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이 글의 목적은 성매매를 국가가 규제하는 것이 타당한가, 타당하다면 과연 어느 정도까지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가에 대해 검토하는 것이다. 나는 올해 들어 친구들과 성매매에 대해서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들이 합의할 수 있었던 내용은 개인이 성매매를 하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매매가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면, 국가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처벌 등의 수단을 통해서 금지시켜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팽팽한 대립이 있었다. 성매매를 국가가 규제하는 것을 찬성하는 쪽은 주로 개인의 성을 사고파는 것 자체에 대한 도덕적인 불쾌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여기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정말 할 일도 없고 집에서 아이들은 굶는데 먹고 살기 위해서는 몸을 파는 수밖에 없어서 성매매를 했다면, 성에 대해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어 그를 처벌하는 것이 과연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추상적인 도덕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소위 장자연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그 동안 누구나 미루어 짐작하고 있던, 그러나 드러나지는 않았던 엔터테인먼트 산업계의 추잡한 실상을 드러내었고, '추악한 포식자'들이 약자를 어떻게 착취하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그러나 성매매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이 사건의 구조는 정확히 위에서 예를 들었던 성매매의 구조와 일치한다. 사회적인 약자(신인 연예인들)이 있고, 상황은 그들을 성접대로 내몬다. 엔터테인먼트 산업 구조의 상위에 있는 사람들은 신인 연예인들이 원하는 배역을 줄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성접대와 교환하여 연예인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우리는 성을 판매하는 입장에 있는 연예인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권력과 착취의 측면을 사상하고 본다면 성매매는 교환계약의 일종이다. 이 글에서 나는 개인의 몸에 대한 원칙적 처분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성매매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개인은 자기가 가진 재화를 타인이 가진 것과 교환함으로써 자신의 효용을 증대시킬 수 있다. 따라서 성매매를 금지하는 것은 개인의 효용수준을 감퇴시킨다. 국가가 성매매를 금지하는 것이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성매매의 규제를 이유로 한 제3자의 효용증가수준이 매매당사자의 효용감소수준보다 클 것, 즉 규제로 인해 사회후생의 수준이 증가될 것이 필요조건이 될 것이다. 단지 도덕적인 잣대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모든 도덕과 윤리는 궁극적으로 그 도덕공동체에 속하는 개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도덕과 윤리에 대해서 이른바 결과주의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2. 자유
  
   나는 작년에 서점에서 성매매를 했던 프랑스 대학생의 수기를 서서 잠시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돈이 없어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아야 했던 자신의 비참함과,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과정에서 느낀 인격적 모독감과 성매매의 비인간성을 사뭇 비장한 어투로 토로하고 있었다. 나는 한편으로 그의 비참한 사정에 공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성매매가 그렇게도 인간을 타락시키고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다면 그 사실을 느꼈을 때 그만 두었다면 되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위의 여성이 결국 성매매를 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택했다는 것이다.
  
   논의를 좀 더 간단하게 하기 위해 위 프랑스 여성(밀라디라고 하자.)의 이야기를 단순하게 바꿔보자. 어떤 사회가 성매매에 대해 법적 규제를 가하지 않고, 행위주체에게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 선택지는 다음과 같다.

1)성매매를 하고, 대학에 진학한다(A)
2)성매매를 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다(B)

   B를 선택한 사람에게는 성매매에 대한 법적 규제는 의미가 없다. 성매매에 대해 법적 규제를 할 경우 A가 행위자에게 가져다주는 효용이 감소할 것인데,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A를 선택하지 않고 B를 선택하였으므로 법적 규제는 행위자의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매매에 대한 법적 규제는 밀라디와 같이 B를 선택한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밀라디는 성매매 경험의 참혹함을 말하고 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다. 밀라디는 비참함을 느낄 때마다 성매매를 하지 않고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상태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밀라디의 예산제약 밖에 있는 선택지이다. 성매매를 하고 대학에 진학한다는, 그가 실제로 선택한 행위는 성매매를 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행위에 비할 때 명백히 현시선호되고 있다.
 
