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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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다음 책이 나온다면, 꼭 한국에도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란 제목은 해제를 쓴 '우리는 차별을 찬성합니다'의 오찬호의 말대로 우리나라에서 오해하고 혹은 알면서도 써먹기 딱 좋은 말이다. '힘들어도 열심히 해서 행복을 찾아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작정하고 오해하지 않는한 제목 그 자체만으로도 질문과 답없는 답을 내준다.


'요즘 젊은이들 발칙해' 라는 흔해빠진 말로 시작하는데 '젊은이'는 무엇인가, '젊은이론'부터 시작해서 부제인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에 대해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 길지 않으면서 꽉꽉 차 있고, 수치만 좀 바꾸면, 그대로 우리나라의 이야기인지라 정말 빠져들어 읽었다. (가장 충격적인건 지은이의 맺음말 이었다.) 


'청년'은 39세까지가 법적 청년이라고 한다 '청년'과 '젊은이'는 비슷하게 많이 쓰이는데, 그렇다면, 나도 아직 청년이고, 젊은이이다. 어째 당신이 젊은이요. 라고 묻는다면, 이 책에 나온 '1억명이 모두 젊은이' 라는 말에 따르면 나 역시 젊은이인 것이다. 

그러니 이건 '젊은이' 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모두가 읽어야할 이야기이다. 


세대간의 갈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점점 악화되면 악화되었지 나아질일이 없으니 심각한 문제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젊은이가 되기까지, 생산인구, 현역이 되기까지 한두해 걸리는 일도 아니라 무슨 수를 써도 당장 해결될 수도 없는 것이라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있겠지만, 약 20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일이다. 거기에는 남녀 차이도 있고 지역 차이도 있으며 빈부의 차이도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하나의 세대로서 '젊은이'에 대해 논의하려고 했던 것이 젊은이론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논의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중산층 붕괴론과 격차사회론이 유행하기 시작한 탓이다. 이제 '1억 명 모두가 중산층' 이라는 말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세대 내부에는 격차가 없다'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젊은이'에 대한 논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전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젊은이론'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세대간의 문제보다 계층간의 문제가 더 크다. (격차사회) 이런 전제를 깔고, 그러나 이 책은  이 엄혹한 시대에 행복도가 훨씬 더 높아진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젊은이들에게 포커스를 맞추어 그들이 왜 행복한가.를 짚어보고 있다. 


저자는' 요즘 젊은이들 발칙해' 라는 흔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모든 이야기에 수치와 역사와 논리와 예시를 보여주고 있다. 점점 힘들어지고, 모든 수치와 현재를 볼 때 점점 더 힘들어지는 절망의 나라의 그 중에서도 더 힘든 젊은이들의 행복도가 점점 더 높아지는 것은 왜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책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 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고도성장기나 거품경제 시기에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가 낮게 나타났던 이유가 설명된다. 말하자면, 그 시기의 젊은이들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고 믿었다. 더불어 자신들의 생활도 점차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은 불행하지만, 언젠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소박하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 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외국계 은행을 8년 다녔고, 자영업을 4년간 해보고 작년 여름 경에 접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작업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회사도, 가게도 프리랜서도 다 하고 있는셈인데, 돈은 점점 덜 벌게 되었지만, 마음은 점점 편해졌고, 작업실로 나온 지금은 황송할만큼 시간을 벌고, (돈은 못 벌고) 매일 매일 행복한 거리들을 발견하며 만족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였다.  


회사를 다니며 돈을 많이 벌어도, 부모한테 지원 받지 않는 이상 번듯한 집을 사고, 번듯한 직장을 다닐 일은 없다. 직장생활과 자영업 생활의 사이클에서 벗어난 나같은 사람 외에도 


아둥바둥 살아도 안 되는 체념의 분위기 속에 일에 내 시간은 물론 내 영혼과 자존심, 혹은 자존감까지 바치며 쳇바퀴 돌듯 일해도 안 되는거라면, 지금 이순간을 즐기며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것이 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희망'이 없어져서라니. 다양한 케이스가 있겠고, 나의 이야기도 꼭 맞는다고는 할 수 없으나 분명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다. 나는 '희망'이란 말보다 '욕망'이라고 바꾸고 싶긴 하다. 욕망을 버리니 소소한 행복이 보인다. 라고. 


저자가 두번째로 드는 이유가 '컨서머터리' 이다. 


행복한 젊은이들의 정체는, '컨서머토리'라는 용어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컨서머토리란 자기 충족적이라는 의밀, '지금 여기'라는 신변에서 가까운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말한다. 딱 이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싶다.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어울려 여유롭게 자신의 생활을 즐기는 생활 방식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듯하다. 다시 말해, 미리 '더 행복한 미래'를 상정해 두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아주 행복하다.'라고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지닌 젊은이들의 증가, 바로 여기에 '행복한 젊은이'의 정체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뜻이 맞는 사람들간의 공동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 때문이 아니라 이 나라가 절망적인데, 지금의 행복을 찾는 것이 나쁘단 말인가? 라는 생각도 든다. 


젊은이들은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수적으로도 노년층/장년층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고, 적기도 한데, 투표율마저 저조하다. 그러니 정치에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무시당하며 더더욱 악순환에 들어가는거다. 


