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오브 헤븐 디렉터스 컷 (4disc)
리들리 스코트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1.
돌이켜보면 나는 예전부터 서양 중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세계 전체가 밀도 있게 조직되어 있어 사회 구조로부터의 도피가 거의 불가능한 현대를 사는 나는, 중세 사회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와 그로 인해 가능할 것 같은 은자(隱者)와 같은 삶을 부러워했었다. 마르틴 루터가 십몇년 간 외부에 거의 노출되지 않고 작센 공의 영지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이런 나의 동경은 마치 귀농과 전원생활을 꿈꾸는 도시인의 그것과도 같다. 전원의 낭만적인 삶을 꿈꾸는 도시인들이 실제로 그 곳으로 가면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절대로 중세의 시공간에서 실제로 살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가진 동경은 현대가 안락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가 중세의 십자군 이야기를 다룬 <<킹덤 오브 헤븐>>을 선정한 이유는 우선 이런 중세에 대한 나의 동경과 관심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해서 여러 번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무엇보다도 리들리 스코트가 그려내는 중세의 음울한 이미지에 매료되었다. 냉막한 이미지의 성과 장원들, 현대와 같이 잘 닦여진 길이 아니라 사람이 가는 곳이 길이 되는, 그리고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를 길들, 도시와 항구의 북적임과 무질서함, 동방의 이국적인 풍경 등을 보면서 나는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익명성 속에 숨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21세기의 현대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은신이 중세의 시공간 속에서는 가능하리라는 생각.

   그러나 <<킹덤 오브 헤븐>>의 영화적 가치는 중세의 이미지 뿐만은 아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리들리 스코트는 그가 활동하는 기간 동안 계속 당대 최고의 시네아스트 중 한 사람로서의 지위를 누려왔으며, <<블레이드 러너>>, <<1492 콜럼버스>> 등 묵직한 그의 영화들은 항상 단순한 즐거움 이상의 메시지를 던져 왔다. <<킹덤 오브 헤븐>>도 그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이 영화에서 계시가 이성을 압도하던 중세의 본질과, 그 본질이 여과 없이 드러난 십자군 운동을 통해 신성과 세속의 얽힘을, 그리고 맹목적인 신앙과 그 일방적인 투사가 가져오는 적대적 대립을 다룬다. 그리고 리들리 스코트는 그 대립이 지난 천년에 걸친 중동에서의 대립과 분쟁의 원류라고 말한다.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규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2.
도대체 역사를 배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단순한 호기심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서, 역사가 연구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그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도 타당해 보이는 대답은 과거를 앎으로써 미래를 대비한다는 것이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으며, 과거에 발생하였던 사건에는 그 사건을 유발시켰던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과거의 과오를 불러일으켰던 원인을 우리가 역사의 연구를 통하여 파악한다면, 유사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미리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연구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러한 말은 일견 그럴 듯해 보인다. 위의 언술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동일한 과오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인 과오나 실책이 언제든지 다시 반복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기독교를 볼 때마다 역사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든다. 한국의 기독교는 거칠게 말해서 예수 직전의 바리새인들과, 종교 개혁 직전의 가톨릭의 행태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그 행태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의 성직자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과도하게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보수적인 율법학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그로 인하여 사회적 권세를 누렸다. 종교 개혁 직전의 가톨릭은 라틴어를 해석할 능력이 있는 성직자가 성경으로 대표되는 진리를 독점하는 상황이었고, 그 결과는 가톨릭의 타락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믿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정적인 역사는 지금 다시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이 과연 역사에 대한 무지 때문인가? 종교 개혁 이전의 가톨릭의 타락상에 대해서는 수많은 글들이 있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정보는 차고 넘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읽히지 않는 글은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 역사적 연구가 보다 큰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사실이 규명되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역사적 과오들은 소수의 욕망과 다수의 무지가 결합되어 발생하였다. 욕망이 앎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다면(자신의 욕망 때문에 실책을 저지른 자들이 과연 역사를 안다고 자신의 욕망을 꺾지는 않을 것이다.), 다수를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소수의 욕망을 저지할 힘을 부여하여야 한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그의 저서인 <<옹정제>>에서 역사 연구의 역할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역사학은 과거의 세계로부터 끊임 없이 예상 밖의 사실을 끄집어내어 소개함으로써 지금까지 무심히 형성되어 버린 역사의 이미지를 고쳐나가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의 역할에 대한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언명을 수용한다고 할 때, 영화는 역사적 진실을 대중에게 전달하여 기존의 잘못된 이미지를 깨뜨리는 데에 있어서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진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명백히 현대 사회에서 서사를 선도하는 수단은 문학에서 영화로 옮겨 갔으며, 따라서 영화는 대중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이나 공동체가 겪은 고난과 극복이라는 서사적 내러티브를 차용함으로써 영화사를 통틀어 꾸준하게 제작되어 온 장르”로 정의되는 역사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대중에게 보다 더 친숙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연구와 그 교육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김민정은 그의 글인 <영화의 역사서술과 역사교육의 가능성>에서 역사영화의 가능성을 영화 텍스트가 제공하는 중층적 시간성(dual temporality)에서 찾았다. 역사영화는 두 가지의 시간을 다룬다. 첫 번째 시간은 과거 사건이나 시대성이 스크린에서 시각적으로 재현되는 과거의 시간(visualized past)이다. 역사영화와 관련된 두 번째 시간은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나 표현 기법 등에서 드러나는 영화 제작 환경(filmmaking context)에서 나온 것이다. 즉, 거칠게 말하면 역사영화가 가지는 중층적 시간성은 영화의 수용자에게는 이러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i)그 영화는 어떠한 시기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가? (ii)지금 우리가 그 영화를 보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리들리 스콧의 <<킹덤 오브 헤븐>>은 중세의 십자군은, 구체적으로는 제1차 십자군이 종결되어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진 후부터, 살라딘에 의해 다시 예루살렘이 함락되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서구와 아랍의 대립과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탐색한다. 