   이제 성매매를 법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보자. 성매매의 법적 규제는 밀라디가 A를 선택할 때의 효용을 줄일 것이다. 그 결과 밀라디는 그 자신의 선택을 B로 바꿀 수도 있고, 여전히 A를 유지할 수도 있다. 밀라디가 어떤 행위를 선택할지는 그의 선호체계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밀라디가 어떤 행위를 선택하든간에 효용수준은 법적 규제 이전보다는 감소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성매매를 규제하는 것은 밀라디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 없다.

   이러한 결과는 성매매의 반대당사자인 남자의 경우에도 다를 것이 없다. 밀라디와 성매매계약을 체결한 남자에게 있어서, 성매매를 하는 행위는 그렇지 않은 행위에 비해 더 많은 효용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규제는 성매매의 효용을 낮춘다. 결국 성매매를 금지하는 것은 당사자의 효용수준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3. 제한의 정당성

   성매매를 행하는 양당사자의 효용수준을 규제 이전에 비해 감소시킴에도 불구하고 성매매를 금지하는 것이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당사자 이외의 제3자의 효용이 성매매 금지를 통해 증가하고, 그 증가폭이 당사자의 효용의 감소폭보다 커야 할 것이다. 요컨대, 규제를 통한 사회후생수준의 증가는 성매매 금지를 정당화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보통 우리는 이런 상태를 일컬어 '공익에 의한 제한'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공익이 더 크다면 우리는 성매매를 제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헌법 제37조 제2항은 이러한 기본권제한의 일반원칙을 선언하고 있는데,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본질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규정이 그것이다.

   동 조항은 크게 기본권제한의 사유와 그 한계를 명시하고 있다.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라는 세 가지를 원인으로 하는 것이 아닌 한, 개인의 자유 제한으로 인한 공익이 그로 인해 감소되는 사인의 효용을 능가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동 원인을 이유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더라도 그 제한의 수준은 필요최소한도에 의하여야 하며,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동일한 수준의 제3자의 효용이 달성되는 한, 제한되는 당사자의 자유의 제한은 필요최소한도로 하는 것이 사회후생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사회후생이 금지에 의해 증가하였는지, 혹은 감소하였는지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에 있다. 현실적으로 성매매 금지로 인한 사회후생의 증감을 명확히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따라서 특정한 기준을 제시한 후, 그 기준이 충족되었는지의 여부를 가지고 후생의 증가하였는지의 판단에 갈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 기준으로 '수인가능성'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즉 어떤 개인의 행위를 다른 사람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 그 행위를 제한하는 결과 감소하는 행위자의 효용보다 증가하는 제3자의 효용이 크다고 간주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제3자가 참을 수 있다면, 그 행위의 제한은 사회후생을 감소시킨다.

   그렇다면 성매매를 금지함으로써 사회후생은 증대하는가? 구체적으로, 성매매를 금지함으로써 제3자는 어떤 추가적인 효용을 얻는가? 엄격한 도덕주의자라면 성매매를 금지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유쾌함을 얻을지도 모르나, 그 외에는 직접 성매매 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제3자가 가시적으로 얻을 수 있는 추가적인 효용이 떠오르지 않는다. 보통 성매매를 규제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은 성매매를 허용하게 된다면 사람들의 성에 대한 관념이 혼탁해져 사회적 혼란이 올 것이라는 점을 주된 이유로 주장하지만, 이는 미끄러진 경사면의 오류의 전형이다. 성매매를 허용한다고 한국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될 것인지는 명확하지도 않으며,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가 된다고 하더라고 그 결과가 성매매를 허용하였기 때문에 도래한 것인지 역시 명확히 말할 수는 없다.

