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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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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 말로 쓰여진 글은 모두 우리 말일까?

 

번역: 한 나라의 말로 표현된 글을 다른 나라의 말로 옮기는 것. 두 언어 사이에는 어휘의 의미, 문법구조, 운율 등이 다르기 때문에 원문을 완벽하게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엠파스 백과사전 중에서>

 

번역해 놓은 글은 우리 말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난 이 말의 의미를 피부로 느낀 적이 있다. 학창 시절 한때 번역하라는 문제만 있는 시험을 여러 번 재시험 봤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채점 했던 교수에게 찾아 갔더니, 내가 낸 답안은 우리 말이 아니어서 점수를 줄 수 없었다고 했다. 번역은 해석과 달리 먼저 우리말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알라딘 이외의 사이트를 포함해서 이 책을 판매하는 리뷰를 모두 읽어 보았는데 모두 찬사 일색이고, 리뷰 한 개만이 글 말미에 ‘번역이 어색하다’ 란 언급이 있었을 뿐이다.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신 분들은 읽으면서 답답하단 느낌이 들지 않던가요? 한번 읽어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느낌을 받진 않고요?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이미 영어로 뭉그러진 우리말에 오염되어 있는 겁니다.

 

현란한 추천의 글들을 보고 산 이 책은, 내가 재미를 느낄만한 많은 요소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읽기 힘들었다. 한번 읽고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어 다시 문장을 읽곤 하다 보니 전체의 흐름을 놓치기도 많이 했다. 다 읽고 나니 화가 났다. 처음엔 왜 화가 나는지도 몰랐다. 역자 후기도 읽어 보고 추천의 글도 읽어 보다 그 이유를 알았다.

 

추천의 글 중

”늘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몇몇의 순간의 나는 존중 받아 마땅하다. 아마도 이 책을 펼친 당신 역시 그렇지 않겠는가.”

 

번역의 문제였다. 영어 수업 시간에 해석을 한다고 많이 듣고 쓰던 말이지만 실제로 저런 문장을 말하거나 써 본 적이 있나? 다시 책장 아무데나 펴고 읽어 보아도 뭔지 모르는 어색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얼마나 심각한 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을 샀다.

 

 

 

 

 

 

 

 

 

 

 

 

 

그리고 비교해 보았다. 결론은 이 책은 영어 소설을 잘 ‘해석’ 해 놓은 것이지 결코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것이 아니다.

 

워낙 전체적으로 해석을 해 놓아 아무 문단이나 예를 들 수 있지만, 알라딘의 책 소개 중  ‘책 속에서’라는 난에 있는, 그래도 알라딘의 편집자가 좋다고 생각하는, 이 책의 발췌 부분을 예로 들어 보자. 글자 색이 다른 부분을 유의해서 읽기 바란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나는 눈이나 얼음을 사랑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 동족 인류에게 애정을 갖기보다는 수학에 흥미를 가지는 편이 내게는 더 쉽다. 그렇지만 나는 삶에서 일정한 무언가를 닻처럼 내리고 있다. 그걸 방향 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자의 직관이라고 해도 된다. 뭐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기초 위에 서 있고, 더 이상 나아가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내 삶을 아주 잘 꾸려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절대 공간을, 적어도 한번에 한 손가락으로라도 붙들고 있다.
그래서 세상이 어긋나게 될 수 있는 정도, 내가 알아내기 전에 일이 악화되어버릴 수 있는 정도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이제 한 점 의심의 그림자 없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음은 원문이다.


 Im not perfect. I think more highly of snow and ice than love. Its easier for me to be interested in mathematics than to have affection for my fellow human beings. But I am anchored to something in life that is constant. You can call it a sense of orientation; you can call it womans intuition; you can call it whatever you like. Im standing on a foundation and have no farther to fall. It could be that I havent managed to organize my life very well. But I always have a grip with at least one finger at a time on Absolute Space.

Thats why theres a limit to how far the world can twist out of joint, and to how badly things can go before I find out. I now know, without a shadow of a doubt, that something is wrong.


 

전체적으로 단어 하나 하나를 꼼꼼하게 해석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영문 단어들’을 억지로 끼워 넣다 보니 더 어색해졌다.

 

가뜩이나 무슨 얘기를 하나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데 심지어 오역한 부분까지 있어 더욱 이해 방해 한다.

 

1) 그렇지만 나는 삶에서 일정한 무언가를 닻처럼 내리고 있다.

   (원문) But I am anchored to something in life that is constant.

 

이 책은 무언가 닻이 아닌 것을 닻처럼 쓰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원문은 무언가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이야기 이다. (~ anchored to ~)

 

2) 나는 기초 위에 서 있고, 더 이상 나아가 떨어지지 않는다.

   (원문) Im standing on a foundation and have no farther to fall.

이 책에 쓴 문장은 떨어질 곳은 있는데 내가 나아가지 않게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지만 원문은 더 이상 떨어질 곳에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3) 그렇지만 나는 항상 절대 공간을, 적어도 한번에 한 손가락으로라도 붙들고 있다.

   (원문) But I always have a grip with at least one finger at a time on Absolute Space.

