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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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설집 중 표제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관한 글이다. 자신이 디디고 있는 발 밑은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 또는, 자신이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삶의 양식과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욕망은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 삶의 불확실성은 정이현이 그의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주제이며 정이현의 등단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는 작가가 반복해서 다루는 주제의식의 원형이 있다.  

   정이현의 소설 속의 여자들은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에 반항하기보다는 그것을 완전히 내면화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체제로부터 주어지는 욕망을 내재화하고 그것을 확실한 것으로 믿으면서 달성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파국에 직면한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낭만적 사랑을 운운하는 제목과는 달리 주인공인 유리에게 낭만적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십 몇 년 결혼생활 동안 백화점 세일 때 허접한 옷 골라 사고 문화센터 노래교실에 다닐 수 있게 된 걸 여유라고 생각하는”(pp.20-21) 엄마를 보며 “내 인생, 엄마처럼 사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p.20)라고 다짐하며, 친구의 노란 색 뉴비틀을 보면서 “어차피 출발선이 다른 게임이었다. ... 나는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 했다.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p.25)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강한 여성’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사랑이라는 환상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유리의 인식: “남자들은 다 똑같다. ... 사랑하니까 키스해야 하고, 사랑하니까 만져야 하고, 사랑하니까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사랑!”(pp.15-16) 유리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 결과 유리에게 있어서 연애와 결혼은 교환 관계의 일종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내 인생 스물 두 해를 걸고 배팅해볼 남자”(p.27)가 나타났을 때 언곤일척의 승부에서 이겨서 고진감래(苦盡甘來)할 때까지 스스로를 아껴두는 것이 유리에게는 지상과제가 된다. 결혼시장에서 자신을 최대한 잘 파는 것이 엄마의 삶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종목을 막론하고 장사를 잘 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덕목은 두 가지이다. i)상품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 ii)잘 파는 테크닉을 익히는 것. 유리는 장사꾼에게 요구되는 이 두 가지 덕목을 실천한다. 자신의 가치를 온존시키기 위해서는 사랑의 유혹에 빠져들지 말아야 하고, 유리는 끊임 없는 긴장감을 유지하고자 레이스가 달린 팬티를 절대로 입지 않는다. “고무줄이 헐렁하게 늘어나고 누렇게 물이 빠진 면 팬티는 말하자면, 나의 보루다.”(p.9) 그의 말처럼 “팬티를 사수하는 것은 세상을 사수하는 것이다.”(p.11)  또한 잘 팔아서 세상을 얻어내기 위해 유리는 끊임없이 연애와 사랑에 대해서 지배적(이라고 생각되는) 사회의 가치질서와 규범을 내면화한다. 그런데 그 질서는 누구에 의해서 구성된 것인가? 유리가 끊임없이 내면화하는 행동과 연애의 공식은 간단히 말해서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다. 요컨대 유리는 남성 중심의 사회질서를 긍정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잘 팔아넘기기 위해 상술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 몇 가지들: “나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키스할 때 눈을 뜨는 건, 나 바람둥이야. 라고 광고하는 일이다. 그러나 첫 키스에서 여자가 너무 적극적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새침한 척, 입술을 아주 약간만 벌려주었다.”(p.10); “가슴을 건너뛰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p.10); "일단 가슴을 정복한 남자는 머지않아 더 노골적인 요구를 해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어한다, 는 속담을 한시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p.11) 소설의 막바지에 부유한 집 막내아들에다가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로스쿨의 학생이자 결정적으로 자신에게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는 남자와 몸을 섞을 때 제시되는 십계명은 유리가 배우고 익히는 상술의 절정을 이룬다. 

   이 모든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유리가 팔고 싶어하는 것은 그 자신, 보다 정확하게는 그 자신의 순결, 처녀성이다: “순결해 보일 것!”(p.29) 남자가 처녀성에 대하여 가지는 환상을 이용하여 가부장적 사회 질서에 순조롭게 편입되어 그 속에서 안온하고자 하는 유리의 전략.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처녀성은 증명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유리가 말하는 십계명의 10계. 혈흔은 함께 확인하라. 그 확인이 없다면 유리의 순결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요컨대 처녀성은 신뢰의 문제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결혼 이전에 처녀막 재생 수술을 받는 이유는 단지 상대방에게 자신이 처녀라는 믿음을 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여기서 유리가 의도치 않은 파국이 발생한다: “아무것도 없다! 타월 위에는 한 점의 핏자국도 남아있지 않다. 아무리 봐도 순백의 시트 위는 깨끗하다. 머릿속이 온통 까매지고 정신이 아뜩해져온다.”(p.33) 소설의 정황을 둘러볼 때, 유리는 확실히 처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리가 진짜로 처녀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은 유리의 순결을 믿지 않을 것이며, 유리는 건곤일척의 승부에서 자신을 파는 데에 실패했다.  

   도대체 왜? 유리는 남자가 여자에게 요구하는 모든 규범을 지키고 그 자신이 기획했던 모든 계획을 차질없이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부에서 패배했는가? 정이현은 이 뜻밖의 파국을 통해 결국 유리가 채택한 방법론의 근본적인 결함을 지적한다. 유리의 근본적인 패착은 남자의 환상에 기대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려고 했다는 데에 있다. 패배주의적 순응이든 아니면 유리처럼 적극적으로 행동하든, 남자들이 짜놓은 판 속에서 승부하는 한 여자들은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남이 짜놓은 판에서 싸우지 말고 자신의 판으로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가? 남자의 옆얼굴이 어쩐지 낮설게 느껴진다는 유리의 감각은 유리가 지금까지 믿어왔고 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삶의 모습이 실제로는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아니다.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p.35)라고 유리는 마지막에 갑자기 스스로도 믿지 않았던 사랑을 마음속으로 언급하지만 그건, 멀어져가는 '유리의 성'을, 불확실해져가는 삶과 미래를 붙잡고자 하는 유리의 불안함의 반영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만큼 불확실한 것도 세상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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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woo 2009-11-16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업 때 친구한테 좀 보여주겠음. ^^

마요러브 2009-11-16 21:21   좋아요 0 | URL
알았다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