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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그랬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어제 서울에 (사실상) 첫눈이 내렸다. 눈다운 눈이 내렸단 말이다. 그리고 잠깐잠깐 내렸던 눈은 내가 집에 쳐박혀 있을때만 와서, 뉴스에서나 볼 뿐이었다. 폭설에 차량정체인 강원도 저 곳은 우리나라인가? 눈발을 맞으며 새벽길을 나서는데, 문득 화가 치밀어올랐다. 카페인이 들어가기 전인 잠결이였지만, 그 감정은 분명 '분노' , '화' 로 분류될 수 있었다. 이런 날은 산에 가서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으며 그 감촉을 발바닥 뿌리부터 느끼며, 산의 침묵을 들어야 하는데, 이따금 나뭇가지가 얹힌 눈이 버거워 털어내면 나뭇가지위의 그것이 바닥에 쌓인 더 많은 눈 위에 조금은 거칠게 내려앉는 소리만 들릴뿐인 그런 산을 타야하는데. 예전 어느 구정에 산과 눈과 까치와 하늘밖에 없었던 겨울 한라산에서처럼. 혹은 언제나 공상만 하는 겨울바다에 가야하는데, 검은 바다가 꿈틀대고, 하얀 눈발이 그 곳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파도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들어줘야 하는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 설국' 을 읽으며, 나는 눈의 고장에 들어갔다 나온것 같았다. '내 소설의 대부분은 여행지에서 씌어졌다. 풍경은 내게 창작을 위한 힌트를 줄 뿐 아니라, 통일된 기분을 선사해 준다. 여관방에 앉아 있으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어 공상에도 신선한 힘이 솟는다. 혼자만의 여행은 모든 점에서 내 창작의 집이다' 그래. 하나가 빠졌다. '설국'에서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함께이지만, 어느 노소설가처럼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혹은 어느 방황하는 철이 덜든 어른처럼 '혼자' 여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작품은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구상된 것이 아니였고 작가의 같은 소재로 씌어졌던 단편들이 모여 연작형태의 중편 '설국'으로 탄생하였다. 그렇기에 1장 2장의 표시도 없는 이 책을 읽다보면,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만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오랫동안 그녀를 찾지 않았고,1년만에 만난 그녀는 게이샤가 되어 있었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어느 순간 다시 1년이 지나 가을에서 겨울이 되는 눈고장이 나오고. 그렇다. 그러나 그 해나, 그 전해나, 그 전전해나, 그다지 다를 것은 없다. 겨울이면 눈이 오고, 기온이 내려가고, 춥고,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연회를 다니고, 그는 산골 눈마을의 여관을 찾아 '고마코'를 만난다.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컸다. 그는 그 마음을 다 알고, 그녀가 너무도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안타까웠지만, 그녀의 사랑을 헛수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그 자신의 생각에 또 더 애틋해하고, 사랑하고, 안타까워한다.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설국' 이라는 눈냄새 물씬 나는 이 책을 물이 얼어서 무거워져서 떨어져 내린 이 하얀 얼음덩어리들을 보면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이 책을 꺼내 읽은 것은 늦은 밤이였고, 그 다음날에는 (사실상 나에게는) 첫눈을 만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여름에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이 책으로 피서하려하기보다는 이 추운 날들이 다 가기전에 한두시간이면 읽어낼 수 있는 이 짧은 중편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