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의 풍경
쟝 모르.존 버거 지음, 박유안 옮김 / 바람구두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쟝모르의 새 책은 마치 토마스 만의 소설을 펴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의 산] 대신 제네바 사람들에게 '세상끝'이라 알려진 곳의 한 병원이 있고, 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토마스 만의 주인공 자리에는 암 투병 중인 늙은 사진가 쟝 모르가 있다. -<선데이 타임스>, 1999.10.24

라는 책 뒷면의 글은 이 책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표지의 그리스 정교회의 세 사제의 사진을 찍게 된 이야기.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리스로 신혼여행을 간다. 석양이 질 무렵 해변을 따라 긴긴 산책을 나선다. 해수욕 인파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광활한 바다, 석양이 이루어진 화려한 광경만이 눈을 가득 채운다. 조그마한 레스토랑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바닷가에 바싹 붙은 테이블에 세 명의 정교회 사제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서 참으로 맛갈스럽게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정교회 사제 세 명, 둥글고 검은 모자 세 개, 그 아래 뽀얀 백발 하나 둘 셋... 비어 있는 넷째 의자는 불청객을 기다리는 듯했다. 우리는 둘이었으니 그 빈 의자는 우리 차지가 될 수 없었다. 내가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내는 동안 아내는 나를 방해하지 않으려 멀찌감치 물러났다. " 여보게 젊은이, 하느님의 사람 셋을 덤으로 앞에다 두고 지금 열심히 석양을 찍고 있는 게지?" 제일 나이 많은 사제가 내게 그리스어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거의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고, 그렇기에 이 말은 내가 지어내는 말 혹은 상상하는 말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의 다 안다는 듯한 웃음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해석하도록 만들었던 것. '

책 소개에 쟝 모르/존버거 라고 되어 있는건 좀 반칙이다. 책의 시작은 ' 내 친구 쟝 모르를 스케치하다' 라는 제목으로 존 버거의 쟝 모르에 대한 이야기가 일곱장 정도 나와 있다. 35년이 넘는 그들의 우정. 존 버거는 쟝 모르의 모습에서 '소년'과 ' 개'를 본다고 한다. '관심 어린 무관심'의 사진을 찍고, 모든 것을 보았지만 여전히 모든 피사체에 놀라움을 가지고 사진으로 담는 사람. '세상끝' 에서 쟝 모르의 우정을 받아 누렸음을 감사해하는 존 버거의 짤막한 글이 끝나면, 이제, 드디어  at the Edge of the World 로 시작되는 쟝 모르의 여행기가 시작된다.

'세상 끝'의 쟝 모르는 아브르Avre강이 구비쳐 흐느는 시골 풍경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언덕 위의 병원에서 종양제거수술을 받는다. 제네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곳을 '세상끝'이라고 알고 있다. 수술이 잘 끝나고 회복할즈음 병원 꼭대기층의 까페에 간다. 그곳의 까페는 '광활한 파노라마의 전망을 갖춰 목가적이고 아름다은 곳이었다. 바로 그 풍경이 내가 청소년 때부터 알고 지낸 유명한 세상끝이었다. ' 그는 제네바의 '세상끝'에서 확인한 거리감을 화두로, 머릿속 여행앨범을 펼쳐놓고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길가에서 여러 ' 세상끝' 정거장을 다시 만난다.

제네바 세상끝에서의 사진들이 몇장을 차지하고 , 드디어 195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의 신혼여행으로 기억을 더듬어간다. 유네스코와 세계보건기구 국제적십자 등에서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약하며 '저널리스트 겸 여행자'로 전세계를 누볐던 그의 기억 속의 세상끝들은 예사롭지 않다.

폴란드의 유대공동체. 루마니아의 말라리아 사례지역에 몰래 들어가기. 그리고 몇 장 더 넘기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갑작스런 낯익은 이름의 장소가 등장한다.  ' 난데없이 북한에 가다 - 북한, 1962' 검열 당한 필름 때문에 별 사진을 건지지 못했던 여행이었지만, 강렬한 인상에 매료된 상태였다고 한다. 다른 여행지보다 더도 덜도 아니였던 그 곳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는 그가 별 관심 없었던 남한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는 여러 여행기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곳 중 하나이다. 1962년. 북한. 쟝 모르.

때로는 사막으로 때로는 아프리카 오지로 세상 곳곳에 발자국을 남긴 쟝 모르. 인생의 황혼기에서 ' 세상끝'이라는 주제의 과거의 앨범을 펼치는 작업을 마치는 마지막 사진은 빈 방이다.  반 쯤 보이는 커튼 없는 창문 밖은 밝다.  매트리스가 없는 철제 침대가 놓여져 있고, 하얀 벽에는 나뭇잎이 고르게 달려 있는  나뭇가지 한 줄기가 천장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쟝모르는 다음의 말로 책을 맺는다.