   내 생각에는 성매매를 금지함으로써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실제로 성매매가 이루어짐으로써 발생하는 도덕적 불쾌감을 해소하는 것 이외에는 없는 것 같다. 물론 도덕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역시 성매매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며,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매매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관념은 실제로 공동체 내에서 구성원 개인의 행위를 억제하는 구실을 한다. 성매매를 법적으로 규제하지 않더라도, 성매매를 하지 않아도 삶을 살아가는 데에 지장이 없는 사람들은 굳이 더 쉽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로 성매매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명품 가방이 갖고 싶어서’ 성매매를 하는 사람도 많이 생길 것이지만, 이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도덕적 비난을 하면 족하다. 우리가 효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법적인 제재를 가하진 않지만 도덕적 비난을 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도덕적 비난과 법적 제재는 다른 문제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제한은 그 행위가 수인 불가능한 피해를 제3자에게 가져오는 경우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성매매를 금지한 결과 얻게 되는 도덕적 불쾌감의 해소라는 가치가, 신인 연예인들이나 밀라디가 성매매를 통하여 얻고자 했던 행복을 얻지 못하게 하면서까지 얻어야 할 정도로 내게 가져다주는 효용이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4. 결론

   이 글에서 나는 성매매를 법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음을 논증하려고 했다. 성매매에 대한 법적 제재가 정당화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그로 인하여 사회후생이 증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매매를 금지함으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성매매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는 도덕적 만족감의 충족인 반면, 그것을 금지함으로 인해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보통 이런 사람들은 사회의 최약 계층이다)은 삶을 살아갈 유일한 기회를 박탈당한다. 밀라디가 성매매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을 것이며, 신인 연예인이 성접대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배역을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물론 성매매를 하지 않으면 대학에 가지 못하거나, 배역을 얻어내지 못하는 사회적 상태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이다. 국가와 사회는 이런 사회적 약자들이 성매매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성매매가 부도덕하다는 관념 하나 때문에 성매매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마저 박탈한다. 성매매를 국가와 사회가 권장할 이유는 없다. 다만 성매매를 금지해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이 어떠한 행위도 하지 못하고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는, 극단적인 방법이나마 선택해서 상황을 타개할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보다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결국 어떤 선택이 자기에게 가져다주는 효용을 판단하는 주체는 그 자신이니 말이다. 밀라디가 고민하면서도 결국 몸을 팔아, 그 대가로 대학에 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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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러브 2009-11-03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9년 1학기 경제학연습(이준구) 레포트
 

1. 序 

인류는 언제나 보다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해왔다. 프랑스 혁명은 절대왕정을 타도하였고, 6월 항쟁은 독재를 몰아내었다. 이러한 지향은 곧 현재 사람들이 살아가는 체제 내에 무언가 단점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처칠이 말한 것과 같이 자본주의는 최선의 체제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 그나마 제일 단점이 적은 체제에 불과한지도 모르며, 따라서 자본주의 역시 그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내재하고 있다.

근대가 개인을 발견함에 따라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을 전제로 구성되었고,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는 합리적인 인간이 상호작용하면서 거래를 하는 시장 원리가 근대 이후 경제의 기본 원리로 지지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이러한 시장 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경제 체제이다. 시장 경제 하에서 자유로운 개인이 자발적인 거래에 의하여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믿음 하에 성립된 자본주의는 따라서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가장 잘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경제체제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이룩해 낸 성취로 찬사받는 자원 배분의 효율성이 곧 분배의 평등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가장 효율적인 자원 배분 상태가 가장 불평등한 분배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빈부 격차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제시되었던 경제체제가 사회주의이다. 미제스의 간결한 정의에 의하면, 사회주의는 사회적인 자원의 배분을 자율적인 개인이 활동하는 시장 메커니즘에 맡기지 않고, 중앙집권적 기구가 자원의 배분을 통제, 관리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 하에서는 시장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그 개념이 제시되자마자 자본주의의 단점을 극복할 만한 사회체제로 일각에서 환영받았다. 중앙으로부터의 자원 배분을 통하여 평등을 달성하자는 사회주의의 이상은 아름다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념 자체가 가지는 고결함과 현실에서 운용되는 실제의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 이상이 아름답다고 하여도, 그것이 현실에서 실제로 작동할 수 없다면 사회철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폐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미제스를 필두로,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주의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체제라는 것을 끊임없이 주장해왔다. 이 글은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미제스의 주장을 검토하고, 그에 관한 시장사회주의자들의 논박을 다룬 후, 마지막으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재반박을 암묵적 지식과 자생적 질서의 개념을 중심으로 정리함으로써 이른바 사회주의 계산논쟁을 요약하고, 논쟁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Ludwig von Mises의 주장 

미제스는 사회주의 사회가 현실 세계에서는 실행되기 불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하여 일단 사회주의의 개념을 명료히 정의한다. 미제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이렇다.


