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지적 모험담

양아줌마님의 글을 읽고 나에게 떠오르는 글들을 두서없이 써서 남긴다.  

 

한글을 익힐무렵 떡 하니 맞닥뜨린 글자 <읽>. 

생애 처음으로 겹받침 글자를 만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융통성이 없는 나는 집에 계신 다른 어른들께 여쭈어도 좋았으련만

그 책의 임자인 언니가 학교에서 어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표지에 <국>자와 <어>자가 띄어씌어진 아랫 줄에 선명하던 <3-1>이 눈에 선하다. 

 

언니가 4학년 때 고전읽기용 교재로 학교에서 받아온  

초록표지에다 그림도 별로 없던 두꺼운 책 속에는 그야말로 별천지가 숨어있었다. 

알고보니 각색되지 않고 원작에 무척 충실했던 그림동화 몇 편과 창작동화 두어편.

백설공주와 신데렐라,황금새,흑두건  

그리고 한 남자가 팔베개를 하고 들판에 누워 있는 모습의 삽화가 실렸던 꿈을 찍는 사진관.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고나 할까? 

지금까지도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옛날 이야기 한 자락 들어본 적 없고  

내가 아는 동화는 모두 그 책에서 읽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지경이다.  

경이롭다는 단어와 마주칠 때면 떠오르는 책이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나 또한 소년생활칼라북스를 읽었다.  

두 세권 씩 사와도 늘 차례를 기다려 읽어야 했기 때문에 더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만화방에 다닐까봐 엄마는 만화를 금지했기 때문에 

소년중앙과 어린이새농민에 연재된 만화(꺼벙이나 쭉정이,맹꽁이 서당 등)를 열심히 봤다.    

부록으로 아주 얇지만 별책으로 나왔던 <벤허> 도입부를 읽고나서 영화를 보았을 때 

한 장면 장면이 만화와 아주 똑같은 것을 보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하면 중요한 영화 장면을 그려내어 이어붙이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어린 혹은 멍청한 나는 만화랑 똑같이 영화를 찍었다는 생각으로 어찌나 놀라워했던지,ㅋ

 

그리고 한 페이지에 한 가지씩 단편적인 과학상식이 실려 있던 컬러도 아닌 과학학습만화!  

<제트기류>와 처음보는 물고기였던 개복치 그림,  

나무 이름을 죽 소개하면서 "십리 절반 오리나무"로 끝맺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역시 내가 아는 과학 상식은 그 책에서 다 배웠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책이기도 하다.  

 

중학교 때는 독후감 숙제를 하기 위해 선정된 목록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었다. 

단지 짧은 글이었기 때문에 선택했을 거라고 짐작된다. 

여러 번 읽고나서야 겨우 이게 부모님을 비유한 이야기인가 하고 깨닫게 되었는데 

친구들은 한 번 척 보고 그걸 몰랐단 말이냐?는 비웃음을 날려서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리고 거의 줄거리 수준의 엄청난 축약본이 다수였지만  

찰스 램이 쓴 세익스피어와 오 헨리를 빠뜨리면 섭섭해 할 것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 말괄량이 길들이기, 마지막 잎새와 크리스마스 선물, 20년 후 같은..  

어느 날 또 독후감을 쓰기 위해 뒤적이던 책에서  

조지 오웰이 쓴 <파리와 런던의 영락생활>중 한 단락을 만났는데 왠지 뇌리에 박혔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돌려읽으며 눈물을 쏟았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생각난다. 

아무리 읽어도 난 눈물이 나지 않아서  

감수성 예민해야 할 나이에 대책없이 무딘 나 자신에게 조금 어이없어 하기도 했다.  

영화도 마찬가지여서 여덟 명이 함께 <미션>을 보던 날 일곱 명만 울었다. 

오보에 선율을 배경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폭포에서 떨어지는 선교사가 등장한 첫 장면부터  

무척 감동적이긴 했어도 울 일은 아니었건만 친구들은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와 쟝 그르니에가 있다. 

아마도 범우사에서 나온 문고판 제법 두꺼운 <데미안>을 두 세번 읽었다.  

<섬>은 알베르 까뮈의 서문에 나도 전염된 탓이었는지 몰라도 금새 매료되고 말았다. 

당시에는 이게 소설인가 아닌가 혼자서 나름 심각하게 고민했던 웃지 못할 사연도 있다. 

그 때까지 소설만 소설만 읽던 내가 처음 발견한 비소설이다. 

 

대학 때는 역시 헤세의 단편<페터 카멘친트>에 매혹되었다.  

읽고 나서 그 옛날 <사랑의 삼중주>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청소년용 문고에 실려있었던 걸 알게됐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기억난다. 

내가 보낸 대학시절은 책에 대해서 뿐만아니라 여러군데 구멍이 나 있다. 

아니 거의 텅 비어있다.  

짧게 한 동아리 활동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계속 연락하는 친구 하나 없을 정도로 흘려보낸 시간이다. 

왜 그랬는지, 그냥 너무 게을렀는지 단순히 멍청했는지 진단을 내리기조차 힘들다. 

 

그렇게 한심한 대학 시절을 보낸 댓가로 방황하던 백조의 나날에 

새털같이 많은 시간을 메우고자 읽었던 <토지>가 기억난다.  

걸어서 멀지 않은 도서관에 가서 순서대로 빌려와 밤을 새워 읽었다. 

 

마무리를 하려니 뜬금없이 양귀자의 아마도 연작이었던 <원미동 사람들>이 불쑥 떠오른다. 

내용도 기억나지 않고 언제쯤 읽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첫인상을 남긴 한국소설이었던 것 같다. 

요즘 공선옥의 소설을 읽다보면 또 생각나는 소설이기도 하다. 

 

한 때는 소설만 읽는 것도 독서라고 할 수 있는가  

나름대로 심각한 반성을 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읽고 싶은 것들을 재미있게 읽는 것이 내가 책에 기대하는 전부다. 

소설이란 게 이야기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들여다보고 싶을 뿐이다. 

만화도 좋고 에세이도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대세는 역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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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 2009-07-16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 나도 그 책 기억 나. 되게 잔인한 그림 동화책. 무지 재밌게 읽었었는데.
그리고 과학 학습 만화도- 만화 치고는 재미 없어서 별로 안 보긴 했지만..
그 전집 속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찰스 램이 소설로 정리한 거였구나.. 그러고 보니 그랬던 듯. ㅎㅎ
초등학교 때부터 보던 만화 잡지 보물섬도 생각난다.. 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