이 납치범에게 잡혀있다가 도망치는 과정에서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런데 병원에 실려갈 때 그녀는 딸인 한나와 함께 있었다. 구급대원에 한나에게 엄마의 이름을 물었을 때 ' 레나 ' 라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누구이고 어떻게 교통 사고 현장에서 한나와 함께 있었을까?

병원에서 그녀의 진짜 이름이 야스민 그라스 라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경찰의 어떤 질문에도 속 시원히 답을 못 하는 그녀. 경찰 쪽에서는 야스민이 13년 전에 실종되었던 젊은 여성 ' 레나 ' 일 거라고 착각하고 ' 레나 ' 의 부모인 마티아스와 카린 벡에게 연락한다. 희망을 품은 채 병원으로 달려온 부모, 그러나 부상으로 인해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긴 했어도, 아버지 마티아스는 그녀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장 알게 된다. 하지만 한나는 실종되었던 딸 ' 레나 ' 의 판박이였다. 이게 무슨 일일까?


이 소설은 야스민, 마티아스 그리고 한나라는 3명의 화자 구도에서 서술된다. 트라우마의 영향인지, 한나는 조금 남다른 모습을 보인다. 매우 지적이지만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 소시오패스같은 느낌을 풍기는 아이다. 야스민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후, 자신이 붙들려있던 오두막집과 자신이 어떻게 그 집을 탈출했는지를 설명한다. ( 스노우볼로 괴한의 머리를 내려침 ) 한나는 아직도 남동생 요나단이 오두막집에 있다는 설명을 하는데, 간호사의 질문이나 경찰의 질문에 대한 대답 혹은 그녀의 생각이 다소 섬뜩하다. ( 뭔가 소름끼치는 아이 )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조금씩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진실이 이야기 속에 숨어있다는 걸 독자들은 깨닫게 된다. 저자 로미 하우스만은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어내는 방법이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 너무나 잘 표현해낸다. 그러나 아무리 상처가 크다고 하지만, 13살 밖에 되지 않은 한나의 반응은 정말..... ( 읽어보셔야 아심 ). 그리고, 사건 이후, 야스민은 심각하게 예민해져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세상을 피하며 집에만 박혀있게 된 그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익명의 쪽지가 날라오기 시작하는데...

다 끝난 줄 알았던 사건인데,, 야스민이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발생하려 한다. 이 이야기는 뒤로 가면 갈수록 독자들을 더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일까? 모두가 숨기고 있던 진실이 드디어 밝혀지면서 독자들은 경악과 충격 속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된다. 등장 인물들 모두는 성격적 결함을 가지고 있고 호감 가는 인물이 없었지만 그래서인지 책이 더욱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책들을 읽다보면, 도대체 세상에 믿을 놈이 있나? 라는 생각마저 든다. 책이 끝나는 순간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한 책 [ 사랑하는 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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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토마시 예드로프스키 지음, 백지민 옮김 / 푸른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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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겁도 없이 자유롭게,

찬란한 어둠에 파묻힌 채

헤엄쳤다.

폴란드 출신 작가 토마시 예드로프스키의 데뷔 소설 "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 는 시작은 매우 아름다웠지만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두 청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동시에 1980년 공산주의 치하에 있던 폴란드의 정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폴란드라는 나라와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불안과 긴장은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이어진다. 어쩌면 시대적 아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 주인공 루드비크의 삶에 흘러들어갔고 그는 마치 아팠던 과거를 회고하듯 글을 써 내려간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던 소용돌이 속에서 운명과도 같았던 그들의 사랑....

너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고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는 물속에 섰다.

​이 소설은 주인공 루드비크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이런 스타일을 통해서, 주인공이 소년 시절에 느꼈던 순수했던 첫사랑 그리고 청년 시절에 꽃피웠던 사랑을 추억하는 식으로 서술을 이끌고 있다. 매혹적이고도 시적인 표현과 감수성을 이용하여, 소설은 막 사랑을 시작할 때 누군가가 느낄 수 있는 그 짜릿함과 아득함을 독자에게 선사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 "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 가 단순히 연인 간의 사랑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그리고 정치적 혼란 속에서 마냥 개인적인 행복만을 추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비극을 다루고 있어서 더욱더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짧지만 찬란했던 루드비크와 야누시의 사랑, 하지만 정치적 억압 속에서, 그리고 이념적인 갈등 속에서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

이 책 "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에는 줄곧 하나의 책이 등장한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 금지된 서적 " 인 " 조반니의 방 "이라는 것이다. 주인공 루드비크가 게이바에 갔다가 우연히 볼드윈이라는 미국 작가가 쓴 이 책에 대해서 우연히 알게 되고 손에 넣은 책인데, 대학 졸업을 위해서 농활에 참여하게 된 루드비크는, 이 책을 계기로 야누시와 대화를 하게 된다. 사실 책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첫눈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루드비크는 자신과 야누시의 성적 정체성과 금지된 서적이 들통날 위험을 각오하고 그에게 책을 빌려준다.

" 넓은 어깨와 등의 잔근육이 재빠르고도 자신 있는 크롤 영법으로 움직였고,

물에 잠긴 머리는 팔을 두어 번 저을 때마다 공기를 들이마시러 올라왔다. (...)