“사회주의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모든 생산 수단이 조직화된 공동체의 배타적 통제 하에 있는 사회,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사회주의이다. 모든 다른 정의들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따라서 그 이름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생산수단의 사회화된 체제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사회철학은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미제스에 따르면 이러한 기본적 핵심요소야말로 과학적 분석의 초점이 되어야 하며, 간결한 정의를 내림으로써 비로소 경제조직의 원리로서의 사회주의를 연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주의는 실현 가능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약간 바꾸어서 다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생산 수단이 조직화된 공동체의 배타적인 통제 하에 있는 사회는 성립 가능한가? 이에 대한 미제스의 답변은 중앙집권적 경제계획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주의체제 하에서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재화의 가격이 형성될 수 없어 자원의 최적배분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2.1. 가격기구의 부재 

미제스에 따르면 인간의 가치평가는 개인적이기 때문에 개인이 원하는 재화와 그 양, 그리고 그 강도가 모두 상이하다. 이처럼 개인들간의 가치평가가 상충되는 경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관해 결정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한 어떤 재화에 대한 욕구가 먼저 충족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합리적 선택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전력을 생산하기 위한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선택에 직면한다. 수력을 이용할 수도 있고, 석탄을 땔 수도 있으며, 원자력을 이용할 수도 있다. 생산과정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개별 방법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편익과 손실을 평가할 것이다. 게다가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든 전력의 생산에 투여한 자원은 불가역적인 것이며, 소비된 자원 전력 이외의 생산에 투여될 수도 있었다. 계곡을 막아 댐을 만들어 수력 발전을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곳을 자연 그대로 보존하여 관광지로 이용할 수도 있다. 환경보호주의자는 수력발전으로부터 얻는 전력보다도 생태계의 파괴에 훨씬 더 큰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이제 계획의 입안자는 이러한 개인의 다양한 선호를 반영하여 사회적 후생을 최대한 증대시키는 자원의 최적배분상태를 결정하여야 한다. 합리적인 자원의 이용을 위해서는 그 자원을 투입하여 생산되는 다양한 결과의 가치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계획의 입안자에게는 이러한 다양한 자원 배분 결과가 가져다주는 가치의 평가를 측정할 공통된 계산의 단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계곡을 막아서 댐을 만드는 것이 더 나은지, 아니면 그곳을 보존하여 관광지로 이용하는 것이 더 나은지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어떻한 계획에 관계되는 사람이 무수히 많은 경우, 측정은 더욱 어려워진다. 행정수도를 건설할 것인지, 혹은 현재의 수도를 유지할 것인지의 정책 결정의 경우에는 수천만의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고, 공통의 계산 단위 없이 각각의 효용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시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실제 교환과정에서 선택한 것들을 검토함으로써 재화의 객관적인 교환비율로서의 시장가격이 이러한 가치평가의 공통기준으로써 기능할 수 있다. 모든 경제주체의 선호체계를 반영하여 시장 가격이 형성됨으로 인하여 우리는 댐의 경제적 가치와 계곡의 경제적 가치라는 전혀 상이한 재회를 공통된 기준 하에서 비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주의체제 하에서는 교환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교환주체의 선호체계가 대외적으로 표출되지 못하며, 따라서 가격이 형성될 수 없다. 물론 현물단위 계산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한 병의 음료수보다는 두 병의 음료수를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한 병의 물과 한 병의 석유의 가치를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모든 교환행위에 참여한 공동체 전체 사람들의 선택에 기초하여 나타난 객관적 측정치인 시장가격은 사회주의사회에서는 단 한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의 가치판단에 의해 대체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집단은 모든 재화의 모든 각각의 분배과정에서 서로 다른 재화의 가치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계산의 공통단위로서의 가격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합리적 선택은 불가능하며, 필연적으로 비효율이 발생한다. 

