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직업 잔혹사 - 문명을 만든 밑바닥 직업의 역사
토니 로빈슨.데이비드 윌콕 지음, 신두석 옮김 / 한숲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워낙에 미시사에 관심이 많고, 도판이 많은 책에 환장하고, 게다가 그것이 made in UK 라면 더더구나 환장한다. <제목: 불량직업 잔혹사 부제 : 문명을 만든 밑바닥 직업의 역사>는 원제 The worst jobs in history에서 기가막히게 잘 뽑은 제목이라고 할까, 혹은 그 반대라고 할까. 제목을 보고 내가 가졌던 느낌과 이 책을 느끼면서 탄성을 내질렀던 부분들이 좀 달랐기 때문에 일단 제목에 먼저 딴지를 걸어본다.

이 책의 미덕은 너무 많다. 근래 읽은 미시사 책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으며, 가장 많은 책들을 내 서재에서 끄집어내게 했다. 

책의 저자인 토니 로빈슨Tony Robinson은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한 많은 저서를 펴냈고, TV 시리즈를 제작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국출신의 똑똑한 사람들중 TV 시리즈를 제작한 사람들이 많다!) 시대극 시트콤에 출연하기도 했고, 현재 '채널 4'의 고고학 시리즈물 '타임 팀'Time team의 사회자로 활약중이다.

이 책이 지루하게 읽어내야하는  '옛날 구닥다리 직업의 역사' 가 아니라,  눈에 쏙쏙 들어오는 이야기들인것은 결코 바보상자가 아닌 영국의 TV 프로그램에서 솜씨를 갈고 닦은 저자 덕분이 아닌가 싶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된 계기는 중세시대 '갑옷담당종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터이다. 수십킬로 갑옷을 착용한채 전투에 시달리는 중세 기사들을 따라다니며 주인이 하루종일 말을 타며 갑옷 속에 배설해 놓은 땀과 소변, 대변을 깨끗이 닦아야 하는 '갑옷담당종자' 가 최악의 직업으로 여겨졌는데, 그 이야기를 해준 사학자의 말로는 그보다 더 못한 직업도 얼마든지 있었고, 저자는 본격적으로 '역사상 최악의 직업'을 찾아 나섰고, 이 책이 그 결과물이다.

역사상 최악의 직업이라곤 하지만, 시기적으로는 '영국 문명이 태동하던 고대부터 빅토리아 왕조에 이르기까지(18세기 후반) ' 의 최악의 직업들이다.
책의 카테고리는 '로만브리튼과 앵글로 색슨 시대' , '중세 시대', '튜더 왕조' , 스튜어트 왕조' , '조지 왕조', '빅토리아 왕조' 로 나뉘어 있다. 사실, 영국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미시사나마 이렇게 왕조별로 나누어 놓은 책을 처음 접했기에 이 책을 읽고, 도움도 많이 되었고, 그 역사에 무척이나 관심이 가게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엽기적인 최악의 직업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직업들(사형집행인, 분뇨 수거인, 흑사병 매장인, 쥐잡이꾼 등), 상상도 못할 엽기적인 직업들(구토물 수거인, 갑옷담당종사자, 축융업자, 핀 제조공, 대청 염색공 등), 그리고, 이게 최악의 직업이라구?(돔 화가, 카스트라토, 소년 배우, 핀 제조공, 기마경관등) 가 있다.

하나씩만 예로 들어 간단히 이야기해보자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직업중 사형집행인. 도끼로 목 뎅겅 베어내는 그들의 직업이 최악의 직업중 하나인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의 자세한 묘사와( 젠장, 라면 먹으면서 읽었다.) 그들의 뒷얘기, 배경등을 읽는 것은 막연히 생각해오던 것을 구체화시켜줬다. 이런 구체화를 위해 저자는 당시의 문서들, 그림들을 풍부하게 인용, 재현해 놓았다.
   상상도 못할 엽기적인 직업들중 '핀 제조공'은 튜더 왕조 시대에, 왜 우리가 엘리자베스 여왕 초상화 보면 러플이 너플너플 달린 옷들을 볼 수 있는데, 거기에 달린 화려한 부분들이 분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남녀 공히 핀이 필수품이었다고 한다. 당시 핀제조업에 종사하는 자가 인구대비율로 따지면 현재 대중교통 종사자 수에 해당한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분업 이론'의 예로 나오는 핀 제조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기마경관이 최악의 직업이라구? 그렇단다. 조지 왕조 시절, 온 마을이 다 밀수꾼인데, 이들을 감시하고 잡아들이기 위한 이들이 '기마경관'이다. 해안선을 따라 일정한 거리마다 말 타고, 권총 차고 단신으로 순찰을 해야했던 그들은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을 분쇄하라고 순경 한 명을 자전거에 태워 파견한 격이었다' 고 한다. 하나도 안 낭만적이고, 불쌍하고 가련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힘들며, 봉급도 짠 직업이다.