절대 공간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붙잡고 있다고 해서 무슨 문학적 은유인가 했는데, 원문에서 보니 대문자로 되어 있는 것을 간과한 거다. 영어에서는 이유없이 문장 중에 단어 첫 글자들을 대문자로 쓰지 않는다. 여기서는 스밀라가 수학,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의 확고한 생각의 기준을 고전 물리학에서 뉴튼이 주장한 절대 불변의 공간이라고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조사나 문장 순서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고, ‘한 점 의심의 그림자 없이 같이 전혀 우리말 표현이 아닌 것도 여과 없이 그대로 쓰여 있다.

 

그냥 한 문단의 예가 이런데, 책 전체에는 얼마나 많은 국적 불명의 문장으로 채워져 있는지…

 

따라서 이 책은 이런 번역 상태로는 출판 해서는 안 되는 책이다. 더 이상 번역 아닌 번역으로 우리 말을 오염 시키지 마라. 그리고 인터넷 책방들도 이런 국적 없는 문장들을 자연스럽게 우리 말이라고 인식시키는 ‘편집자 추천’, ‘강력 추천’ 같은 것을 중지해야 한다.

 

 

옮긴 이야 자신의 우리말 표현 능력이 부족하여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이 책에 대한 추천의 글을 쓴 소설가는 도대체 무엇을 읽고 그런 현란한 추천의 글을 쓴 것일까? 또 dog’s ear는 책장의 한 귀퉁이를 삼각형으로 접는다는 의미일 때는 도그지어로 발음할까 독스이어로 발음하지 않고?

 

어떤 말로 변명한다 해도 마음산책 출판사의 편집인들은 이런 책을 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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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12-01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1)   
하이드

퍼갑니다.
사놓고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런던 헌책방에서 사온 영어책 과 같이 읽어봐야겠군요. 근데, 페터회가 이 책 영어로 쓴건가요?

Miss Smilla's Feeling for Snow

제가 산 책은 이 책이요. Miss smila's feeling for snow

smila's sense of snow 랑은 또 느낌이 틀리네요.

- 2005-12-01 11:43 수정  삭제

hanicare 2005-12-01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옛날에 이 책이 서점에 나왔을 때 내가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하고는 결국 못 샀던가 봅니다. 난 도저히 저 책이 스며들지 않았거든요.

blowup 2005-12-01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현주 씨는 번역자로서 굉장히 섬세한 데다, 글솜씨도 뛰어난 걸로 알고 있어요. 우리말 표현 능력이 부족하다는 등의 평가를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표현 자체가 난해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하치 2005-12-0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들이 다 칭찬 일색이어서 믿고 어제 주문했는데...흠흠...적어도 인용된 부분은 원문이 더 읽기 편하군요.

Fox in the snow 2005-12-0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현주씬 레이몬드 챈들러 시리즈를 번역한 분이예요. 나름 추리전문번역가죠. 단순히 영어만 잘하시는 분이 아니라, 영문학을 전공하고 언어학 학위를 준비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어요. 그분 블로그에 가끔 가는데 글솜씨도 상당합니다. 제목을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으로 할지,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으로 할지를 놓고도 많은 고민을 했다는 포스팅을 본 적이 있어요. 그냥 그렇다구요. 어쩌면 번역자의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다소 하드보일드하게..?
어쩌면 절판본의 번역을 너무 의식해서 그랬던것도 같아요.(몇부분 비교해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간단한 문장도 많이 다르게(틀리게가 아니라) 번역해놓았더군요) 저도 중간이후부터는 주인공을 따라잡기가 어려워서 다 읽고 리뷰도 못썼어요. 다들 칭찬일색이라..^^

blowup 2005-12-01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속여우 님. 우린 박현주 씨 블로그 팬이었군요. 하하. 저도 거기 매일 매일 가지요.^^

부리 2005-12-0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전 또 마태 책 얘긴 줄 알고 놀랐다는...

Fox in the snow 2005-12-01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저와 행동반경이 많이 다르지 않나봐요.

수퍼겜보이 2005-12-03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안녕하세요 (이미 몇 번 인사를 드렸던 것 같지만 또) 가끔 무슨 말인지 주어 동사 목적어를 찾아 읽어야 하는 문장들이 있긴 했지요.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노력의 흔적이 보이는 듯 해요. 번역이 완벽할 수는 없으니.. 그래도 뒷장의 dog's ear는 좀 그랬죠? ^^ 제가 재밌다고 리뷰를 쓴 터라 좀 찔려서 댓글 남깁니다.

하이드 2005-12-03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아합니다. 예전 책은 잃어버렸지만, '여자와 원숭이' 는 가끔 들쳐보는 책이에요. 이 책 나와서 반가워했던 사람 중 하나죠. ^^
박현주씨의 챈들러 시리즈 열심히 봤지요.
다만, 영어로 볼 때의 느낌과 우리말로 볼 때의 느낌이 다를 수 밖에 없는건 어쩔 수 없겠지요. 새로 읽어보지 않아서 어떨지 아직 모르겠어요. 마침 이번에 영어번역본도 사온터라 참고로 하려고 퍼왔답니다

panda78 2005-12-03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도그지어라고 발음했는데..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