2.2. 경제 전반에의 확장 

특히 미제스가 문제 삼는 것은 그가 정의내린 “모든 생산수단이 조직화된 공동체의 배타적 통제 하에 있는 사회”로서의 사회주의가 가지는 본질, 즉 생산수단의 공유 때문에 이러한 경제계산의 문제가 최종적인 소비재 뿐 아니라 생산수단에까지 확장된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체제 하에서는 생산수단이 국가에 의해 공유되기 때문에 교환이 발생할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의 가치가 표출될 기회가 상실되므로 가격이 형성될 수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미제스는 경제계산문제가 생산수단 뿐 아니라 생산과정 중에 있는 모든 재화에 대해 적용된다는 점을 밝혔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최종 소비재에 국한된다. 그런데 최종 소비재가 산출되기까지의 중간과정에서 수많은 자본재와 반제품이 생산되나 이 역시 시장에서의 교환과정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칼 멩거의 말대로, 어떤 한 조각의 빵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밀가루, 밀, 쟁기의 보습과 철광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중간공정마다 생산의 관리자들은 중간재를 더 생산하여야 할지의 여부, 더 생산하여야 한다면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인지의 여부 따위에 대하여 끊임없는 결정을 요구받는다. 예컨대, 밀의 생산과정에서 우량 품종을 개발하는 데에 투자하는 것이 효율적인가, 혹은 농기구의 개량에 힘쓰는 것이 효율적인가? 각각의 경우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과 증가하는 산출량 중 어떤 쪽이 더 많은가? 만약 농기구의 개량에 힘쓴다면 철광석은 어느 지역에서 끌어다 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가? 심지어는, 밀을 지금 증산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의문들이 연이어서 등장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투입된 생산비용, 그리고 앞으로 남아있는 단계에서 추가로 들어갈 생산비용 등을 측정해내지 못하는 이상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현대의 산업사회에서는 개별 과정마다 그 과정에 투입되는 자원의 종류, 그 비율, 다른 생산과정과의 비교 등을 고려하여 끊임 없이 최선의 생산증대방법을 선택하여야 하나, 가격이 형성되지 않는 한 지출과 비용을 합리적으로 측정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비효율이 발생한다. 결국 사회주의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상품들이 합리적으로 비교될 수 없고, 따라서 자원의 최적배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생산기술은 우리가 무엇을 생산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지만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여야 할지에 관하여는 알려주지 않는다. 

3. 미제스의 견해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반론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가격기구의 부재로 인하여 성립 불가능하다는 미제스의 주장에 의해 경제적 결정을 위해서는 그 결정의 주체가 누구이든 가격과 비슷한 그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사회주의자들은 미제스의 견해에 대하여 많은 반박을 가함과 동시에 교환비율을 제시하는 비화폐적 대안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엔리코 바로네는 사회주의 경제 하에서의 의사결정의 문제는 충분한 계산능력의 획득문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부존자윈의 최적배분을 달성하는 문제는 가격체계의 문제가 아니라 한 재화의 이용이 다른 재화의 이용에 미치는 상관관계의 문제에 불과하며, 따라서 정태적인 상태에서의 최적화와 균형상태를 찾아내는 왈라시안 균형 이론을 사용하여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경제적인 관계를 묘사하는 매우 길고 복합적인 동시 방정식의 해를 구함으로써 사회주의 경제의 정확한 자원배분상태를 계산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일군의 시장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는 시장의 불완전성 때문에 소비자의 만족을 극대화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하에서 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원칙을 발견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오스카 랑게(Oskar Lange)와 압바 러너(Abba Lerner)는 행정가들에 의하여 가격이 정해자고 ‘이상적인 시장’이 마치 존재하는 것과 같은 시장사회주의(market socialism)원칙을 개발하였다. 즉, 행정청이 생산재의 최초가격을 공표하면 생산자는 한계비용이 최저가 되는 지점까지 생산을 하며, 그 지점에서의 한계비용을 생산된 재화의 판매가격으로 한다. 이후 초과수요나 초과공급의 발생에 따른 생산재의 재고량을 파악하여 행정청은 각 생산재의 가격을 조정하며, 이러한 과정을 균형점에 이르기까지 반복하면 시장의 불완전성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비효율성을 극복하면서 효율적 경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랑게의 분권적 시장사회주의 모델은 신고전학파 균형이론이 경쟁적 자본주의체제의 작동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시장사회주의의 작동을 분석하는데 있어 채용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왈라스 일반균형에서 이론과 현실의 격차가 존재할 때 중앙계획당국은 그 논리적 격차를 해소함으로써 복지적 역할을 강화할 수 있다. 

