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의 마지막 눈 ' 황경신 ' 초콜릿 우체국中

눈이 내렸다. 그들은 이 눈이 이 해의 마지막 눈일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곧 봄이 온다는 겁니까, 내가 묻자 그들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은 그러니까 나를 이곳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두 사람은, 단정한 카키색 수트 안에 베이지색 와이셔츠를 받쳐입고, 와이셔츠보다 약간 진한 베이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넥타이 매는 법' 이라는 책자에 나오는 사진처럼 완벽한 넥타이였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넥타이를 제대로 맬 수 있죠?"

넥타이를 맬 때마다 몇 번씩 풀었다 맸다를 되풀이하는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나의 오른쪽에서 걷던 넥타이가 대답했다.

 " ……별로 연습을 한 건 아닙니다만."

음음, 하고 나의 왼쪽에서 걷던 넥타이가 헛기침을 했다. 눈은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조금씩 빠질 정도였다. 하지만 날씨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포근했다.

 "이제 곧 도착합니다." 왼쪽 넥타이가 말했다. "아주 늦은 것은 아닌 것 같군요.다행히." 오른쪽 넥타이가 말했다.

 "도시에서는 이런 눈을 좀처럼 볼 수가 없었는데."내가 말했다.

"그렇죠." 왼쪽 넥타이가 말했다."이곳의 눈은 폭신폭신하고, 보들보들하고, 아주 신선합니다."

"도시의 눈은 아무래도 거칠고, 퍽퍽하죠." 오른쪽 넥타이가 말했다. 해가 천천히 저물 때까지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저곳 입니다." 오른쪽 넥타이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작은 집 하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목적지인 '겨울'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그곳의 마지막 손님이었다. 나는 이 곳에 오기 위해 지난 며칠 동안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는데, 중간에 뭔가 착오가 생겨 정해진 날짜에 출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깔끔하게 넥타이를 맬 줄 아는 그들이 나를 이 곳까지 안내해준 것이다.

문을 열자 이미 도착해 있던 세 사람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남자 두 명, 그리고 소년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그들은 모두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는데, 어디에선가 식욕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젊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손님이지요?"그녀가 말했다. 넥타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 다음 그녀 또는 나를 향해"서두르지 않으면 밤이 되어버리니까요."라고 말하고 곧바로 되돌아갔다.

 "저는 이곳의 가이드입니다.좋은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말했다.

곧 저녁 식사가 차려졌다. 가짓수는 많지 않았지만, 어쩐지 입맛에 꼭 맞는 음식들이었다. 나를 포함한 네 사람은 별로 이야기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밖은 완전하게 어두워졌고, 세상은 완벽하게 고요했다.

침묵을 깬 것은 감색 카디건 차림의 남자였다. 그는 가지고 온 가방 속에서 보드카 한 병을 꺼냈고, 작은 병에 그걸 따라서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우리는 싫다, 좋다는 말도 없이 잔을 비웠고, 감색 카디건은 다시 잔을 채웠다. 투명하고 작은 유리잔에 술이 채워지는 소리, 그 술이 누군가의 목젖으로 넘어가는 소리, 벽난로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에 빈 잔을 내려놓는 소리들이 완벽한 고요함 위에 작은 스크래치를 남겼다.

 

그날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집 뒤에 있는 작은 언덕에 올라갔다. 바싹 마른 나무들 몇 그루만 서 있는, 쓸쓸한 언덕이었다. 오후가 되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와 구운 감자로 저심을 대신한 후, 가이드가 말했다.

 "저는 잠깐 외출을 해야 해요. 저녁식사 전까지는 돌아올 거예요. 여러분들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세요."

 감색 카디건은 소파를 차지하고 금방 잠이 들었다. 다른쪽 남자, 그러니까 회색 터틀네크 스웨터를 입은 남자는 식탁 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잠도 오지 않고 책도 가져오지 않았던 나는 멍청하게 벽난로 앞에 앉아,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날도 전날과 비슷했다. 저녁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감색 카디건이 가져온 보드카를 마셨다. 다음날도 전날과 비슷했다. 아침을 먹고, 언덕에 오르고, 돌아와 구운 감자를 먹고, 가이드는 외출하고, 감색 카디건은 자고, 회색 스웨터는 책을 읽고, 나는 불꽃을 보았다. 전날과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날은 언덕을 두 개 올랐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에는 세 개 올랐고, 그 다음날에는 네 개 올랐다. 다섯 개의 언덕을 오르는 날부터 점심은 밖에서 먹게 되었다. 역시 구운 감자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가이드의 외출 시간과 저녁식사 이후의 시간도 점점 짧아졌다. 아홉 개의 언덕을 오른 날, 우리는 보드카 한 병을 다 비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감색 카디건의 가방 안에는, 도대체 몇 병의 보드카가 들어 있는걸까.

 

열두 개의 언덕에 올라갔던 날, 밤 열 시가 넘어서야 거우 집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외출을 하지 못했고, 저녁식사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감자를 구워 보드카와 함께 먹었다. 커피는 생략되었다.

 "이게 마지막 병입니다." 감색 카디건이 말했다. 가이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어떠세요. 이렇게 겨울을 보니까."하고 물었다.

"좋군요. 이런 건 아주 옛날 기억 속에나 있는 건 줄 알았는데."회색 스웨터가 말했다.

 "그리 먼 옛날도 아니지만." 감색 카디건이 말했다.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내가 왜 겨울을 보고 싶어했던 건지." 나는 십이일 동안 내내 품고 있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그리웠겠죠." 감색 카디건이 말했다. "나도 그랬거든요."

 "우리는 겨울 한 철만 손님을 받고 있어요. 그분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몰라요. 저는 단지 그분들이 여기 묵는 동안, 겨울의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는 일을 맡았을 뿐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번 겨울의 마지막 손님들이죠. 예년에 비해 겨울이 빨리 지나가버릴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오늘까지는 괜찮네요." 가이드가 말했다.

 " 다들 봤어요? 우리가 첫 날 올랐던 첫 번째 언덕에 서 있는 나무들. 파란 순이 돋았던데." 회색 스웨터가 말했다.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넥타이들이었다." 마중 왔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죠. 근데 아세요? 밖에 눈이 오고 있어요. 이 해의 마지막 눈일 겁니다." 그들이 말했다.

"아마, 아니 틀림없이." 감색 카디건이 마지막 보드카를 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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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초록색 티는 보드카가 무지하게 땡겼다. 구운 감자도, 커피도, 새벽 3시 에디뜨 삐아프의 노래를 듣고, 한 번에 읽어내리지 못하는 커피테이블 책을 뒤적이며, 베란다 창문에 맞대어 있어 집에서 가장 추운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서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시린 발가락을 꼼지락 대가며 열심히 글을 옮기고 있다. 젠장. 보드카. 마지막 남았던 한 병을 동생 스키장 가는데 들려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보드카. 레몬 쥬스. 그리고 구운 감자. 양고기 몇점도 웰컴인데...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3시의 그 시간이 아니면, 땡기지 않을 그 보드카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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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2-1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에.. 이 글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특히 새벽의 하이드님께는 더더욱 보드카가 떙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