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는 딱 해야할 일들에만 집중하고, 잘 안 될때만 루틴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도저도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서, 페이퍼나 써볼란다. 아, 밥은 먹었다. 오뚜기 돼지국밥에 미니양배추 두 통을 썰어 넣고, 사은품으로 받은 연두 청양 조르륵 넣고, 발아현미 햇반 작은 그릇 넣어서 호로록 호로록 


요 몇 달, 수면이 내게 큰 화두였고, 수면 시간을 꽤 늘렸다. 안 해서 못했구나. 나 할 수 있어. 라고 자신감 들기 시작했는데, 

지금 잠이 문제가 아니라! 하는 고질적인 내 안의 잠귀신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고, 낮에 괜히 잠이 오기 시작했다. 수면시간이 모자란건 맞지만, 낮잠을 자고 싶다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이건 분명 도피성 잠이다. 잘쏘냐. 잠귀신까지는 아니라도 잠도깨비 정도는 될 커피를 마시겠다. 


여튼, 잠은 오고, 뭐 한 건 없고, 시간은 벌써 11시고! 며칠 전에 읽은 최현숙의 책에 대해서 끄적여볼까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 어젯밤 꿈에, 내가 누군가에게 사과하며, 시간이 없어서. 라고 변명하고 있더라. 말하면서도 기가 찼다. 시간이 없어? 내가? 돈 받으니깐, 일인가보다 하지. 4시 다 되서 나가서 9시 땡하면 들어오며 주 5일 일하는 내가? 꼴랑 나 하나랑 손 안 가는 고양이 세 마리 키우면서, 집도 제대로 안 치우고 대충 사는 내가? 시~간~이~ 없다고? 기가 차지. 


아는 분이 나주 여성 농민 생애사 '억척의 기원' 에 대해 이야기하길래,  아, 최현숙. 하며 책장에서 꺼내서 단숨에 읽었다. 내가 요즘 책을 자꾸 단숨에 읽는 이유는, 단숨에 못 읽는 책은 (프루스트라던가, 프루스트라던가 ) 덜 읽어서 얘기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챕터도 없는 이 강물같은 책. 그리고, 포포바 책도 아직 읽고 있고, 요즘 메인으로 읽고 있는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 필사 하며 읽는지라 속도가 더디다. 아, '눈물점'도 반쯤 읽었다. 

여튼, 얇은 책이라고 가벼운건 아니지만,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얇은 책, 마침 또 에세이 모음집이라길래, 앞에만 좀 보려다 '단숨에' 읽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할까. 처음에는 날 나간 중국집 칼같은 글이다. 라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너무 오버인거 같아서. 근데, 느낌은 그거에 가깝다. 묵직한 칼인데, 날이 나갔지만, 여전히 칼인. 그런 글이다. 이걸 구구절절 얘기할 수 없으니, '톱날 같은' 글이라고 하겠다. 도끼같은 책이 있다던데, 톱날같은 책도 있는 거. 


SNS에서 타오르는 이슈들에 생각이 복잡하던터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아, 원래 세상이 복잡하지. 근데, 그 복잡에 힘을 실어주는건, 지금 당장의 말들보다 시간과 행동, 꾸준함, 갈팡질팡할지언정, 너무 비껴가지는 않는 의지이다.


최근에 무레 요코의 '괜찮게 살고 있습니다' 를 다시 읽었고, 역시 좋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60대의 조각을 챙겨두었는데, 전혀 다른 새로운 60대의 조각들을 최현숙의 책을 읽고 또 챙겨두었다. 어느 정도냐면, 저자의 책 중에 엄마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기록한 '작별 일기'라는 책이 있는데, 내가 좋아하지 않는 주제다. 근데,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다시 담아두었다. 

'할매의 탄생', '할배의 탄생'은 글쎄. 후자는 일단 하나도 안 궁금함.


이력이 독특하다. 구술생애사 작가. 천주교로 인해 사회운동을 시작했고, 민노당 여성위원장과 성소수자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요양보호사와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노인 돌봄노동에 몸을 담아왔다. 


돌봄노동 하면 생각나는 그런 그림들을 찢어준 책이었다. 톱날 같은 글들로. 



'좋은 여자'와 '미친년' 

자식을 향해 보이는 엄마들의 모성애, 특히 극단적인 상황에서 보이는 동물적 모성애를 그린 영화나 글을 접할 때마다, 나는 불안감과 이질감과 죄책감이 뒤엉키고 헝클어진 통각에 휩싸인다. 그녀들의 극단적 모성애를 거울삼아, 자식에 대한 내 태도를 비춰보는 것이다. 이는 모성애라는 규범에 관한 부지불식간의 자기감시다. 감성, 감정, 특히 동물적, 본능적 감수성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에 대해, 나는 의심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성과 감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자기 분열적이 된다. 때로 감성에 치받혀 통곡을 하면서도, 내 통곡의 내용물을 의심한다. '나는 대체 무엇에 대해 왜 울고 있는가?' 모성애라는 타인에 대한 감성에도 그렇지만, 쌍을 이루어 같이 오는 자기 연민에 대해서는 의심의 날을 더 세운다. 울면서, 통곡하면서, 연민하면서, 그러고 있는 내 감성들을 이성으로 응시한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일이다. 죄책감은 훈련되고 학습된(사육된) 수치심일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에 충실하면서 내 감성과 이성의 흐름에 나를 담고 그런 나를 주시하면 된다. 울음이 복받치면 울되, 그 울음이 의심될 때는 의심을 이어간다. 울음이든 의심이든 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맥도널드 할머니 권하자의 이야기가 몇 번인가 나온다. 


