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텐리 엘린의 <제 8지옥>을 읽다가 드는 생각. <제8지옥>의 맬리 커크는 의뢰인의 약혼자 루스에게 반해(탐정소설에 나오는 여자는 대부분 초미녀이다. 루스 역시) 처음부터 의뢰인인 말단경관 랜딩의 유죄를 증명하기 위해 사건을 맡는다. 이야기는 이것보다는 조금 복잡하지만, 무튼, 맬리는 사심을 가지고, 아니, 사심을 위하여, 자신의 본분을 거의(?) 내팽개친다. 그 과정에서 어줍잖은 기사도도 ( 황폐해진 여자를 이용해서 자버리지 않는다던가) 나오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인정받고 싶어 안달하는 발정난 짐승이다. 그리고, 그것은 <제8지옥>의 수많은 맘에 안 드는 점 중에서도 손 꼽히게 맘에 안 드는 점이었다.주인공 캐릭터가 그모냥이면 그런 것이 당연하지만, 유독, 탐정의 로맨스에 가재미눈을 뜨고 보는 것도 사실이다.
왜인지는 글을 쓰면서 차차 생각해보겠지만( 당장은 답이 안 나올 수도 있겠지만), 탐정 소설, 아니, 추리 소설에 로맨스가 나오는 경우는 꽤 드물다. 우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를 떠올려보면, <기나긴 이별>에서 만나는 로링부인을 제외하고는(그나마 그녀를 떠나보낸다) 애인이라 할 존재가 없다. 그 외의 하드보일드 탐정들을 보면, 로렌스 블록의 루 아처나(창녀라는 특이한 직업의 그녀는 연인이라기보다는 파트너에 가깝다) 로스 맥도날드의 매튜 스커더나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족속들이다. 최근에 읽은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에서 그들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개인적으로 아직 데니스 루헤인을 좋아할 마음이 서지 않았으므로 패스.
본격으로 가서, 셜록 홈즈나 루팡, 마플부인이나 포와르의 로맨스는 수 많은 에피소드 중에 하나로 잠깐 스치고 지나갈 지언정, 지속성을 지니고 나타날 수 없다. 엘러리 퀸 에피소드 중에서 그가 빠져 있던 배우던가 하는 여자에 관한 단편이 있다. 네로나 펠박사의 로맨스는 읽어본 적도 없지만, 별로 상상하고 싶지도 않고.
경찰/경감 소설에서는 모스 경감처럼 (항상 여자친구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외롭거나, 가족에게 버림받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현모양처인 부인이 있지만, 작품 속에서는 존재감이 투명인간 만큼도 없거나 한 경우이다. 얼핏 떠오르는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에 나오는 케레라 형사의 애인이자 나중에는 부인이 되는 여자가 있긴 하다. 그녀의 경우는 맹인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탐정들이 마쵸거나 임포거나 게이거나 한 것도 아니다. 그들 주위에는 희생자를 포함하여 여자들이 넘쳐난다. 다만, 항상 거리를 유지하고, 그들이 '그녀들'을 위해 몸을 던질 때에는'로맨스' 보다는 어줍짢은 '명예'나 '의리' 인 경우이다.
나는 추리소설의 팬이자,로맨스 소설의 팬(까지는 아니라도 좋아하는데) 인데, 왜 그 두 장르의 조합은 이렇게 껄끄러운지 모르겠다.
방금 막 생각난 껄끄러웠던 추리 소설 하나가 있는데, 범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미녀에게 반한 얼빠진 주인공이 나오는 마츠모토 세이조의 <너를 노린다>이다.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로맨스에는 약해서, 이야기에 맞게 로맨스를 녹여내지 못하고, 쌩뚱맞게 집어넣어서 전체 스토리에 위화감을 일으키기 때문이라는거. 혹은 범죄와 탐정과 피해자에 집중하고 싶은 추리소설 팬의 집중력을 방해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