3.
십자군 운동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문명권이 그 자신의 축적된 힘을 대외적으로 팽창하고자 한 데에 있다. “서유럽 사회가 봉건영주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배 하에 안정을 되찾고 점차 성장의 길로 들어서게 되자, 서유럽 세계는 그 세력을 외부로 신장하는 기운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잔틴 제국이 셀주크 투르크에게 위협받자, 로마 교황 우르반 2세가 클레르몽(Clermont) 공의회에서 성전을 일으킬 것을 촉구함에 따라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이 십자군 운동은 교황 자신의 정치적 야심, 봉건 영주들의 경제적 목적 등 많은 동기들이 어우러져 추동력을 얻었으나, 십자군이 13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가량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추동력은 종교적인 열정이었을 것이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것은 신의 뜻이며, 전쟁 도중에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설교가 전파되었고, 신앙이 지배하던 시대에 대다수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구원에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열망을 품고 동쪽으로 향했다. <<킹덤 오브 헤븐>>의 주인공인 발리안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된 원인도 결국은 종교적인 것이다. 그의 아내는 갓 태어난 아이가 죽자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헤메이다가 자살하였는데, 카톨릭은 자살을 큰 죄로 보기 때문에 자살한 자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지옥에서 고통받게 될 운명이다. 부인이 자살한 이후 발리안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데, 그와 마주친 이벨린의 영주 고프리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물론 발리안이 자신이 살던 마을을 떠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살인에 있지만, 그를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한 것은 구원에의 열망이다. “예루살렘에 가면 구원받을 수 있나요? 제 아내의 죄도 씻겨집니까?” 

   고프리의 자식인 발리안은 고프리가 죽기 전에 그로부터 기사 서임을 받고 이벨린의 영주가 되고,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해 예수가 처형된 골고다 언덕에 가지만 예수로부터는 어떠한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신앙을 잃었고, 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말하는 발리안에게 한 기사가 말한다. “신앙은 믿을 것이 못되오, 폭력의 광기를 주의 뜻으로 합리화하는 자가 많죠. 너무나 많은 살인자의 눈에서 광기 어린 신앙을 보았소. 선행과 약자를 돕는 용기만이 참된 믿음의 모습이오.” 

   다나카 요시키는 그의 소설인 <<아루스란 전기>>에서 “사람의 선악은 중요하지 않다. 결과의 선악이 문제인 것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영화에서도 맹목적인 신앙에 휩쓸린 사람들이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양 측에서 공히 등장한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고프리 일행에게 한 사람은 이교도를 학살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방책이라고 소리치며, 살라딘과의 마지막 전투인 예루살렘 방어전에서 “생포는 일체 없다”며 알라의 위대함을 소리치는 사람.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부당한 말을 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을 것이며, 그 자신들이 가진 윤리적 체계 내에서는 지극히 타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맹목적 외침을 보는 우리들은 그들의 주장이 정당한 것이며, 인정받을 만한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맹목적인 신앙에 몸과 마음을 맡긴 자들 뿐만 아니라, 세속적 야욕을 추구하며 그것을 신앙으로 포장해 십자군에 참가하는 사람도 있다. 시빌라 공주의 남편인 기 드 루지앵과 샤티옹의 레이놀드는 끊임 없이 전쟁을 기도하며 이슬람을 도발한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아마 역사에 문둥이 보두앵으로 기록되어 있는)과 살라딘 간의 불가침협정을 끊임없이 위반한다. 영화에서 예루살렘 왕의 죽음 후 왕위를 이어받은 기 드 루지앵은 샤티옹의 레이놀드를 사주하여 살라딘의 여동생인 공주를 죽이는데, 그 결과 위태롭던 평화협정은 깨어지고 다시 기독교 진영과 이슬람권은 전화에 휩싸인다. 십자군은 전투에 돌입하지만, 식수의 부족으로 인해 살라딘과의 전투에서 괴멸한다.(아마 영화에서 묘사된 십자군의 전멸은 하틴 전투로 보인다.) “프랑크인은 하틴의 뿔로 알려진 두 개의 봉우리로 이르는 길을 따라 힘겹게 걷고 있었다. ... 물을 마시지 못한 채 긴 밤에 시달렸으므로 그리스도교군의 힘과 자신감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완전히 약화되고 말았다. ... 그들은 무슬림 군대에 의해 완전히 함몰되었다.” 

