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는 살아있음의 과정이다. 지금은 살아있지 않아도 살아있음의 과정을 지나왔다면, 역사가 있다. 하여, 그 누구에게나, 혹은 그 무엇에게나 역사는 있다. 어느 날 가까운 지인에게서 그녀의 아들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하는 일마다 안 풀리는 아들의 사주를 보러 다녔다, 고 했다. 어느 점집에서 들은 말은, 놀라웠다. 아들의 사주는 죽은 자의 사주라서 앞과 뒤가 죄 캄캄하다, 라고 했던가. 아직 죽지 않은 자의 미래를 보려다가 죽은 자의 캄캄함을 마주친 그녀는, 내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점을 믿지도 않고 점을 본 적도 없지만, 죽은 자의 캄캄함을 들고 나온 여자의 깊고 어두운 한숨은 볼 수 있었다. 살아있음을 지워놓는 일이 얼마나 기막힌지 가슴이 조여왔다.

이 책의 제목은, 사랑의 역사다. 누구의 사랑이랄 것도 없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역사가 있듯이, 사람이 가슴으로 키우고 가슴으로 불태우고 가슴으로 묻는, 수많은 사랑에도 역사가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았던 자, 그의 사랑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의 사랑은 존재하는 것인가. 작가는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놓고, 그 이야기의 발자국을 짙은 안개 속에 남기며, 앞으로 걸어간다. 그래서 무엇이 존재하며,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지, 책 속에서 헤매게 된다. 존재가 불분명해지니 사랑도 안개 속에 파묻혀야 할 터인데, 웬걸 사랑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두툼한 안개 속에서 한점 불빛처럼 반짝인다. 뿌연 안개의 장막을 헤치고 나아가게 한다.

작가는 사랑의 역사, 라는 책을 던져놓고 천천히 걸어갔다. 이 책은 도대체 출판이 된 것일까, (정말 물난리에 원고를 통째 잃어버리고 만 것일까), 이 책을 쓴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혹 레오와 즈비는 동일인이 아닐까), 작가가 던져놓은 책에 나오는 알마와 세월을 뛰어넘어 열여섯된 소녀 알마는 어떤 관계일까... 물론 읽어가면서 실마리는 하나씩 풀렸다. 그런데 다 읽고 난 후에는 작가가 던진 다면체의 주사위(그걸 주사위라고 할 수 있다면)를 제대로 끼웠는지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여행길에 들고 나선 책을 집에 돌아와서도 이리저리 들춰보다가 덮었다. 내 가슴이 느낀 만큼, 도 내게는 무거웠다.

사랑의 역사가 깊어지고 어두워진 불씨는, 나치였다. 사랑의 자취는 존재를 지우려는 힘에 쫓겨 구불구불해졌고, 나는 따라가다가 심각하게 외로워지기를 되풀이했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했던 자의 사랑은 겨울 한복판에 선 나무처럼 맨들맨들하게 닳아졌다. 그걸 읽어내야 하는 시간이 슬펐다. 책을 덮고 내 옆의 사람에게 별로 귀엽지 않은 질문도 던져봤다. 당신은 내가 없으면 외로울까. 못되게도, 외로울 거야, 라고 말하길 기대했다. 분명한 사랑을 불분명한 존재 안에 가둬야 했던 레오가 나를 못되게 했다. 그는 사랑을 쫓아다니면서도 존재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소설을 읽고 난 직후, 텔레비전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비극을 지켜봤다. 이스라엘 군인 2명이 납치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수많은 민간인이 죽어나갔고 또 다쳤다. 아이를 잃은 팔레스타인의 엄마들이 울부짖었다. (아이를 빼앗아가면 엄마는 무한정으로 용감해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나 보다. 더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은 결사의 힘을 갖게 되는 법.) 언제나 깡패 같은 표정으로 말하는 부시도 잠깐 비쳤다. 존재를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이해관계가 얽힌 힘이 휘젓기 때문이다. 한때 학살당한 자들이 지금은 학살을 한다. 그들은 지금 힘을 업었고, 힘을 얻었다. 그들만의 힘뿐이 아니라 외부의 힘이 그들을 더욱 악랄하게 할 것이다. 어느 평론가는 이 소설이 빛바래지는 이유를 거기서 들춰내기도 했다. 나는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작품이어야, 라는 표현에 끌려 이 소설을 찾아읽었다. 읽기 전에는 정치적, 이란 표현에 반감을 가졌고, 읽은 후에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른 표현을 찾지 못했다. 소설의 밑에서 어쩔 수 없이 꿈틀거리는 것은, 존재를 지우려했던 힘이며, 그 힘에 쓸려진 자들은 슬픈 사랑의 역사를 안고 살았다. 소설이 정치색을 드러내어 어느 한 군데의 힘을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야기의 중심에는 유태인의 슬픔이 깔렸다. 그들의 슬픔을 덮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금은 팔레스타인의 슬픔이 마치 복제된 모양으로 따라올라오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다행히도 소설은 은근히 사랑의 역사, 그 힘을 기대하게 한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사랑의 역사를 쫓아왔던 두 사람이 만난다. 레오는 사랑을 잃었고, 알마는 엄마에게 새로운 사랑을 찾아주려고 했다. 존재는 희미해져도 사랑은 분명했다면, 언젠가 포개질 것이다. 그러리라 믿는다. 사랑의 역사가 지나온 길에서는 슬픔이 철벅거렸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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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헬퍼 2006-12-31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렀습니다. 글은 여전하시군요. "소설의 밑에서 어쩔 수 없이 꿈틀거리는 것은, 존재를 지우려했던 힘이며, 그 힘에 쓸려진 자들은 슬픈 사랑의 역사를 안고 살았다".한해의 마지막 날인데, 혹시 나도 지난 '존재를 지우려 하지 않았나'생각해 봅니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받아들인다면 더 나은 세계가 되겠지요. 새해 복 많이 누리십시오.

