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는다.

<고민하는 힘>과 <청춘을 읽는다>의 내용이 새록새록하다.

낯익은 베버와 소세키, 빅터 프랑클이 다가온다.

 

 

 

<살아야 하는 이유>의 서문을 읽으면, 이보다 더 처절한 서문이 있을 수 있을까 싶다.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것과 같은 서문이다.

 

"왜 태어난 것인가? 왜 살아야만 하는가? 왜 세계에는 행복한 자가 있고 불행한 자가 있는가? 인생에 의미는 있는가? 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아들의 물음에는 이 세계를 찢을 만큼의 절박감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 어른은 그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어딘가에서 "행복을 발견한 최후의 사람들"(니체)의 심경으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이 거듭나고 '회심'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아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것, 언제까지고 건강하기를,안녕"이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 슬픔에 우리는 얼마나 오열했던가. 그런데 아들이 죽고 몇 달이 지났을 때, 일본의 도호쿠 지방을 덮친 대지진이 일어났고 원전사고라는 미증유의 비참한 사태가 현실이 되었다.

 

 

이 책이 쓰인 배경에는 이런 슬픈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럼에도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려네"라는 절명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토르 에밀 프랑클의 말을 버팀목 삼아 이 책을 썼다.

 

 

한국 사회는 학력이나 자산, 소득이나 지위의 극단적인 격차와 함께 행복과 불행의 차가 역력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 사회 안에서 르상티망(원한)이 깊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회에서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해 번민하며 고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혹은 비참하지는 않더라도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죽은 아들과 내가 합작한 기도의 말이다.

 

아주 작고 얇은 책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최근에 읽었던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오버랩되기도 한다.

  현시대를 살면서 현시대를 조망하기는 어렵다. 지식인들의 도움으로 지금 사회에 대해,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강상중의 '소세키'와 '베버' 는 근대를 살며 미래를 내다봤다. 그들이 그들의 저서와 작품 속에서 문제시 했던 것은 지금에 와서 정말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돌아보게 되는 계기는 맹신했던 '과학'과 개발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던 '자연' 이었다. 아무 의심없이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에 젖어 불행한 다수와 행복한 극소수의 사회를 살면서, 사소한 행복을 위해 돌아봐야 하는 것들, 놓으면 안 되는 것들, 놓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빅터 프랑클이 가장 중요시 했던 인간의 가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3가지는 창조, 경험, 그리고 '태도' 이다.

 

"인생이란 '인생쪽에서 던져오는 다양한 물음' 에 대해 '내가 하나하나 답해 가는 것'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겠네' 라는건,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랑클의 이야기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들은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겠다고 노래했다.

 

창조와 경험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으나 '태도'만은 누구라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도 언제인가는 가장 훌륭해질 수 있고,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인생에 대한 '태도' 라고.

 

 그러면서 예로 든 것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긍정으로 넘쳐나고, 자기계발로 푸시하며, 앞만 보고 달려나가지 않는 사람들을 패배자 취급하는 사회가 옳은 것인가.

 

 

 

지금 우리의 시장경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만성적으로 실업을 만들어 냄으로써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시장경제는 사회가 붕괴하지 않을 정도까지 실업률을 높이는 쪽이 부를 극대화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그 정도로까지 노골적으로 변용하고 일탈해 버린 것입니다.

 

행복론보다는 비관론을 강조하고, 인생에 순응하는 것같은 태도는 어쩐지 좀 맞지 않아 보인다.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할 부분이다.

 

자신이 세계에 대해 요구해가는 것이 '창조'이고 자신을 넘어선 세계로부터의 요구에 대해 책임을 갖고 답해 가는 것이 '태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태도를 단순히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계를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초의미'의 존재로 의식하면서, 게다가 그 안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에 대해 하나하나 책임을 갖고 결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도'라는 것이고, 운명을 그저 시키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윌리엄 제임스의 영향을 받은 소세키, 윌리엄 제임스는 'born once'보다 'born twice'를 주장했다.

평온한 한번의 삶보다 치열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거듭나기' 를 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오전에 느즈막이 샵에 나오는데, 라디오에서 요조가 <매력만점 철거농성장> 이야기를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말했다. 강기사가 물었다. '카타르시스'가 뭐니? 응, 그건 연극에서 나온 말인데, (머릿속의 시학 내용을 뒤적뒤적이며) 비극적이고 완전 불행하다가 그게 풀리면서 느끼는거야, 그러니깐, 복수초에서 그 여자가 열라게 당하잖아, 그러다가 복수하잖아, 그러면 그거 보면서 느끼는게 카타르시스인거지. 그냥 계속 평온하고 행복하면 모르는데, 죽도록 고생하다가 찾은 평온하고 행복이 카타르시스야.

 

라고 말해주었는데, 지금 글 쓰다 보니 다시 생각났다.

 

힘든 고비를 겪고 느끼는 감정의 고양, 그것이 더 생생하고, 가치 있고, 인간다운 것인 것일까? 뭉뚱그려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지금의 나는 twice born, 거듭나기.의 중요성을 알 것 같다.

 

그러니깐, 다시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로 돌아가면, 그러니깐, 죽지 말고 살아. 라는 것. 인생의 물음에 결단을 내리며 응답하며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

 

이것은 힐링북은 아니다. 어떤 책이든지간에 독서로 치유될 수 있겠지만, 요즘 많이 나오는 '힐링북' 카테고리의 책은 아니란 이야기. ( 그 카테고리에 넣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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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3-01-2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신문에서 본건데 고통은 극복하는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고 한 정호승시인 말씀이 생각나요. 서문이 너무 ㅜㅜ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생각과는 다른 책이었네요.

하이드 2013-01-20 20:34   좋아요 0 | URL
이전 책들도 굉장히 인상깊게 읽었는데, '살아야 하는 이유'는 뭐랄까, 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삶을 새기는 것 같은 절절한 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