   리들리 스코트의 눈에 비친 중세의 십자군 시기는 이렇듯 종교적 맹목과 세속적 욕망이 거대하게 끓어오르던 시대였다. 

4.
리들리 스코트의 이 영화가 개봉한 시기는 2005년이다. 그는 이 영화를 2001년의 9.11 이후 서구와 아랍권의 대립과 분쟁이 격화되었던 시기에 세상에 던져놓은 것이다. 그리고 <<킹덤 오브 헤븐>>에서 그려지고 있는 십자군 운동 시기의 대립은 개봉 당시의 중동에서의 대립과 기묘하게 겹쳐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자막: “거의 천 년이 지난 후에도 예루살렘에서의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Nearly a thousand years later, peace in the Kingdom of Heaven remains elusive.)” 리들리 스코트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끝날 기미 없어 보이는 분쟁의 원류(原流)를 중세의 십자군 운동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상술한 바 십자군 운동을 추동한 본질적인 힘은 종교적 열정이었다. 믿음이 강해질 때, 사람은 그 믿음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러한 프레임은, 그것이 타인에게 강압적으로 투사될 때 폭력이 된다. 대상에 이미지를 덧씌우는 주체가 힘을 가질 경우에 그 폭력성은 더욱 심해진다.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서구 문명권의 전세계적 우위가 명확한 지금의 시대에, 서구는 그들이 가지는 이슬람에 대한 관념을 대상에게 덧씌우지 이슬람의 진면목을 바라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작년에 이슬람 사원을 교양수업의 과제로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이슬람교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이슬람교가 대단히 합리적이고 관용적인 종교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 스스로의 교리는 보수적이며 엄격한 것이었지만,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성을 강하게 보였다. 이슬람의 이러한 성격은 실제 역사 속에서도 증명되는데, 이슬람은 그가 정복한 기독교 영역에서 기존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자유를 긍정했다. 그들은 약간의 인두세를 부담하면 개종하지 않고 기독교를 자유롭게 숭배할 수 있었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슬람의 맹주인 살라딘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냉철한 인물이며(그는 자신이 왕이 되기 전의 이슬람권의 패배 이유를 신의 뜻이 아니라 이슬람권의 분열과 전쟁 준비의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찾는다.), 전투에서 죽은 전사들의 장례에서 눈물을 보이는 인간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예루살렘이 가지는 의미를 명확하게 통찰한다. 영화에서 마지막에 발리안의 물음, “예루살렘은 무엇이죠?” 그리고 살라딘의 대답. “아무것도 아니지. 모든 것이기도 하고.(Nothing. Everything.)” 살라딘은 예루살렘이 단지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러니까 사람들이 부여한 성지라는 관념을 제외하면 그냥 도시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곳에 집착하는 그 관념이 문제라는 점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과거에 사람들이 가졌던 이미지가 신앙과 종교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지금은 미디어와 정치가들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부시 행정부가 제시하였던 선과 악의 대립, 자유와 억압의 대립 등 일련의 관념들을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그 관념 할에서 당연히 이슬람고 중동은 테러리스트들의 소굴이며 공격하여야 할 대상이 된다. 전쟁은 계속되고, 중동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리들리 스코트가 제시하는 해답은 간단하면서도 당연한 것이다. 유대 사원, 모슬렘, 그리스도의 무덤에 우열이 없으며, 모두 다 신성하다는 것. 결국 리들리 스코트가 구성한 서사와 이미지,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 등은 모두 여기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걷고, 신앙과 관념을 맹신하는 것의 위험성을 깨달은 후에 타인의 가치관과 관념을 존중하는 것, 그것만이 결국 평화를 얻는 길임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리들리 스코트의 <<킹덤 오브 헤븐>>을 통해 이슬람에 대한 기존의 적대적 관념을 해소함으로써, 그리고 맹목적인 종교에의 열정과 현세적 탐욕이 대립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지적함으로써 현재의 서구와 이슬람의 대립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언급한다.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다시 보고. 십자군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영화에서의 인간관계 등이 실제의 역사상의 것과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실제 역사에서는 고프리와 발리안은 부자 관계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시빌라는 기 드 루지앵과 원치 않은 결혼을 했고 발리안과 사랑에 빠지나, 실제로는 시빌라는 기에게 빠져서 결혼한 것이라는 점, 영화에서 예루살렘의 문둥이 보두앵왕은 위대한 왕으로 묘사되나 실제로는 별로 한 일이 없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묘사는 역사의 정확한 전달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측면이다. 실제로 대중은 역사서보다는 영화에 의해 역사를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역사의 한 단면을 다룬 영화는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역사의 연구는 사실을 사실로 규명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영화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고 그를 위해 서사를 조직한다는 차이점을 고려한다면, 소소한 디테일의 변형은 메시지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각색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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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러브 2010-03-28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와 유럽문명(고재백, 2009년 여름학기) 레포트로 썼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