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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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지음,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21세기북스, 2020.


내돈주고 사서 읽음.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오쿠보 도시미치라는 4인을 프리즘 삼아 막부 말에 시작된 일본 근대국가 태동 과정에서의 주요 사건들에 대하여 간략히 서술한 책. 문체가 굉장히 읽기 쉽게 정제되어 있어 접근성이 높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근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시작으로 해 관련된 서적을 읽어 나가면 될 듯(나도 사놓고 못 읽은 몇몇 책들을 다시 시도해 볼 생각이다). 다만, 이 글은 책의 내용에 대한 요약은 아니고 책과는 별 상관 없는 주제인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에서 왜 그렇게 인기가 많나'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다.


책 164-166면에는 "유신삼걸이 아닌 료마가 유독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나온다. 저자의 답변은 별론으로 하고, 나는 예전부터 막연히 그 이유가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예전에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역사보다 역사소설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떠들어댄 적이 있는데, 이 말을 할 때 나는 명백히 사카모토 료마와 '료마가 간다'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긴 것이, 나는 '료마가 간다'를 다 읽지 못했다. 양이 너무 많다).


삿쵸동맹 결성으로부터 대정봉환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카모토 료마의 역할은 결정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그가 보인 정치력 내지 수완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지만, 사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른 인물들 -요시다 쇼인, 사이고 다카모리, 오오쿠보 도시미치-에 비하면 사카모토 료마가 이루어 낸 업적이 일본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도드라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사카모토 료마가 다른 유신지사들에 비해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시바 료타로가 그를 '발견'해냈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김훈이 '칼의 노래'를 통하여 고뇌하는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새로 발견해내고 그가 그려낸 이순신의 초상이 '칼의 노래' 이후 대중들의 이순신에 대한 인상을 크게 좌우한 것처럼. 이게 사카모토 료마의 대중적 인기에 대하여 내가 가지고 있던 막연한 인상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점만으로는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작가가 역사속 인물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여 이를 형상화해내지만 그들이 다 인기를 얻는 것도 아닐 뿐더러,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에서 '지나치게' 인기가 많은 것 같다. 그는 여론조사를 할 때마다 일본인이 존경하는 역사인물에서 항상 수위권에 들었고, 2011년에 NHK에서 방영되었던 대하드라마 '료마전'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사실 후쿠야마 마사하루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인기는 여전하다. '료마가 간다'가 연재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게 사카모토 료마가 이렇게까지 인기가 있을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사카모토 료마는 어떻게 그렇게 국민적 인기를 획득할 수 있었을까? 질문의 관점을 바꾸자면, 연재 당시에 '료마가 간다'는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듯이, 사카모토 료마 역시 다른 유신의 주역들과 냉철한 현실인식을 공유했다. 다만 사카모토 료마가 다른 유신지사들과 달랐던 부분은 그의 기질이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걱정하면서도, 그에게는 천성적인 유쾌함과 낙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다른 유신지사들과 사카모토 료마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차이이자,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매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매력이 전국민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서 있었을까? 나는 이 책을 사면서 요시미 슌야가 지은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책을 같이 샀다. 이 책의 서문에서는 1945년 이후의 쇼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본래 전후, 즉 1945년 이후의 쇼와는 '성공'의 역사로 거듭 평가돼왔고, 우리들은 당연히 그 쇼와의 연장선상에 있을 터였다. 물론 그 상징은 도쿄올림픽(1964년)이고, 오사카만국박람회(1970년)였다. 도쿄올림픽에 의해 일본은 패전 후 부흥시대에서 벗어나 의기양양한 고도경제성장을 구가했던 것이고, 오사카만박에 의해 그 성장이 산 정상에 도달했음을 실감했던 것이다. 전쟁을 과거로 쫓아버린 전후戰後의 쇼와란, 폐허에서 출발했으되 황태자 결혼붐(1959년), 도쿄올림픽, 오사카만박 등 약 6년 간격으로 벌어진 3개의 '축제'를 잇는 능선이었고, 그 외의 사건은 일본인들이 이 능선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놓인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요시미 슌야 지음,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AK, 2020, 24면).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료마가 간다'가 연재된 시점을 위키피디아를 통해 찾아보았다. '료마가 간다'는 산케이 신문 석간에 1962. 6. 21.부터 1966. 5. 19.까지 연재되었고,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를 통하여 간행되었다. 위 인용에 따르면,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인들이 축제의 한가운데에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시바 료타로에 의해 발견되었다.


여기까지 오자 조금은 나아간 기분이 들었다. 일본은 막말 이후 탈아입구를 기치로 하여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고, 메이지 국가가 성립한 이래 일본의 이러한 방향성은 여전히 일본인들의 사고 및 무의식의 밑바닥에 있다. 사카모토 료마가 이와 같은 근대 이래 일본이 동경하던 방향을 상징하는 인물임은 물론이거니와, 이에 더하여 전후 쇼와의 절정기에 시바 료타로에 의해 사카모토 료마의 그 대책 없는 낙관주의나 미래에 대하여 보여 주는 가없는 희망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고, 이러한 부분이 당시 일본인들이 가졌던 전후 부흥 하에서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전망의 집단적 무의식과 조응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료마가 간다'는 그렇게 인기가 있었고, 사카모토 료마도 그렇게 대중적인 사랑을 얻게 되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나는 이러한 감각에 조응하지 못했기에 '료마가 간다'를 조금 읽다가 놓아 버렸던 것이 아닐까. '료마가 간다'를 읽지도 않은 주제에 멋대로 상상한 거 아니냐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일단 이렇게 납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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