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데렐라
에릭 라인하르트 지음, 이혜정 옮김 / 아고라 / 2010년 2월
평점 :
에릭 라인하르트의 <신데렐라> 안에는 작가인 에릭 라인하르트를 포함한 네 명의 남자와 여자들이 나온다. 인상 깊은 세 명은 역시 에릭 라인하르트, 금융계의 로랑 달, 파괴적인 파트리크 네프텔이다. 티에리에 대한 이야기는 읽는 중간중간 다른 세 명의 캐릭터 이야기랑 헷갈리기 시작하더니, 후반부의 가장 야하지만 하나도 인상적이지 않은 변태와 취향사이를 오락가락하다 스와핑으로 빠지게 되는 부분만 기억에 남았다. 선정적이어서 기억에 남은게 아니라 후반부여서 기억에 남은거.
여기 백만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가가 있다. 백만가지 이야기를 다 쓰느라 독자는 한가지도 알아먹기 힘들어져버렸다. 간만에 인상깊게 무지 길고, 기억에 남지 않는 이야기다.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파트리크 네프텔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캐릭터. '추한 것'에서 어떤 미의식을 찾는다거나, 거기에서 어떤 철학적인 것을 끌어낸다거나. 그런건 난 모르겠고. 추하고, 더럽고, 역겹고, 불쾌하다. 혹자는 독자에게 이런 강한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것도 작가의 몫.이라고 할지 모르나, 그런거 필요없고, 시체 그림만 그려서 전시하는 여류화가의 전시회에서와 같은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건 분명하다. 내가 정말정말 무서워하는건 살아있는 물고기와 새이고, 내가 정말정말 싫어하는건 민폐와 동물학대이다. 이 두가지에 대한 나의 감정은 아마 남들보다 참아낼 수 있는 그 임계점이 낮을지도 모르겠다.
파트리크 네프텔은 청소년기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가족의 파탄을 가져온다. 그 실수란 100% 그의 탓이 아니지만, 누가 봐도 그의 탓인 120% 비난 받아도 할 말 없는 그런 치명적인 실수다. 그게 '실수'였건, '사고'였건, 본인에 의해 벌어진 일에 대해 가족과 사회를 탓하며 방에 처박혀 엄마를 엄청나게 괴롭히고, 맥주를 처마시며 티비 보고, 인터넷 서핑으로 성인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자위를 하며, 거리에 낚서를 하고, 그런 주제에 처음부터 끝까지 남탓을 한다. 티비가 바보상자이고, 토크쇼를 보면 바보천치빙충이가 되는 사회라고 해도, 토크쇼를 보며 욕하며 오줌싸는 장면은 내가 본 가장 더럽고 불쾌한 장면이었다. 후에 책소개에 나오듯이 테러리스트를 꿈꾼다. 하도 병신같아서 그것이 무엇이든 꿈만 꾼다. 근데, 더럽고 폭력적인 꿈도 꿈인가? 몹쓸!
에릭 라인하르트는 발에 패티쉬가 있다. 제목의 '신데렐라'는 각각의 주인공들에게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두가지는 소설가 에릭의 안이 옴폭 팬 발바닥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다. 옴폭 팬 발바닥에 추가로 필요한건 하얀 발과 크리스티안 루부탱이다. 이 책에 나오는 키워드들을 태그로 적어본다면, 굵고 큰 글씨로 '크리스티안 루브탱'이 나올 것이다. 그 외에 그의 키워드는 '가을' 그는 가을 예찬자이다. '신데렐라'라는 제목은 '발'과 '시간'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외에도 찾기 나름)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리고, 에릭의 12시는 '가을'이다.
로랑 달은 이 작품 속에서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캐릭터이다. 몽상가의 기질을 가진 금융가. 하루하루 너무나 괴로워하며 회사를 다니다가 스타브로커인 스틸을 만나 헤지펀드계의 스타가 된다. 왠지 모르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왠지 모르게.
'그 무엇과도 다른 새로운 형식의' 라는 평에는 동의하기 힘들고 '주식 시장, 신분 상승을 꿈꾸는 사람들, 가정의 붕괴, 실업 문제, 미디어 문화와 섹스 산업 등을 소재로 삼아 현실을 폭로한다.' 라는건 책읽기 전보다는 어떤 이야기인지는 알겠다.
책을 읽고 나면 뭔가 남는게 있어야 하는데, 이 책에선 어떤 미덕을 찾아야할지 난감하다.
불쾌감과 지루함을 주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었다면 성공했다. 프랑스 아마존의 이 책에 대한 평은 별 한개와 별 다섯개의 극과 극이다. 중간이 없다. 나는 이쪽 극이었는데, 다른 쪽, 다섯개 극에 있는 또 다른 독자가, 이 책의 미덕을 나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