4. Mises와 Hayek의 재반론 

미제스는 바로네와 랑게의 반론에 대하여 경제적인 관계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정태적어서 불변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사람들의 행동은 연쇄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결코 미리 정확하게 예측될 수는 없으며, 현실세계의 복잡다기함 때문에 결코 완벽한 정보의 수집과 그로부터의 경제균형의 도출은 가능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반론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하이에크는 랑게의 이론이 논리적으로 성립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전제 자체를 공격한다. 미제스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반론의 요지는 완전한 지식과 정보의 수집이 가능하다면 경제학적 모델을 사용하여 최적배분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나, 하이에크에 의하면 인간 지식의 불완전성과 불확실성 때문에 최적배분을 찾아내기 위한 모델을 성립시키기 위한 완전한 정보의 수집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시장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4.1. 암묵적 지식과 계획의 불가능성 

하이에크는 지식을 과학적 지식과 현장적 지식으로 구분한다. 과학적 지식이 지역, 인간, 시점에 관계 없이 적용되는 보편적 법칙으로서의 지식인 반면, 현장적 지식 혹은 지역적 지식은 시간과 장소, 지역과 개인에게 고유한 지식이다. 전자는 법칙화할 수 있기 때문에 한 곳에 모아놓을 수 있으나, 후자는 각각의 현장이나 지역, 그리고 개인에 분산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지식 역시 있다. 그리고 사회 전체에 흩어져 어느 한 주체에 의하여 한군데로 뭉쳐 놓을 수 없는 개인적 지식들은 한데 뭉쳐 놓을 수 있는 조직 가능한 지식보다 훨씬 더 많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지식이 개인들 사이에 시간적, 장소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지식의 분산(division of knowledge)'라고 부르며, 이 지식의 분산은 분업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자생적 질서는 이렇게 개인이 보유한 암묵적 지식의 사용을 가능케 하기 때문에 명시적인 지식의 사용만을 가능케 하는 인위적인 질서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이러한 현장적 지식은 통계적으로 수집 가능한 지식, 통계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으나 언어로 표현 가능한 지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묵적 지식으로 구분된다. 통계적으로 수집 가능한 지식은 선거권자의 수 같은 것들이며 통계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으나 언어로 표현 가능한 지식은 개인의 취향 같은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암묵적 지식은 통계화할 수도,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지만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는 지식이다. 어감, 정의감, 법감정, 도덕 감정 등이 암묵적 지식의 대표적인 예에 속하는데, 이 암묵적 지식은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초의식적(super-conscious) 성격을 가진다. 즉, 암묵적 지식은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으나 의식의 수준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지식이다. 그리고 반드시 사용되어야 할 맥락적 지식은 집중되거나 통합된 형태로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개별적 개인이 갖고 있는 지식은 불완전하고 때론 모순적인 것으로서 분산된 조각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지점의 어떤 사람이 소유하고 배치할 수 있는 특정 시간과 공간에 대한 맥락적 지식이 어떤 경제체제에서든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그런데 지식이 단일한 경제주체에게 집중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식은 경쟁적 과정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는 암묵적 지식의 존재 때문에 성공적인 질서를 계획하기 위한 정보의 수집은 기술적으로뿐만 아니라 원시적으로도 불가능하다. 