내가없는 이 안 2007-01-01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밥헬퍼님! 잘 계셨지요? 한해 한해는 서둘러 지나가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늘 뒤로 처져요. 그렇다고 되돌아가서 다시 살아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는데 말이죠. 한해를 보내면서 별로 마음이 가벼워지지 못했어요. 리뷰를 쓰면서 존재라는 걸 조금 짚어보다가 또 내치다가, 한해 끝에서 괜스레 수선을 떨었죠 뭐. 밥헬퍼님은 한해 알차게 보내셨을 것 같은데. ^^ 님도 올 한해 복 많이 누리시길요.

chaire 2007-01-02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지금 읽고 있는 중이에요. 남편인 조너선의 소설을 먼저 읽은 탓이겠지만, 부부가 너무 비슷하게 쓴다 싶더군요. 혹시, 이 부부는 침대맡에서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조너선이 그랬듯이 니콜도 존재와 사랑의 미스터리에 대해 쓰고 있는 거 같은데, 그래서 어차피 비슷한 이야기일 것만 같아서, 아마 그래서 조너선의 것만큼 페이지가 팍팍 넘어가지는 않고 있는가 봐요. 하여간, 이 부부 재미나요.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소설을 바치고 있는 것만 봐도. 큭.

내가없는 이 안 2007-01-02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이레님, 그래요, 두 사람 좀 비슷하죠? 그런데 전 사랑의 역사가 훨씬 슬펐어요. 뭐 읽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도무지 슬퍼서 주체를 못하겠던걸요. 이런 소설을 쓰거나 읽는 게 옳을까, 하는 우스꽝스런 생각마저 들었어요. 일생을 쫓기며 살았고 자기의 자취를 지워가며 걸어야 했던 사람, 이라는 존재의식이 왜 그렇게 사무쳤는지 몰라요. 제가 그렇게 살았던 것도 아닌데 말이죠. 아무튼요, 서로에게 자신의 소설을 바칠 수 있는 연인이라는 건 부럽더군요. 카이레님, 우리 새해에도 잘 살아봐요~ ^^

icaru 2007-01-02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학살당한 자들이 지금은 학살을 한다. 음...
때문에, 이 소설이 빛바래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말이죠~~
"죽은 자의 사주"라는 말 정말 무서워요!!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점쟁이가 김상경의 얼굴을 한번 딱 보고... 재수없는 사주라 사주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영화 보면서는 웃었는데..

2007-01-02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7-01-0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저도 그 영화 참 재밌었거든요. 특히 집에만 들어가면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추상미의 캐릭터, 너무 흥미롭지 않나요. 전 추상미의 그런 면을 조금(아니, 많이일지도 ^^) 닮아서 정말 웃음이 터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