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고양이

내 딸 종팔이는 어찌된 일인지 사람보다 동물을 더 좋아한다. (놀이동산보다 동물원 더 좋아하는 아홉 살 본 적 있나?) 장래 희망이 동물보호운동가일 정도다. 그녀의 방은 온갖 동물 인형들로-'동물 人形' 은 이상한 말이지만 달리 어떻게 써야 좋을지 모르겠다- 발 디딜 틈이 없다. 난 세상에 봉제 뱀 인형, 박쥐 인형이 있다는 사실을 이 아이 키우면서 알았다. 그림을 그려도 동물만 그리는데, 도감 같은 거 안 보고도 별의별 동물을 다 그릴 줄 안다. 예를 들어 아르마딜로, 개미핥기, 나무늘보, 인도별사슴, 위에서 내려다본 토끼의 모습,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있는 원숭이, 뭐 그런 거.

종팔이는 특히 개를 좋아한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그림책 작가 존 버닝햄의 불후의 걸작 [내 친구 커트니]의 영향도 크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하게도 짝사랑이다. 아빠가 심각한 개털 알레르기 환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집에서 개를 기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아빠가 집을 나가 살면 안되냐고 엄마한테 심각하게 질문했다가 심각하게 혼난 적도 있다. 그때 그 얘기를 듣고 화가 난 나머지, "아빠도 너 못지않게 개를 좋아하지만 알레르기 때문에 기를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대신 너를 낳았다" 고 대꾸했던 아빠도 역시 엄마한테 혼났다.

우리가 엄청난 불편을 각오하고 멀리 시외로 이사하기로 결정한 건 순전히 개를 기르기 위해서였다. 한집에서 개도 살고 나도 살자면 천생 마당이 필요했고, 마당 있는 집에 살자면 서울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어서다. 요즘 종팔이는 내년 8월로 예정된 이삿날만 기다리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슨 개 사전 비슷한 책을 펴놓고 날이면 날마다 어떤 종을 사야 할지 고민하며 세월을 보낸다. 그런데, 그런 데나오는 개들은 하나같이 비싸다. 그래서 나는 버닝햄의 커트니 예를 들면서, "아무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족보 없는 개를 데려가는 어린이야말로 진정으로 개를 사랑하는 어린이지"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는 이렇게 화답한다. "아빠.... 그럼, 아무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족보 없는 잉글리시 바세트하운드 사줘." 그러던 어느 날....

내 조감독이 자기 집 개가 새끼 여덟 마리를 낳았다며 한 마리 가지겠느냐고 물어왔던 것이다. 본래 그 집 진돗개 한 쌍, 즉 수놈 '참'이와 암놈 '이슬'이 부부는 혈통 좋고 용모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참이는 참새를 잘 잡고 이슬이는 쥐를 잘 잡는다고도 했다.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일단 돈이 얼만데. 그리고 그 소식을 당장 종팔이에게 전했다. 그녀는 내 얘기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엎어지더니 기나긴 통곡을 시작했다.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기쁜 일이 생길 때마다 하는 짓이다. 아, 그때는 나도 감격했다!

그러나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울음을 그치자 종팔이는 아빠의 알레르기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애를 당장 데려와야 한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토록 믿고 따르는 무슨 개 사전 비슷한 책에 의하면, 진돗개는 첫 주인만을 따르기 때문에 더 크고 나서 데려오면 '전혀 말을 안 들을 뿐 아니라 아예 옛 주인을 찾아 가출해버리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조감독에게 물어보니 사실 그게 그렇단다. 어쩌나.

그래도 젖은 떼야 하지 않겠느냐며 가까스로 두 달을 벌어놓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년 8월까지는 반년 이상 남는다. 일단 이번에 태어난 애들은 포기하고, 내년 여름에 새로 태어날 강아지를 받아오자고 아무리 달래도 전혀 안 통한다. 지금 이틀째 종팔이는, 아장아장 걷는 생후 보름된 백구 흉내를 내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진돗개는 워낙 용맹스러워서 하룻강아지도 범한테 으르렁거릴 줄 안다며 종일 어딘가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는 괜히 조감독을 원망하며 처절한 고민에 빠져 있다.

나 아는 여배우 하나는 고양이를 정말 좋아한다. 그런데 그녀는 나 못지않은 알레르기 환자다. 그래도 그녀는 고양이 여덟 마리를 기른다. 보통은 발작이 심해질 때만 먹는 항히스타민제 알약을 매일 먹어 가면서.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사는 했고 진돗개는 못 데려왔다. 대신 고양이와 함께 산다. '나 아는 여배우' 배유정 씨처럼 많지는 않고 그냥 두 마리다. 원래 살던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했다가 알레르기성 천식 환자가 되었다. 자다가 호흡곤란을 일으켜 응급실에 실려갈 지경이었다. 의사 하는 말이, "고양이를 그냥 두시면 아마 선생보다 걔네가 더 오래 살겁니다." 바로 20년 피우던 담배 끊었다. 바로 이사했다. 지금은 널찍하고 볕 잘 드는 지하실에 놈들을 격리했으므로 괜찮다. 항히스타민제 알략 매일 안 먹는다. 참이와 이슬이도 큰 변화를 겪었다. 내 조감독의 집 좁은 마당에서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가출을 했다. 돌아온 이후 시고르이 농장으로 보내졌다. 너른 들을 실컷 뛰어다니며 마냥 행복해 한다고 한다. 끝으로, 조감독은 감독이 되어 <야수와 미녀>를 만들었다.

'박찬욱의 몽타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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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브라운 2006-03-09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박민규의 소설의 일부라고 해도 믿겠네요 재미있어요 ^^

하이드 2006-03-09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래미( 종팔이 : 가명이라고 합니다) 가 압권입니다.

mong 2006-03-09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종팔이가 압권이죠 ㅎㅎ

클리오 2006-03-09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다가 한참 웃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