이 책에서는 젊은이들의 정치, 사회 참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뜻이 맞는 작은 공동체에서 즐기는 것으로 더 단절되고, 무시당하는 것 아닌지. 하지만,그런 각종 신문 칼럼 등에 나오는 '패기없는 젊은이론' 은 몇가지 조사를 보면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을 2010년에 쓰기 시작했고, 그 다음해에는 3.11이 있었다. 3.11은 많은 일본 사람들의 세계관과 생활가치를 바꾼 일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젊은이들의 참여는 과거보다 결코 낮아지지 않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쯧쯧'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소극적이지만,  


아마도 이것은 일상의 답답함을 깨뜨려 줄 많나 매력적이고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출구'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품은 젊은이들이 ㅁ일 수  있는 간단 명료한 '출구'가 있다면, 젊은이들은 기꺼이 그 문을 박차고 들어갈 것이다. 


사람들이 행동을 시작하고, 그것이 대규모 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 바로 그들이 지닌 가치관이나 규범의식이 침해당했을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2장에서 서술했듯이, 젊은이들의 가치관은 더욱 컨서머토리화하고 있다. 무언가 높은 대상을 향해 분발하는 것이 안라, 친구 간계 등 자신과 가까운 세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렇게 도면 아무리 '격차사회'라든가 '블랙 기업'이라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도, 젊은이들 스스로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는 한 대규모 시위 따위는 발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그러나 바꿔 말하면, '자신들의 사회'가 침해도거나 '자기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세계가  지적을 당했을 때는 어떤 움직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국에 농촌과 도시 호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농공호적을 가지고 도시에 일하러 오는 사람들을 농공민이라고 한다. 책에서는 농촌에서 도시로 와서 하층민 생할을 하는 농공민과 도시에서 태어나 일자리를 못 찾아 고생하는 개미족들을 비교해서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농공민의 행복도가 개미족보다 높다. 


격차사회의 농공민이 바로 젊은이들.인 것은 아닌가. 라는 물음을 보다보면, 지금 이렇게 행복해할때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이등시민이 되어 버리는 것이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라고 하고 있을 때인가 싶은거다. 


근대  사회는 국민의 평등을 부르짖으면서도, 언제나 '이등 시민'을 필요로 해 왔다. 예를 들어,일본을 포함한 근대 국가는 '이등 시민' 의 역할을 계속 '여성'에게 부과해 왔다. 남성은 열심히 노동하여 한 가정을 먹여 살리는 대들보가 되고, 여성은 육아와 간병등 가사를 통해 남성을 돕는, 이른바 '브레드위너 모델(breadwinner model)'이 형성된 거이다. 그러나 남녀평등을 촉구하는 주장이 등장하고 노동력 부족 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나면서, 유럽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동시에, 값싼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민'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민 노동자의 수용을 지속적으로 거부해 온 일본은 '여성' 에다가 '젊은이'까지 '이등 시민'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다. 

이미 일본 젊은이의 '이등 시민화'는 진행되고 있다. '꿈'  혹은 '보람'이라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면 젊은이야말로 저렴하고 해고하기쉬운 노동력이라는 점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이대로 간다면 일본은 '느슨한 계급 사회'로 탈바꿈하게 될것이다. '일등 시민'과 '이등 시민'의 격차는 점진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일부 '일등 시민'은 국가와 기업의 의사를 결정하는 데 분주할테지만, 다른 수많은 '이등 시민'은 태평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소일하는 그런 구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람들이 불행한 사회라고 단정할수는없다. 예컨데 최저 시급이 300엔 정돌낮아진다고 해도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소한의 생활'을보증하는, 가령 Wii나 PSP를사람들의손에 쥐어주기만 하면 폭동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젊은이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마지막에 어떤 종류의 장미빛 결론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역사는 다른 옷을 입고 이렇게 계속 되풀이 되고 있고, 그러므로 아직 이러이러한 다른 선택지들이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봐도, 지금 시대의 일본은 그리 열악하지 않다. 돌아가야 할  '그때'도 없고, 눈앞에는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게다가 미래에는 '희망'조차 없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 달리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왠지 행복하고 왠지 불안하다. 우리들은 바로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로서. 


왠지 행복하고 왠지 불안하다 는 이도저도 아닌 결말 같지만, 그 이도저도 아닌게 작금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리뷰에 인용도 많고, 두서없이 길어졌지만, 이 외에도 할 이야기가 많다. 책에서 확인하시길. 

아, 내가 에필로그에서 가장 놀랐다고 했던 부분은 맺음말에 '스물 여섯해를 살아오면서' 라는 문구. 젊은 사회학자. 정도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이 책을 스물 여섯에 썼다니. 그야말로 '젊은이' 이다. 옮긴이가 썼듯이 기본이 확실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쉽고 정확하며 다양한 자료와 분석에 감탄했는데, 나이가 없어도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나이 알고 보니 기가 막히다. 

저자의 다른 책이 나온다면 꼭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을 읽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반의 반도 못 쓴 것 같다. 나머지는 책에서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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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루이치 노시토리가 재미있는 점
    from 책과 고양이와 이대호 2015-01-10 01:31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저자 후루이치 노시토리가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로 든 두가지 이유는 첫째로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구소련에 이런 농담 아닌 농담이 있었다고 한다. "안녕, 오늘 하루는 어때?" "응, 내일 보다는 나아." 섬찟한 이야기이다. 지금의 우리 이야기이고,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절망의 나라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번째로 든 것이 '컨서머터리'다. 자기 충족적. 지금, 여기 동료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