태양을 등지고 있던 나는 물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형체는 이 길쭉한 응달을 헤엄쳐 지나자마자 멈춰서 고개를 들었다. "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그들은 곧장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로맨스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삐거덕거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루드비크와 야누시가 가진 정치적 철학적 관점의 큰 차이 때문이었다. 동성연애자였던 제임스 볼드윈의 책을 탐독하고 미국 문화에 깊이 빠져들어가게 되면서 비밀리에 공산주의에 회의를 가지게 되는 루드비크, 반면 야누시는 언론 통제국에 들어가 무엇을 출판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자리까지 차지한다. 이런 종류의 이념적 대립은 그들을 더욱더 갈라놓게 되는데...

이 책은 정말 아름답다. 저자가 표현하는 관능과 사랑에 대한 솔직함은 참으로 매혹적이라고 본다. 루드비크와 야누시는 정말 역동적이면서도 생생하게 묘사되는 캐릭터들이다. 공산주의 치하라는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때로는 깊이 있고 뜨겁게 열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정말 마음에 와닿았다. 그러나 결국 포기할 수 없었던 정치적 이념이 이 둘을 갈라놓았을 땐 정말 안타깝기도 했다. 만약에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던 당시가 폴란드에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절이 아니었더라면, 좀 더 행복한 개인 시절을 만끽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소용돌이 같던 나라 속에서 또한 격정적인 젊은 시절을 보낸 저자의 실제 경험을 토로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매우 예민하고 감성적이고 불안한 젊은이들의 격정적 사랑과 좌절 그리고 파괴적이고 원초적인 본능이 마치 예술 영화처럼 그려진 소설 [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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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안전가옥 오리지널 8
천선란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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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파이어를 만난 인간은 행복해져. 그들의 주특기거든.

꽃이 나비를 위해 아름답듯이 뱀파이어는 인간을 위해 아름다워. 

지옥에 있는 천사 같달까.”

전설이나 신화에서나 등장하는 뱀파이어. 매혹적인 외모와 눈빛으로 사람을 홀려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그들은 너무나 공포스러운 존재로 알려져있다. 인간과 다르게,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뱀파이어는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 찾아와서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하는 대신 피와 목숨을 앗아간다. 이런 괴물같은 뱀파이어가 한국의 현대 소설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었을까? 천선란 작가가 창조한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세계, [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 속으로 들어가보자.

“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취약한 부분. 그 틈을 파고 들어서 믿음을 주고 사랑도 주면서

야금야금 인간을 파억는거야. 자신에게 피를 바치도록.”

한 재활 병원에서 환자들이 고층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콘크리트 바닥에 짜부러진 시체들을 봐야하는 경찰들은 이것을 그냥 자살로 결론을 내리고 얼른 마무리짓고 싶어한다. 그러나 형사인 수연은 이 사건에 대해 다소 의문을 가진다.

투신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사건 현장에 혈흔이 거의 없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피가 한 방울도 없을 수가 있을까? 궁금해하는 수연 곁에 기척도 없이 불쑥 나타난 그녀, 그녀의 이름은 완다이다.

재활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난주는,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려쓴 뒤, 엄청난 빚을 남긴 부모 때문에 항상 전전긍긍하고 있다. 복리가 원금을 훨씬 뛰어넘은 상태에서 대부업체에게 연락을 받은 난주는 그 많은 대출금을 갚을 도리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쌈짓돈이라도 벌고 있는 그녀. 죽고 난 뒤까지 그녀를 괴롭히는 부모와 가족의 혐오스러운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녀는, 인간이지만 괴물처럼 일그러진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완다는 어릴 적에 프랑스로 입양이 된 한국인이다. 양부모 모리스와 클리에는 완다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애정을 나누고 싶어하나,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듯한 딸의 마음 속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다른 아이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 거울만 보면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여기게 되는 완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자주 놀러가던 허름한 극장에서 투명하리만치 창백한 얼굴빛에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 이후로 완다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만을 기다리게 되는데...

“ 외로움과 고독 끝에 몰린 사람들은 울지 않거든. 잊었다고 해야 할지 소용없는 걸 안다고 해야 할지. 영혼 없는 눈동자로 허공만 바라보며 하루를 까먹지. 슬플 때 눈물이 난다는거, 그래서 울 수 있다는 거, 그 나름대로 살아 있다는 의미야.(...) 그들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각이 발달해서 그 고독한 피의 향을 맡을 수 있어,”

[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 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적이지만 하나같이 어딘가 어긋나고 상처를 입은 채 살아간다. 항상 외로웠던 수연은, 경찰이 된 후 인생의 동반자처럼 여겨지는 은경 선배를 만나지만 그들의 동행은 오래 가지 않는다. 난주는 성실했던 자신보다 오빠를 아꼈던 부모가 사망하면서까지 자신에게 빚까지 남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 완다는 입양이 된 이후부터 이방인이라는 자신, 그 괴물을 매일 거울에서 발견해야만 한다. 외롭고 허무하고 살아있으되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그들의 삶에 나타난 존재... " 뱀파이어 " 이제 그들은 매혹적이고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존재에게 그들을 맡길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 에게 진정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뱀파이어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국이라는 배경 속에 덩그러니 놓인 " 여성 " 을 이야기하는 듯한 소설이다. 태어난 순간 고향땅을 떠나서 물 속에 떨어진 기름처럼 살아야 했던 완다나 낳기만 했지 돌보진 않았던 부모 밑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던 난주를 보면서, 나의 유년기나 학창시절도 떠올랐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 맞기는 한지, 아니, 중요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긴 한지, 궁금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젊은 시절 나의 방황은 다 그런 의문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나에게 속삭였더라면, 나도 구원자를 향해서 손을 뻗었을지도 모르겠다.

" 나 뱀파이어야. 괴물이라는 소리야."

" 괜찮아. 나도 괴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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