이 책을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직업을 나열하는 방식이다. 역사순으로. 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같은 중세 시대에 나열되어 있는 직업은? 같은 빅토리아 시대에 나열되어 있는 직업의 순서는?
끝말잇기와 같다.

바로 전의 '필사본 채색사' 의 끝마디로 '대학살은 도끼와 칼, 창의 재료를 구하러 늪지대를 첨벙대며 돌아다닐 준비가 된 누군가가 없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첨벙대고 돌아다니는 '소철광 수집가'로 자연스레 넘어간다. 죽죽 얘기하다가 '하지만 소철광을 구했다 해도 충분히 높은 온도의 용광로에 넣고 녹여 철을 추출하지 않는다면 그 소철광은 무용지물이었다.... 숯을 구하는 작업 또한 지루하고 불쾌한 일이었다.' 라고 하며 '숯장이'로 넘어간다. 그렇게 그렇게 끝말잇기를 하다가 각 시대별로 '.. 시대 최악의 직업' 을 이야기한다.

이야기하는 방식은 도판, 당시의 문서, 그림, 그리고 재.현. ( 재현 사진들은 정말 놀라 자빠질 정도이다)
그리고. 유.머. 스튜어트 왕조 시대의 최악의 직업중 하나인 '피타디어의 조수' . 피타드는 성문을 부수는 대포같은 폭발장치이다. 피다드를 쏘는 사람은 피타디어. 피타디어의 조수는 탄두를 들고. 전쟁통에 적군의 화살이 빗발치는 전장을 달려 피타드까지 운반하는 인간유도탄이다. '피타디어의 조수는 무거운 갑주를 입고 굼뜨게 행동할지, 아니면 9킬로그램짜리 럭비공을 들고 럭비 영웅 조니 윌킨슨 Johnny Wilkinson 처럼 돌진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 저자. 중간중간 웃지못할 상황에서 웃게 만드는 글솜씨를 지녔다.

이 외에도 역사별로 설명하는 책 답게 당시의 중요사건들을 박스에 넣어 연대별로 정리해놓았다.
역시 책을 보는데 큰 도움이 된다.

간만에 만난 재미있는 미시사책이었다.

이 책의 소개를 접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예측했을까. 저자는 서문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다.
'이 책을 읽을 만큼 시간과 소양을 가졌다는 것은 당신의 삶이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만나게 될 사람들만큼 힘겹지 않다는 뜻이라는 것이 거의 자명하다. 이 책에서 조금이라도 배울 점이 있기를 바란다. 특히 직장에서 비참한 하루를 보내고 막 돌아와 혹사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면, 부디 당신이 역사상 그보다 끔찍한 직업을 가진 무수한 사람들 중에 끼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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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5-12-21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재미있어 보이는군요. 저도 미시사 좋아하는데..
그나저나 중세 갑옷은 역시 toilet-friendly하지는 않았던 거군요 -_-;;;

하이드 2005-12-21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네. 그랬답니다. 그거 말고도 환상박살나는 직업의 실상들이 많습니다. ^^

이네파벨 2005-12-2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흥미로운 책일 것 같습니다.
전 "사서" 고생하는걸 싫어하는 편이라(영화도 슬프거나 무섭거나 끔찍하거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류는 되도록, 특히 "내돈주고는" 안 보는 주의) 이 책을 살것 같지는 않지만...
도서관 같은데서 언젠가 꼭 빌려보고싶어지네요.
그리고 리뷰가....예술입니다.
추천 꾸욱~

하이드 2005-12-21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감사합니다. ^^ 재미있는 TV 시리즈 프로그램 보는거 같았어요. 저도 슬프거나, 무섭거나, 끔찍하거나 보는거 싫어하는데, 이 책, 고생했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중간중간 저자의 유머가 빛을 발하는지라, 재미있게 봤더랬어요.

모1 2005-12-22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국적에 따라 뭔가 다르기도 하나요?? 영국제를 좋아한다고 하셔서 궁금....그런데 신기한 직업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