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행이라도 많든 적든 간에 나름대로의 중심 테마 같은 것이 있다. 시코쿠에 갔을 때는 매일 죽으라 하고 우동만 먹었으며, 니이가타에서는 대낮부터 알싸하고 감칠맛 나는 정종을 실컷 마셨다. 되도록 많은 양(羊)을 보고 싶어서 홋카이도를 여행했고, 미국 횡단 여행을 할 때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팬케이크를 먹었다(일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팬케이크를 질리도록 실컷 먹어 보고 싶었다.) 토스카나와 나파밸리에서는 인생관에 변화가 생길 만큼 엄청난 양의 맛있는 와인을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독일과 중국을 여행할 때는 동물원만 돌아보고 다녔다.

이번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여행의 테마는 위스키였다. 스코틀랜드의 아일레이 섬에서 그 유명한 싱글 몰트 위스키를 실컷 맛본 다음, 아일랜드에 가서 도시와 시골 마을을 여기저기 둘러보며 아이리시 위스키를 음미할 작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은(물론 모두 술꾼들이지만) 거참 멋진 생각이라며 칭찬해 주었다.
애초의 계획은 아내랑 둘이서 2주일 정도 한가롭고 지극히 개인적인 아일랜드 여행을 만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위스키에 관한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중략)... 둘을 합쳐도 그리 긴 글은 아니지만, 문장을 다듬고 내용을 덧붙여 사진과 함께 독립적으로 한 권의 '위스키 내음이 배어 나는 작은 여행기'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내가 여행을 하면서 맛본 제각기 개성 있는 위스키의 풍미와 독특한 뒷맛, 그리고 위스키의 고장에서 알게 된 '위스키 향취가 물씬 풍기는' 사람들의 인상적인 모습을, 그대로 글로 옮겨 놓으려고 나름의 노력을 했다. 대단치 않은 책이지만, 읽고 나서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신다고 해도) "아  그렇겠다, 나도 혼자 어디 먼 곳에 가서 그 고장의 맛있는 위스키를 한번 마셔 보고 싶구나"하는 마음이 든다면, 필자로서는 무척 가슴 뿌듯한 일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의 언어(言語)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고, 우리는 언어 이상도 언어 이하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일들을 술에 취하지 않은 맨 정신의 다른 무엇인가로 바꾸어 놓고 이야기하고, 그 한정된 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에 우리의 언어는 진짜로 위스키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적어도 나는- 늘 그러한 순간을 꿈꾸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中 머리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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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2-12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좋은 원제목을 왜 맘대로 바꿨는지 몰라요... 킁. -ㅅ- 문학사상사 KIN...

하이드 2006-02-12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원제가 뭔데요??

페일레스 2006-02-14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제는 [만일 우리들의 말이 위스키였다면もし僕らのことばがウィスキ-であったなら]이죠.

하이드 2006-02-14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멋지군요! 표지도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