실제로 세상끝에 이르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부단히 움직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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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anpark 2005-02-1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쟝 모르/존버거 라고 되어 있는건 좀 반칙이다"는 리뷰 말씀에 붙입니다: 존버거+쟝모르,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대개 이 순서로 저자 이름이 실립니다. 그런데 유독 이책만 쟝모르+존버거로 되어 있어, 영어판을 펴든 저도 번역하기 전에 갸웃했습니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처음부터 번역하다보니) 첫머리를 읽은 뒤, 아하, 존버거가 40년 지기 쟝모르의 작품집에 어떻게든 기여하고 싶었구나, 두 노인의 애틋한 우정이 여간 아니로군, 금세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더군요. 존버거를 애독하시는 많은 분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미스하이드님과 엇비슷한 불만(?)이 있으실 듯한데, 저는 두 노인이 이 책에 함께 이름을 올릴 때의 맘을 헤아려보면, 그리고 그 바탕을 이룬 둘 사이의 - 마치 꼬임없는 왼발과 오른발의 협력처럼 - '이미지 메이커 + 텍스트 메이커' 공동작업, 그 일 속에서 더욱 다져진 그들의 우정을 헤아려보면 마땅히 '쟝모르+존버거'가 되었어야 했구나, 이해하시리라 여겨집니다.
사족 한마디: '쟝모르+존버거'가 '좀 반칙'이라고 쟝모르에게 얘기하면, 듣는 쟝모르 선수, 억수로 심정 상할 듯하군요 ("내가 뭐 존버거 시다바리가..." ...^^)

하이드 2005-02-1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번역자님이 직접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 존 버거의 팬 치고 쟝 모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죤 버거의 글이 여섯장 아니라 여섯줄만 있고 나머지는 다 쟝 모르의 글이라고 해도 불평하지 않을겁니다. 원서에도 그렇게 되어있었군요. 만약 이 책이 제가 벼르고 벼르다 산 존 버거의 책이었다면 좀 많이 억울했겠지만, 다행히 세번째 읽는 책이었기에 쟝 모르와 존 버거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어서 그러려니 생각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버거의 글은 이 책에서 서문 이상이지 않아보입니다. '행운아' 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미지+텍스트의 작업. 텍스트에 대한 보충으로서의 사진이나 이미지에 대한 설명으로서의 사진이 아닌 꼬임없는 왼발 오른발의 협력과는 거리가 멀어보이거든요. 심정적으로 큰 힘이 되어주었고, 30년 넘는 우정을 나누었다고 해도 공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흔치 않은 일 같아요. 원서 찾아보다보니, 표지가 북한 소녀의 그림자 사진이네요. 우와 - 그리스정교회 사제들의 사진도 좋지만, 원서의 표지를 따라갔어도 더 의미있었을 것 같아요.

balmas 2005-02-12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니까 사서 읽고 싶어지네요.^^ 읽어야 할 책 많은데 ... 힝.

하이드 2005-02-12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은 아직 안 읽으셨군요.

하이드 2005-02-14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eply to: RE: regarding ' At the edge of the World'

Dear Sunyoung Kim
I understand your point but we were merely complying with Jean Mohr's wishes. They are very close friends and it was perhaps a gesture of endorsement from John Berger, too.
I hope you enjoyed the book all the same?
With best wishes
Maria

Maria Kilcoyne
Publicity and Rights Director
Reaktion Books

하이드 2005-02-1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nderstood, but...

@euanpark 2005-02-1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ow! (the only word that I can say to Ms Hyde's splendid passion and inspiration!)

사실 그닥 결정적이지 않은 사족을 붙들고 불쑥 딴지 건 듯해 못내 켕겼는데, 이렇게 진지하고도 투철한 호기심을 발휘하여 쟝 모르 책에 대한 관심으로 승화시켜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제가 '사족' 운운한 것은, 미스 하이드 님의 리뷰 중 다른 빼어난 부분이 괜시리 이 논란 아닌 논란에 가려버리지나 않을까, 저으기 걱정마저 들 지경이었기 때문이랍니다. 가령 에필로그 페이지의 '빈 방' 사진을 읽어내신 부분은 저도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 혹은 눈여겨 보았을 뿐 가슴에 담아두지 못했던 - 점을 잘 지적하신 대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암튼, 호기심쟁이 미스 하이드 님을 알라딘에서 눈여겨보는 이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 아닐까....^^

하이드 2005-02-1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좀 그렇습니다. 저자의 뜻으로 올린 이름이라면, 더욱 의미 깊을진데, 저조차도 그 의미를 알고나면 더 짠한데, 이 책을 존버거의 책으로 가장 먼저 살지도 모르는 존 버거 입문자의 억울함을 괜히 쓸데없이 오버해서 투덜거렸네요. 그리고 하나 더 사족! 저는 Ms Hide 입니다. ^^ 책에 나오거든요. 지킬박사 친구가 ' if you are mr hide, i will be mr. searcher ' 뭐, 대충 이런 말. Mr. Hyde는 나쁜놈이지만, Hide숨는 사람은 왠지 미스테리하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