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니 비가 온다. 어제부터 찔끔찔끔 오더니, 십여분을 걸어 지하철역까지 맞고 가기엔 홀딱 젖을 것 같아 우산을 찾는다.

 

우산 쓰고 다니는 것, 아니, 엄밀히 말하면,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싫어한다. 조금 젖는 것과 비가 오는 밖에서만 소용되는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것 중에 전자를 선택해 늘 젖고 마는 나이다.

 

다시 오늘 새벽으로 돌아가, 맞고 가자 두 세걸음 나섰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 신발장을 뒤적여 무려 대학교때 S가 대학로에서 사줬던 빨간 우산을 발견했다. 분명 우산살이 나갔을꺼라고 생각하고, 역까지만 쓰고 가고 역에 버리자. 는 마음으로 우산을 폈는데, 멀쩡하다.

 

새벽의 그 작은 부산함 속에서 '우산을 사자' 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전 읽은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를 떠올렸다.

 

장우산도 좋지만, 접어서 가방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우산이 더 좋다. 갑자기 비가 내릴 때, 비가 아주 많이 올 때 쓸 수 있는 우산을 사자. 올 여름에는 작년보다 비도 더 많이 온다고 하는데.

 

꼭 필요한 물건만 소유하려면 물건의 본질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물건을 정의하고, 확인하고, 평가하는 습관을 들이자. 그러면 불필요한 물건을 가려내는 데 도움이 된다. 물건의 품질도 가치도 놓치지 않도록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들여다보자. 보잘것없는 것은 아닌지, 쓸데없는 것은 아닌지도 물론 생각해야 한다. 물건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말고, 그 물건이 우리에게 실제로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지자. 반짝이는 샛별과 빛나는 태양이 그렇듯 꼭 필요한 물건은 그 본질에 충싫다. 본질에 충실한 단순한 물건일수록 품질이 높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산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산은 '소모품'일 것이다. 오래 쓸 수 있는 소모품.

모양은 가장 평범했으면 좋겠고, 아주 튼튼했으면 좋겠다. 잃어버리지 않고 단단히 챙겨 앞으로 이십년쯤은 쓸 수 있는 우산이었으면 좋겠다. 일상에서도 쓰고, 비가 많이 오는 여행지에도 챙겨갈만큼 손을 많이 탈 우산이었으면 좋겠다. 너무 작지도 않고, 너무 크지도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왕이면 비가 많이 오는 날도 어느 정도 비를 막을 수 있는 사이즈였으면 좋겠고, 접었을 때 내 베낭 옆주머니에 쏙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였으면 좋겠다. 비 먹어 헐렁거리는 재질 아니고, 살도 천도 단단했으면 좋겠다.

 

 

우리 삶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물건을 가지고 사는지도 중요하다. 물건은 우리 감정을 다아 내는 그릇이다. 따라서 쓸모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즐거움도 줄 수 있어야 한다. 너절하고 장소에 맞지 않는 물건은 모두 치우거나 버리자. 그런 물건들은 부정적인 파동을 발산하기때문에 소음 공해나 해로운 식품만큼이나 우리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 마음에 안 드는 물건들에 계속 둘러싸여 지내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 그 물건들이 신경을 거슬리게 해서(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나쁜 호르몬이 분비되는 탓이다. 물건 때문에 짜증스런 말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다른건 몰라도 내가 써 본중 가장 튼튼했던 우산은 MOMA 장우산이었다. 내가 사고 싶은건 2단우산. 손잡이가 나무였으면 좋겠다. 예전에 한 번 써 본적 있는데, 튼튼하고 좋은 질감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좋은 우산이어서 여행지에도 챙겨 다녔는데, 언제 잃어버렸는지 기억도 안 나네;;

 

물건은 '많이' 가지는 게 아니라 '좋은'것을 가져야한다. 적게 소유하되 제일 좋은 거을 소유하자. 적당히 좋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아름답고 가볍고 좋은 품질의 것을 고르자. 물건이 너무 많기만 한 공간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도 해를 끼친다.

 

근데 문제는 ..

 

물건을 구입할 때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일부를 구입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상적인 소파를 아직 사지 못했다면 그런 소파를 살 수 있을 때까지 돈을 저축하자. 그전까지 '임시용' 소파는 사면 안 된다. 그런 물건에 익숙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돈도 없어진다. 시시한 물건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는 좋은 물건을 갖고 싶다는 꿈을 품고 사는 게 더 낫다. 그리고 비싸다고 좋은 물건인 것은 아니다. 좋은 물건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필요와 환경에 부합하는 것이다. 좋은 물건은 시간이 흐를수록 아름다워지고 멋스러워진다.

 

 

'게다가 돈도 없어진다'

좋은 우산을 갖고 싶다는 꿈을 품고 나는 좋은 우산을 찾아낼때까지는 지금처럼 비 맞고 다닐듯하다.

 

 

좋은 물건을 경험한 사람은 보잘것없는 물건에는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소비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좋은 물건을 경험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시대에 우리는 물건에 내재한 품질을 보고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원하지도 않는다.

 

왠지 영국 가면 있을 것 같아. 내가 딱 원하는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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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3-06-1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봐야겠어요 :) ㅎㅎ

하이드 2013-06-12 11:39   좋아요 0 | URL
좋아요! 같은 저자의 책인 '소식의 즐거움'인가 하는건 소식이 전혀 안 땡기는지라 긴가민가 한데, 이 책 안에 나온 정도는 저한테 딱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