나혜석(1896~1948)은 어느 겨울날 행려병자로 거리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최초의 운동가이자 화가이며 작가다.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거부하는 삶을 살았던 나혜석은, 자식과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받으면서, 경제적 어려움과 심신의 고통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다. 가난한 페미니스트들에게 나혜석은 저항하는 여성의 모델이자 자기 미래에 관한 불안한 암시다. 

'내 방식대로 남은 삶을 살겠다'던 '맥도널드 할머니' 권하자는 암이 복막까지 퍼져 행려병자들을 위한 병원에서 73세의 나이로 2013년 죽어 화장되었다. 

'정처 없는 삶'에 대한 로망은 독한 삶과 독한 죽음에 대한 불안한 환대다. 정처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아마 정처와 떠돌이의 경계에서 살아왔지 싶다. 


이 이야기들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들리는데, 혼자 떠돌이로 사는 60대의 저자. 중산층 가정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가난을 접한건 결혼을 하면서. 25년간의 결혼생활을 접는 것은 여자와의 바람. 부모님은 억대 보증금의 월 750씩 드는 요양원에 있고, 형제들이 잘 살고, 사이도 좋다. 아버지와 평생 불화했으나, 아버지 말년에 화해? 경제적 자원과 사회문화적 자원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 나온다. 50 넘어 글 쓰기 시작했다는데, 이런 배경들을 가지고, 이런 글들을 쓰다니, 그의 다른 글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맥도날드 할머니 권하자님. 내가 나이 들어 돈이 많이 없으면, 나도 맥도날드에 가서 커피와 가장 부드러운 햄버거를 시키고, 끼니를 때우며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도서관에도 가고. 얼마전에 도서관에 남성 노인은 많은데, 여성 노인은 없다는 글을 보고, 정말 그러네. 싶었다. 도서관에서 남성 노인과 여성 노인 얼마나 보시나요? 왜 그런지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닥쳐보지 않은 미래는 알 수 없고, 짐작하고 준비할 뿐인데, 이렇게 짐작해본다. 1인 여성 노인으로 살게 될 나의 미래를 향한 길에 이런 조각들을 놓아야지. 생각해보고, 조각들을 마련하기 위해 뭐가 필요할까. 생각한다. 


내가 노년에 타먹을 연금은 17+30+30(예상기초노령연금) 해서 합이 77만원이다. 혹 운동과 글 현장과 돈을 위해 노인 공공근로를 한다면 30만원 추가. 기초 수급 대상자도 해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그 덕은 못 볼 것 같다. 살아온 거나 돈이나 이만하면 미풍양속이지 싶다. 사회적인 건 차후고, 개인적으론 이 정도 수입이라면 그럭저럭 살아지려니 싶다. 물론 이건 내가 가진 다른 자원들과 적절한 시기의 자유죽음 의지덕에 누리는, 배부르고 단호한 여유다. 


이 부분. " 다른 자원들과 적절한 시기의 자유죽음 의지덕에 누리는, 배부르고 단호한 여유" 


아님 말고, 할 수 있는거 하고, 그건 그래서 좋고, 이건 이래서 좋고. 식의 나에게 좀 필요한 것 같다. 숨쉬듯 자연스럽게 단호할 것 같은 저자인데, 나는 꽤 노력하면, 좀 단호한 맛. 정도는 생기지 않을까 싶고. 


제일 좋았던 꼭지. '나이듦에 대한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 


내게 가장 중요한 대비는 마음가짐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 행복한가?'를 명확히 해 그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으면 된다. '자급하며 소신을 품고 실천을 나누는 삶'이 예나 지금이나 나를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하더라. 소박한 일상과 자존감을 다치지 않을 만큼의 물질이, 그 자체로도 단출하고 소신과 실천에도 도움이 되더라. 지금처럼 살고 있으면 나이는 오는 대로 먹어질 테고, 그에 따라 늙음과 질병과 장애도 따라와서 나를 이룰 것이다. 그 끝에 죽음이 오거나 잡을 테고, 그 다음은 이승의 일이 아니다. 죽음 이후는 차치하고, 이승의 남은 삶도 궁금하지 않다. 오는 대로 최선을 다할 작정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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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이좋아 2021-03-09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하는 60대의 조각을 챙겨두었다는 말에 아우~~ 좋아요를 남겨요

하이드 2021-03-09 18:06   좋아요 0 | URL
40대 되면, 금방 50대이고, 60대도 금방일거 같구요. 70대는 아직 잘 안되지만요. 미래 준비 위한 조각들 부지런히 챙기고 모아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