4.2. 자생적 질서 

하이에크는 사회질서를 자연적 질서와 인위적 질서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반대한다. 즉, i)자연적 질서는 인위적인 것과는 달리 인간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며, ii)자연적 질서는 인위적인 것과는 달리 인간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인위적이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닌 제 3의 질서가 도출될 수 있다. 그의 사회 질서 이론의 중심 주제 역시 사회 질서 중에는 의도적으로 생성된 것 이외에도 자생적, 무의도적으로 형성된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에크는 인간행위에 의해 생성되었으나 그것이 인위적인 계획의 결과는 아닌 제 3의 질서로서의 자생적 질서를 주창한다. 하이에크는 이를 계획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자생적 질서의 대표적인 예가 시장이다. 시장 질서는 i)의 경우처럼 자연적인 것이 아니기에 인위적으로 형성된 질서이다. 그러나 ii)에 의하면 시장은 중앙집권적인 권위의 주체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개별인들이 자발적으로 교환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자생적 질서는 개인의 자발적인 행위에 의하여 생성되는 결과, 다음에 언급할 암묵적 지식을 활용할 수 있게 되어 계획에 비해 더욱 복잡한 체계를 가지며, 보다 더 효율적으로 기능한다. 

4.3. 하이에크의 재반박과 자유시장경제의 우위 

미제스의 논지에 대한 바로네나 시장사회주의자들의 반론이 가지고 있는 전제는 완전한 지식과 정보의 수집이 가능하다면 경제학적 모델을 사용하여 최적배분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사회주의자들의 논지는 자료가 사전적으로 미리 주어져 있는 주류경제학의 가정 위에 성립되어 있다. 그러나 하이에크에 의하면 암묵적인 지식의 존재 때문에 완전한 지식의 수집이 불가능하므로 시장사회주의자들의 논지는 성립되지 않으며, 따라서 겨결국 사회주의체제의 계획경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가격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비용 역시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에 따르는 기회비용이 되므로 이 역시 주관적이기 때문에 시장사회주의자들의 시도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결국 중앙통제기구가 가지는 제한된 정보만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보다 시장에서 경제주체가 암묵적인 지식을 이용할 수 있는 자생적 질서로서의 자유시장경제가 우월할 수밖에 없다. 

5. 小結 

먼 옛날의 과거에 경제 활동의 단위는 가족이거나 부락 정도였다. 몇 명에서 몇십 명 정도가 경제 활동 범위의 전부였던 시절에는 개개인의 선호를 직접 물어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고, 따라서 거래 행위가 없더라도 누군가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경제 활동은 수십억의 인구가 얽혀 있는 지극히 복잡한 관계이며, 개별적인 개인의 선호를 일일이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하이에크에 의하면 인간 지식의 총량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의식 수준에서 드러나지 않는 암묵적 지식인 바, 이는 타인에게 전달될 수 없으며 다만 개인의 선택 과정에서 무의식적, 간접적으로 표출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시장경제 하에서는 개인의 선택이 집적되고, 선호체계가 반영되어 그 결과로 도출된 시장가격이 그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각 재화가 사회적으로 가지는 객관적 가치를 표시한다. 시장경제가 완벽한 효율성의 극대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가격이라는 기준을 잣대로 하여 재화가 그것에 대해 가장 높은 효용을 가지는 사람에게 분배되도록 함으로써 가능한 한 최적의 자원배분상태를 향해 나아갈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재의 교환이 불가능한 사회주의체제 하에서는 가격이 형성될 수 없기 때문에 중앙기구가 자의적으로 자원의 배분상태를 결정지어야 하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시장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완전한 지식의 획득을 전제로 한 시장균형의 인위적인 도출 역시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하이에크는 사회주의는 그 비효율성으로 말미암아 실패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그의 예측대로 20세기 말 소비에트는 붕괴하였고, 현실에서의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중국 역시 시장경제를 점차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자본주의의 효율성이 사회주의가 가지는 효율성에 우월하다는 것이 현실로 입증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인간이 완전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기본 가정은 하이에크의 표현대로 ‘지식인의 오만’에 불과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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