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아니면 언제?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장편소설
프리모 레비 지음, 김종돈 옮김 / 노마드북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랍비의 잠언이기도 하고, 이야기 속에서는 한 유태인 빨치산이 죽기 직전에 지은 가사중 일부분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 책을 어떻게 리뷰할 수 있을까?  
빨치산 이야기. 그래, 2차대전 후반부의 러시아 유태인 빨치산들 이야기이다.
전쟁, 유태인, 빨치산, 뭐 이런 키워드들로 이 책을 묘사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이야기일 것이다.  

저자인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책 두 권은 존 버거의 < A가 X에게 >와 빅터 프랑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다. 전자는 전쟁과 인간이라는 점에서, 후자는 그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던 저자가 살아 돌아와서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이야기를 '관조적'으로 풀어낸다는 점에서이다.  

로드무비와도 같은 이야기는 멘델이 유태인 빨치산 대장 게델라를 만나 러시아 유태인 빨치산들과 이탈리아로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들에게 가혹했던 건 겨울, 식량,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돌아갈 곳도 없는 디아스포라, 그리고 전쟁.  
나이브하다고 해야 하나, 순수한 열정이라고 해야 하나,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들이 새로운 가족을 만나 더 잘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토론하고, 질펀한 농담을 하고, 꽃과 풀과 새에 감탄하고,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모습들이 과장 없이 생생하다.  

인간이란 것은 얼마든지 악마도 될 수 있고, 얼마든지 천사도 될 수 있으며, 절망도 하고, 희망에 부풀기도 하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새삼 느낀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왔고,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 저자의 약력을 볼 때, 이 소설이 전쟁과 빨치산, 그것도 유태인 빨치산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 이상이다.  

기억에 남는 장면들도 많고, 기억에 남는 인물들도 많다.  

억류된 유태인들을 구하기 위해 멘델이 속한 부대가 움직인다. 전투 끝에 구하려던 유태인들은 이미 다 죽어 있고, 그 와중에 멘델이 속한 부대의 부대장인 조제크도 죽는다. 마음이 무겁고, 위조전문가이자 길치인 부대장 조제크의 죽음에 읽는 독자의 마음 또한 무겁다. 조제크를 묻은 동료들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아지트로 돌아가다가 나침반이 죽은 동료의 주머니에 있었다는 걸 알고, 돌아갈 길을 몰라 고심하게 된다.  

전투, 구조 실패, 동료의 죽음, 슬픔, 나침반을 잃음... 다음에 진행되는 이야기는 이렇다.  

대장이 고심하고 있을 때 에어리라는 부대원이 멈춰서 새벽 안개 낀 물푸레 나무 사이에 반쯤 얼어 있는 찌르레기 한 마리를 발견하고 가슴에 품어 온기도 불어주고, 침으로 빵조각을 녹여 부리에 넣어준다. 잠시 후 기운을 차린 찌르레기가 하늘로 훨훨 날아가자 새를 유심히 쳐다보던 에어리가 대장에게 말한다. 저쪽이 서쪽이고 이쪽이 남쪽이라고. 찌르레기는 겨울이면 남서쪽으로 날아간다며.  

허, 조류생태학자가 따로 없군!"

"아- 나도 찌르레기였으면 좋겠네!"

에데크 대장이 짐짓 놀란 표정으로 감탄하자 모텔이 불쑥 끼어들어 부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새를 나침반삼아 대원들은 조금도 헤매지 않고 곧바로 아지트에 도착했고, 그때부터 에어리한테는 '새박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렇게 전투, 구조 실패, 동료의 죽음, 슬픔, 길 잃는 이야기는 한 마리의 반쯤 얼어 죽어 있는 찌르레기를 보듬어 온기를 주어 날려줌으로써 아지트로 돌아가는 방향을 찾고, 에어리라는 부대원에게 새박사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된다.  

이런식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 전쟁이 자연과 동료애와 범벅이 되어 있다.   

'가장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가장 인간적인'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떠올리는 랍비의 잠언은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은 그들의 인생, 나의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떠나는 그들에게 도착점은 시작점이다. 도착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떠남의 시작이다.
나를 위해 살기 위해 떠나고, 남을 위해 살기 위해 떠난다. 이 길이 아니면 다시 새로운 길을 찾는다.
중요한 것은 그 때가 바로 '지금' 이라는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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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1-04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비에 관심은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었던 책이에요.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늦은감이 없지않지만 새해 소망하시는 일 꼭 이루시기 바래요.

하이드 2011-01-05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째어째 번역된 레비책 네 권이 다 있더라구요. <주기율표>, <이것이 인간인가>,<지금이 아니면 언제>,<휴전>까지요. 처음 읽은 레비인데, 나머지 책들 읽을 생각하니 두근거립니다. ^^

반딧불이님도 틀림없이 좋아하실 책이리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