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레나
한지혜 지음 / 새움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표지의 화려함은 소설 속 주인공들의 빈궁함을 더욱 강조하는건가?

서문도 작가 소개도 없이 시작된 첫 단편 '호출''결혼식을 앞두고 옛 애인들과 관계된 물건을 정리하기로 했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사람을 잊기 위해, 그 사람과 보냈던 시간을 잊기 위해, 혹은 그 때 아팠던, 지난했던 과거를 지우기 위해, 사진을 태우고, 편지를 태운다. '자전거 타는 여자'에서도 식물인간인 아버지를 보낼 준비를 하면서 아버지와 관계된 물건을 정리하고, 태울 수 있는 것들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무언가를 태우면서 마음 한 구석의 재를 날려버린다는건 내게는 너무 드라마스럽고 닭살스럽다. '호출'은 내게 그런 느낌이었다.

두번째 단편인 '안녕 레나' 에서는 온라인으로 도피하는 인생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죽고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진학에 실패했고 ,재수를 할 형편도 아니었고, 실무 능력 따위는 배운 적 없는 인문계 고등학생이다 보니 작은 회사에 겨우 취직하지만, 내 인생이 작은 사무실에서만 정착하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우울해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뭔가 확 저질러보고 싶은 충동이 나를 들쑤신다' 그러다가 찾은 '통신'이란 '탈출구'   익명성을 무기로 매번 새로운 자신을 꾸며대는 그 곳에서의 안락함을 흔들어대는 '레나'라는 아이디의 그녀. 그리고 '숲' 이라는 아이디의 그. 그들과의 '안녕'을 끝으로 소설은 끝나지만, 궁금하다. 그 후 '나'의 삶이. 또 어떤 다른 도피처를 찾아 해메이고 있는건지. 

그 이후의 단편들도 계속 불편하다. 목소리 큰 엄마의 모습. 식물인간의 모습이거나 부재인 아버지의 모습.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의 모습들.  나의 이 불편함의 정체는 책을 찜찜하게 책을 덮고 책 표지의 화려한 꽃문양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 뒷표지의 같은 꽃 문양에 써 있는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이다.

' 하루에도 몇 번씩 뭔가 확 저지르고 싶은 청춘들의 우울을 경쾌하게 포착한 소설들. 대체적으로 '청년' 세대라고 할 수 있을 이 소설집 속의 젊은이들은, 우리 소설에 자주 등장했던 삐딱한 난동자, 엽기적인 호색한, 과격한 몽상가, 항우울성 페시키스트, 차가운 냉소주의자, '쿨 보이들'과 '럭셔리 걸' 등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어떤 인물인가, 요컨대 이 시대의 '이태백' 계열에 속하는 인물들. 그러니까 '확 저지르고 싶은' 젊음의 열망은 충만하지만, 대체적으로 경제난이 초래한 일상의 하중에 압도되어 푸릇한 미래의 희망과 출구가 봉쇄되어버린, 이 시대의 전형적인 젊음의 초상들인 것이다. '

평론가는 이와 같은 것들을 작가의 장점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똑같은 얘기를 하지만 그 반대에 서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 책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살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바로전에 읽은 중남미의 마꼰도라는 마을 이야기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와닿는다. 이런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뉴스가 아니라 소설에서 읽어야 했는데, 우울이 경쾌하게 포착되지도, 소름끼치게 사실적이지도, 와닿는 말로 포장되지도 않아서 맘에 안 드는 것이다.  한국작가들의 궁상스런 소설들을 멀리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내 주위의 궁상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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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3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05-05-03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작가의 소설일수록, 동시대가 배경인 소설일수록 취향이 분명하게 들어나고 거기에 상황과 사적인 감정까지 개입되어 책에 푹 빠지기가 힘들어요. 조금만 좋다고 하면 귀 파닥파닥 하며 사는데, 그 재미있다던 성석제나 천운영이나 등등등 전혀 안 사고 있는거 보면 말이지요. 최근에 읽었던 한국작가 책중 정말정말정말 재미있었던건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었네요. 정말 멋졌는데!

하이드 2005-05-03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권해주신 책 땡기는군요. 역시 저랑 취향이 정말 통하십니다.

하이드 2005-05-03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밑에 보니 황진이도 재미있게 봤었네요.

panda78 2005-05-03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승옥 전집 말씀하시던 생각 납니다. ^^
저도 그래서 우리나라 소설은 적게 봐요. 성석제도 두 권 빌려 읽고 말았구.. 천운영도 안 봤구나..
요 며칠 사이 재미있게 본 거로는 이윤기 [하늘의 문1-3]이랑 - 특히 2권은요, 제가 전쟁소설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책 좀 더 볼까.. 싶게 만들 정도로 재미나더랍니다.
[고래]요! 음. 재미있더라구요. 흠흠.. 그 변사체 말투도 그렇고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런 식으로 뭔가 주욱 나열하는 것도 그렇고
문체가 참 재밌었어요.

panda78 2005-05-03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황진이 관심없었는데, 재미있게 보셨다니 궁금해지네요. 새벽별 언니한테 담번에 빌려달라 그래야지. ^^
근데 정이현은 소설집 한 권 뿐인가봐요. 그거 말고는 무슨 수상작품집 같은 데 한편씩 실려있는 듯. 신작이 기다려집니다. ^^

하이드 2005-05-03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사실 읽지도 않고 별로다 하는건 반칙이긴 해요. ^^a 이윤기는 다아 좋아요. 근데 이양반것도 소설 읽은지는 디게 오래되긴 했네요.

panda78 2005-05-03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진홍글씨]이후 백만년 만에.. ;;;
근데 지금 불붙어서 쫘악- 살까 생각중입니다.
새로 에세이집도 나왔던데 그거랑 해서요. ^^

panda78 2005-05-03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들 다들 칭찬하시던 권지예의 폭소가 별로였던 탓에, 이젠 뭐가 재밌더라 해도 한국소설은 잘 안사게 되더라구요.;;;

2005-05-03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05-05-03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당연하죠. 그러니깐, 같은장소 같은시대 소설에 대해서는 제 성격과 상황이 이입되어 버린다니깐요. 그래도 못 읽을뻔 하다가 읽어서 좋아요.^^ 독서는 나의 힘!

돌바람 2005-05-11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 둘러보면 '레나'라는 닉네임의 익명성과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레나와 같은 익명의 레나들이 양상되는 걸 보면 작가가 포착하고 있는 현실 공간에 줌을 맞춰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진짜 뭔가 저지르고 싶어하는, 허나 저지르지 못하는 인간군이 어디든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쭈뼛거리게 되던데,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