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접하는 노자와 히사시 <심홍>

첫장면부터 꽤나 흡입력 있고, 인상적인 작품이다.  

'가족을 죽인 살인자의 딸, 그녀와 나는...... 마주한 거울처럼 닮았다.' 는 카피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딸.
 죽임을 당한 측과 죽인 측이 실은 
 같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슬픈 현실'  

1/3 정도를 읽은 지금까지 가해자의 딸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아마 그녀와 피해자의 딸인 가나코의 이야기가 나오면 본격 클라이막스가 될테지만,

워낙 첫장면부터 쭉 - 자신있는 필치로 수학여행 중이라 집을 떠나 있던 자신을 제외한, 아빠, 엄마, 네살, 다섯살의 두 남동생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비극. '살아 남은 자'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무언가 안 좋은 소식을 듣고 선생님 한 명과 수학여행지에서 도쿄의 병원까지 오는 여정의 묘사가 대단히 섬세하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미스터리에는 범인, 탐정의 심리가 묘사되고, 피해자의 이야기까지도 나오지만, 피해자의 가족 이야기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더해 가해자 가족의 심정이라는 것은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희귀하다.   

무튼, 섬세하게 피해자의 가족, 살아남은 자인 가나코의 이야기를 읽다가, 옮겨보고 싶은 문장이 나왔다.
그녀의 대처방법은 '무감해지기' 였다. 가족이 살해당한 후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네 집에서 생활하게 된 가나코. 조금 복잡하게 얽힌 심정들이 있지만, 고모네는 가나코에게 아주 잘해준다. 마음으로, 현명하게.  

   
 

아침이면 고모부와 신고를 위해 도시락을 싸고, 오전 중에는 장보러 가는 고모를 따라나서고, 날이 맑으면 근처 공원에서 포장 도시락을 함께 까먹고, 오후가 되면 초등학교에서 돌아오는 마키의 숙제를 봐준다. 그런 나날이 거듭되면서 굳어 있던 표정이 풀려가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이제까지 눈물로 보낸 시간이 없었던 대신, 자신은 내내 강철과 같은 무표정을 달고 살았던 게 틀림없다.

날마다 고모 옆에 붙어서, 해도 빛이 나지 않는 가사 일을 도우며 생활하다 보니, 조용한 생활 속에 사소하지만 무심결에 표정이 누그러지고 마는 사건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근 실감한 몇 가지 사소한 기쁨을 손가락을 꼽아가며 세어봤다.
도시락에 넣을 전갱이 튀김이 유달리 바삭하게 잘 튀겨졌다. 비에 젖은 자양화가 갠 하늘의 태양빛을 받아 눈부실 정도로 빛난다. 비 그친 시장 길에 선들바람이 불어 땀을 순식간에 말려주었다. 도시락집에 줄을 섰는데, 점원이 마침 갓 지은 따끈따끈한 밥을 퍼주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까먹었더니 정말로 맛있었다.  

 
   

 

내가 최근 느낌 사소한 기쁨들을 꼽아보았다.

야구장에 갔는데, 야구장을 딱 반으로 갈라, 홈팀인 1루에만 비가 오고, 내가 응원하는 어웨이 팀인 3루쪽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왠지 통쾌했다. 이때까지는 테이블석이 뚜레주르존이라 좋아하지도 않은 아이스크림을 어거지로 받았는데, 오늘은 가그린 존이라 커다란 가그린 통을 받았다. 강기사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새벽 두시에 아주 시원하고 적절한 아이스커피를 사가지고 왔다. 언제 만져도 폭신폭신 몽글몽글 부들부들한 말로가 손 닿는 곳에 있다. 긴 베트남 출장길에서 돌아온 친구가 못된 코끼리가 새겨져 있는 멋진 물소뿔 책칼을 줬다. 내 얼굴색에 잘 어울리는 녹색 스카프를 샀다. 별로라고 했지만 먹고 싶었던 아침밥풍 정식이 무지 맛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아이스 라떼가 맛있었다. 야구장 갔다가 집에 돌아와 무지 피곤해서 뻗어 버렸지만, 잠에서 깨니 아침이 아니라 새벽 2시 반경이었다. 오늘은 꽃하러 가는 날이다. 트윗에서 파리에서 막 돌아온 동생이 런던에서 내 선물을 샀다고 이야기했다.   

 

 

사진 출처 : 하이드 트위터

힘든 일이 많고, 그 힘든 일 중에는 실질적으로 크게 고민해야하는 큰 덩어리의 문제들도 있고, 큰 덩어리의 문제가 아니라도, 자잘한 고민과 문제거리들로 조금씩 지쳐간지 ... 아주 오래지만, (그게 아마 나이 드는 것) 일상의 사소한 기쁨들이 '무심결에 표정을 누그러뜨려준다.'  

로또 당첨같은 대박이 아니라도, 잔뜩 생활에 얻어 맞은 생활하는 인간을 누그러뜨려 주는 것은 이런 각자의 일상의 사소한 기쁨들이라는 것을 깨달으니, 좋은 친구가 생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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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0-09-13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의 예쁜 사진과 글들을 보는 게 저의 일상의 기쁨이에요. ^^
아침밥풍 정식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하얀 쌀밥도 맛나보이고 생선도 맛있겠고, 낫토 좋아하거든요. 꼴깍 >.<
심홍. 은 글이 참 예쁘네요. '눈물로 보낸 시간이 없었던 대신 강철과 같은 무표정'이란 표현이 와닿아요. 보관함으로 차곡 ^^

하이드 2010-09-13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보니 연애시대 원작 작가가 쓴 책이더라구요. 미스터리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주인공의 심리가 읽는 내내 절절했어요. 꽤 분량도 있는데 말이죠.

아침밥풍 정식의 연어구이도 맛있었고, 낫또, 우메보시, 된장국, 디저트로 나오는 그 새알같은거에 막 꿀이랑 콩가루 같은거도 맛있었어요.

홍대 또 가서 저거 한 번 더 먹고 싶은데, 블랙올리브 빵도 사고 싶고 'ㅅ' 오늘은 다 노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