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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학기 ㅣ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기리노 나쓰오를 <아임쏘리마마>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작가를 지금보다 더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 읽은 <아웃>, <다크>, <그로테스크>, <잔학기>까지 다 좋았는데, <아임쏘리마마>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도 거슬렸는지, 기리노 나쓰오는 역겨운 여자주인공을 만들어내는 작가로 한동안 박혀 있었다.
그녀가 역겨운, 눈을 피하고 싶은 등장인물을 만들어내는건 맞다. 그 추악함은 행동의 하드코어보다는 마음의 하드코어로 피와 살이 난무하기 보다는 베일듯한 차가운 마음과 짬밥같은 욕망과 순도 높은 이기심때문이다. 그건, 어떤 잔인한 장면보다 더 구역질난다.
<잔학기>는 중편 소설정도의 분량이다. '나'는 열살때 겐지라는 지저분하고, 머리가 모자란듯한 남자에게 1년 넘게 유괴되었다가 풀려난 끔찍한 과거를 가진 소설가이다. 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당시의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과 직관에 의해 재구성하여 쓴 소설의 제목이 바로 '잔학기'이다. 소설속의 소설인셈이다. '겨우 열살이던 내가 가진 지혜와 체력과 의지, 있는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살아남고자 한 경위를 어떻게든 나타내고 싶다는 뜻'으로 자신 안의 독毒을 쏟아내듯 써 낸 글이다.
열살 소녀의 눈으로 본 겐지와 옆방 남자 야타베씨, 그리고 그들이 머물던 공장의 사장과 사장 부인.
열살에 그 방에 들어가서, 열한살에 나오지만, 그녀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다. 사건의 경위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런저런 경우의 수들도 생각할법한 이야기들이고, 반전이나 대단한 스릴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담담하게 때로는 독하게, 이야기는 진행된다. 범인을 위한 변명들은 쓸데없이 수다스럽고 작위적인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런저런 눈에 보이는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짧은 분량에 소녀와 주변인들의 심리를 잘 담았다.
기리노 나쓰오는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의 마음에 (좋은쪽이든, 나쁜쪽이든)쉽게 감정이입 되도록 하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을 읽는 것이 때로는 괴롭고, 때로는 후련하다.
열살 여자 어린이가 어른 남자에게 1년 넘게 납치되어 한 방에 지내다가 구출된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한다. '자유라는 이름의 속박이 있고, 속박이라는 이름의 자유도 있었다. 이 사실이 아직 열한 살이었던 나라는 인간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릴 것 같았다.' 구출된 그녀가 느끼는 부모에 대한 위화감, 그녀에게 다가오는 정신과 의사니, 형사니, 검사니 하는 어른들, 어디를 가든지 따라오는 그녀에 대한 속되고 저열한 관심들.
미야베 미유키가 친절하고, 따뜻하게 사건과 사건 속의 다양한 인물군상을 그리고, 독자는 그 중 어디 속하나를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면, 기리노 나쓰오는 사건의 진실을 힘으로 까발려 독자 앞에 던지며 비웃는듯하다. 옮긴이가 기리노 나쓰오를 만났을때 '박력'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녀를 글과 사진으로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왠지 이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