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디어 마이 네임 - 이름이 지워진 한 성폭력 생존자의 진술서 너머 이야기
샤넬 밀러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20년 6월
평점 :
강간 사건은 지금 이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뉴스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지만, 이 사건은 몇 년에 걸쳐 뉴스를 볼 수 있어서 기억한다. 그리고, 스탠포드 수영 선수의 강간 사건에 대한 피해자의 최후 진술서가 세계적으로 바이럴을 탈 때, 나도 읽었고, 책으로 나온 걸 알게 되었다. 이 책하고 김지은입니다.를 같이 묶어서 파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참 독한 책들이 묶여 있었구나 싶다.
사람이 독하다는게 아니라, 책이 독하다.
부조리를 뒤집은 글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판사는 탄핵되었고, 브록은 책 속의 누구 말마따나 성폭력의 얼굴이 되었다.
진술서도 대단히 잘 쓴 글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대필 의혹도 있었다고) 책 읽어보니, 글을 굉장히 잘쓰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작가로 커리어를 가꿔나갈테니, 작가라고 해도 되겠지. 회복하는 중에도 처음 간 코미디클럽에서 코미디 대본으로 대성공을 하는, 글도 잘 쓰고, 열정도 있고, 에너지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덤프트럭급의 사고에 내팽겨쳐져서 추스리는 몇 년간의 시간을 책으로 써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글을 너무 잘 써서, 5백페이지 넘는 피해자, 생존자의 이야기를 읽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받은 오렌지색 서류철에는 이후의 반응에 대한 팸플릿이 있었다고 한다.
" 0~ 24시간 : 무감각, 경미한 어지럼증, 알 수 없는 두려움, 충격. 나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카테고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2주~ 6개월 : 건망증, 탈진, 죄책감, 악몽. 마지막 카테고리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6개월~ 3년 이상: 고립감, 기억이 갑자기 한 번씩 되살아남, 자살 충동, 일을 하지 못함, 약물 남용, 관계의 어려움, 외로움. 이건 누가 쓴거지? 누가 이 쓰레기 같은 종이에다 불길한 미래를 예언한 거야? 내가 이 얼굴도 모르는 우울한 사람의 시간표에 따라 살게 된다는 건가?"
그리고, 독자는 그 시간표를 살아내는 샤넬을 읽게 된다.
"나는 돈만 있으면 감방 문이 활짝 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폭력이 발생했을 때 여자가 술에 취한 상태였으면 이 여자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폭력이 일어났을 때 남자가 술에 취한 상태였으면 사람들이 그 남자를 동정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내 끊긴 기억이 그에게 기회가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피해자가 된다는 건 신뢰받지 못한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 책을 오래 읽었는데, 사실, 이 책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것은 별로 없다. 강간이 있었고, 목격자도 피해자도 있었는데, 언론은 유망한 수영선수인 가해자의 편을 들고, 피해자의 행실을 비난하고, 유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가해자를 선해해서 고작 3개월 감방에서 있다 나오는 판결을 내린다. 판사는 나중에 탄핵됨. 판사가 탄핵되는 거 빼고는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 너무 매일 보는 이야기라서.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피해자가 생존자가 되는 과정이다. 진술서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저자의 글쓰기 멘토였던 소설가 앤 라모트와 연결된다.
" 저는 당신이 걷어붙였던 소매를 다시 풀어 내릴 거라고, 그러면 깊고 깊은 내면에서 무언가가 당신에게로 돌아가서 당신이 무엇을 추구하거나 도전하는 것이 합리적일지 알려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신 위에서 부서져 내리려고 하는 파도 아래로 잠수하는 방법을 알지요? 글쓰기는 그런 면에서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혼란과 임박한 소용돌이에서 물러나고, 그 과정에서 한 조각 안식처를 찾기 위해, 기억을 상상을, 사색을 휘갈겨 적는 행위.."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다시 단단해졌기를 바란다.
우리는 사람이 서로 잘 맞는다고 할 때 남자가 자신을 여자에게 끼워 넣는다는 생각이나 하지 그 외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간과한다. 귀는 색종이처럼 얇아서 내가 그의 가슴팍에 내 얼굴 옆면을 기댈 수 있게 해준다. 손가락은 엉키지 않고 깍지를 낄 수 있다. 한 손은 하나의 턱ㅇ ㅔ자그만한 의자가 되어줄 수 있다. 우리 몸은 구부러지고 접히도록 되어 있어서 우리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사람을 편하게 받쳐준다. 우리에겐 아껴주어야 할 작은 부위들이 아주 많다. - P100
루카스가 떠나자마자 나는 나의 하루 안에서 아픈 공허함을 느꼈다. 내가 복숭아씨 주위의 부드러운 곤죽이 되어가는 동안 가장 단단한 부분인 복숭아씨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 P139
사람들은 그의 미래가 마치 그가 그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우리 대부분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그것은 우리가 내리는 선택을 통해 하루하루 만들어진다. 미래는 노력과 행동을 통해 조금씩 획득된다. 거기에 맞게 행동하지 ㅇ낳으면 그 꿈은 흩어지고 만다.
처벌이 잠재력을 근거로 삼을 경우, 특권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을 받게 될 것이다. - P4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