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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1.
안토니오는 그의 친구인 바싸니오가 포오셔에게 구혼하는 것을 도우려고, 자금
융통을 위해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을 찾아가 3천 두카트를 차용한다. 샤일록은 자신의 사업을 훼방놓고 유대인이라며 자신을 경멸해 온 안토니오에게 복수하기 위해 변제일까지 3천 두카트를 지급하지 못할 경우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베어가기로 한 차용증서를 받는다. 바싸니오는 수수께끼를 풀고 포오셔를 아내로 맞이하지만, 그 사이 안토니오의 상선은 바다에서 침몰하고 샤일록에게 3천
두카트를 변제하지 못한 안토니오는 법정에 선다.샤일록은 베니스의 법정에서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베어가는 것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나, 법학박사로
분한 포오셔가 기지를 발휘해 샤일록은 재판에서 패소하고 자신의 재산을 잃는다. 마지막에 안토니오의
상선이 베니스에 도착하면서 안토니오가 자신의 부를 되찾으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위의 내용은 <<베니스의 상인>>의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한 것이고 이 요약만 보자면 이야기는 평면적인 권선징악적 이야기로 보인다. 내가 <<베니스의 상인>>을 처음 읽었던 것은 어렸을 때의 어린이용 이야기책을 통해서였고, 그
때 나 역시 이 이야기를 착한 사람들이 이기고 나쁜 샤일록이 망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읽었을 때 나는 샤일록이 불쌍해졌다.
2.
샤일록은 유대인이고, 고리대금업자이다. 그는 베니스에서 경멸받는다. 심지어 안토니오는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러 간 자리에서도 이러한 경멸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또다시 그대를 그렇게 부르고 싶소./다시
침을 뱉고 다시 걷어차고 싶소./만약 그대가 그 돈을 빌려주려거든/친구에게
빌려주듯 빌려주지는 마오. 우정이 있는/사람이라면
그 누가 생식력이 없는 쇠붙이에 대한 이자를/친구에게 받겠소? 그러니
원수에게 돈을 빌려주는/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야
내 파산하여 위약하게 될 경우/떳떳한 얼굴로 벌금을 받아낼 수 있을 거요.(p.29)
샤일록이 경멸받는 이유는 유대인이며, 고리대금업자이기 때문이다. 샤일록은 태생적으로 기독교 세계관과 조화될 수 없는 인물이다. 중세
이전의 기독교는 노동의 대가가 아닌 금전에 대한 이자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래서 유대인은
그 틈새를 파고들어 부를 축적했다. 샤일록은 이렇게 기독교 세계에서 경멸받던 유대인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다. 당시의 가치관에서 안토니오가 샤일록을 경멸하는 것은 납득할 만한 것이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는 조금 부당하게 느껴진다. 애초에
안토니오가 가해자가 아닌가? 그는 샤일록의 대부업을 훼방 놓았고, 그를 몇 번이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비난했다:“당신은 저를
이교도, 사람의 목을 무는 살인견으로 부르고 내 유대인 망토에 침을 뱉었습죠.”(p.28) 샤일록은 목을 움츠렸을 뿐 안토니오에게 적극적으로
위해를 가한 것이 없고, 그의 음모는 안토니오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인데, 책을 읽어나가면 샤일록이 안토니오에 대해 복수심을 갖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3.
샤일록은 법에의 호소를 통해 자신의 복수를 달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포오셔의 기지로 인해 그의 시도는 좌절되고 오히려 파멸한다. 샤일록이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
당하게 되는 판결은 샤일록이 결정적으로 패배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데, 이 결과는 정의에
합당한 것일까?
책 말미의 해설에서는 <<상인>>에서 나오는 계약, 즉 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면 살을 떼어갈 권리를 채권자에게 부여하는 계약이 당시에 유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이는
책에서의 안토니오나 총독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지금에야 이런 계약은 민법103조 위반으로 무효이겠지만, 샤일록과 안토니오 사이의 계약이
베니스의 법률에 의해 유효하다면, 샤일록의 호소를 받아들여 안토니오를 죽이는 것이 법적으로
정의롭다. 베니스 공동체의 호의를 얻지 못하는 샤일록에게는 오로지 법이 기댈 곳이다. “이 희곡 전체를 통해서 법률은 그의 유일한 호소이며 그의 유일한 권리이다. 그러므로 합법성이 선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 정의는
곧 합법성이다.”
그렇다면 포오셔의 판결-1파운드 이상도, 이하도
떼어가서는 아니 되고, 피를 흘려서도 안 된다는-은
당시의 관점에서도, 지금의 관점에서도 상식 밖의 재판이다. 가분적
급부에서 일부청구는 당연히 처분권주의상 허용되고, 피를 흘리는 건 살점을 떼낼 때 당연히 수반되는
것이므로 이 논거를 들어 샤일록의 청구를 기각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올바른 법률가라면
샤일록의 편에 서야 되는 것이 아닐까?
4.
앨런 블룸은 그의 에세이에서 그들이 화합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지적한다:“그들의 삶의 세계관, 즉 삶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에 관한 그들의 이해가 서로 대립되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서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들은 공통의 토대를 갖고 있지 못하다.” 기독교 세계의 인간과 유대교의 인간, 우정을 추구하는
인간과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은 결코 타협할 수 없으며, 둘이 충돌하게 될 경우 어느 한 쪽이
파멸하여야 그 싸움은 끝난다. 셰익스피어는 다양한 인종과 세계관이 공존하는 코스모폴리탄적 세계에
대해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공통의 토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 살 수 없다. 샤일록은 유대인이지만, 민족을 넘어선 유대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울분을 담아 피력한다.
그는 나를 창피하게 만들었고, 50만
다가트의 이득을 취할 수 없게 했고, 내 손해에는 만족의 웃음을 지었고, 내 이득을 조롱했고,내 민족을 경멸했고, 내 상거래를 방해했고, 내 친구들의 우정을 식게
했고, 내 원수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소. 그런데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소? 내가 유대인이기 때문이었소. 그래, 유대인은 눈도 없소? 유대인은 손도 없고, 오장육부도, 사지도, 감각도, 감정도, 격정도
없소? 기독교인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무기에 다치고, 같은 병에 걸리고, 같은
방법으로 치료하고, 같은 여름과 겨울에 더워하고 추워하는 거란 말이오. 우리의 살은 찔러도 피가 나지 않소? 간질여도
우리는 웃지 않소? 독을 먹여도 우리는 죽지 않소?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우리는 복수하지 말란 말이오? 다른 모든 일에서도 당신들과 같은데 그 점에서도
같을 것은 뻔하지 않소.만약 유대인이 기독교인에게 부당한 일을 한다면 기독교인의 겸양은 무엇이겠소? 복수요! 만약 기독교인이 유대인에게 부당한 짓을
행한다면 그의 관용은 기독교인의 본보기를 따라 무엇이겠소? 당연히, 복수요! 당신네들이 가르쳐준 악행을 나는 실천하겠소.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에 부닥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교훈 이상으로 실천하겠소.(pp.75-76)
이 휴머니즘을 토로하는 격정적 웅변을 읽을 때 더 이상 샤일록을 단순한 악당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샤일록의 희망을 베니스와 셰익스피어는 수용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샤일록이 강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당하는 장면은 서로 다른 세계가 결국 조화될 수 없으며 한 쪽이 복속될 수 있을 뿐이라는 셰익스피어의 회의적 시각을, 그리고 법률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공동체의 안쪽에 있는 사람 뿐이라는 점을 되새기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