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농의 샘 2 - [초특가판]
다니엘 오떼이유 외 감독, 엠마누엘 베아르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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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운명의 힘. 들어도 들어도 명곡이다. 이번엔 오프닝에서 하프시코드로 연주되니 전편의 하모니카와는 또 다른 종류의 구슬픔이 전해진다. 그래도 하모니카가 더 낫다. 그래도 하모니카는 좀 더 따뜻함이 있기 때문이다.

마농의 샘 덕분에 돈을 불리고 있는 위골랭(다니엘 오떼유)은 아주 그냥 신났다.


예상치 못한 의외의 설정들

어머니를 닮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란 마농(엠마누엘 베아르)의 첫 등장은 지질에 관심이 많은 교사 베르나르(이폴리트 지라르도)와의 만남이다. 베르나르는 분량은 짧지만 2부의 스토리 진행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농이 당연히(?) 어머니를 따라 도시로 나가 살 것이라 생각했지만 더 생각해보니 영화의 설정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사람에 대한 신물이 날 경험을 했으니 오히려 사람을 더 멀리하는게 맞는 듯. 마침 산속에 세입자가 있다는 설정도 있었으니 개연성 굿.

개인의 희생과 공동체의 안정

동네 사람들은 마농의 아빠가 '누구' 때문에 '왜' 죽었는지 대충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 않는 한 간섭하지 않는다. 마을과 본인 일상의 안정을 위해 불의에 간섭하지 않고 방관하는 것 정녕 공동체에 유익한 것일까?

천둥과 폭우가 치는 밤 홀로 비를 맞으며 아버지의 묘지 앞에서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마농. 그녀가 지금껏 살아온 삶을 상상하며 눈시울이 붉어질 뻔했는데... 연주하는 연기가 너무 티 나서 눈물이 싹 말랐다.ㅎ

짐승과 인간의 사랑

우연히 위골랭은 산속에서 목욕하는 마농의 '나체'와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서 나체를 강조한 것을 보면 마농에 대한 위골랭의 그것은 단지 욕망일 뿐이란 걸 의미하는 것 같다. 샘에 이은 또 하나의 소유욕. 번식을 위한 짝짓기. 그것에 타자에 대한 존중, 인간성, 양심 따윈 없다.

한 번도 마농의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이미 꿈에 그녀가 나올 정도로 호감을 느끼게 된 베르나르와 너무나 대립된다. 그는 위골랭과는 정반대로 마농을 소유물이 아닌 인격체로 대하고 있다.

위골랭에게 일말의 양심이 있었다면 마농에 대한 감정에 오히려 더욱더 괴로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개 짐승일 뿐인 그는 좋~다고 득도 없는 어설픈 구애나 하고 앉았다. 혹자는 위골랭을 부끄럼 많고 순진한 시골 청년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순진한 게 아니라 그냥 사람이 아니무니다. 인간이라면 소중히 여겨야 할 부분이 그에겐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니 말이다.


욕망의 쳇바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샘만 확보해서 카네이션 재배만 잘 되면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다. 그래서 한 가장의 생명을 뺏고 가정을 파탄 내는 것마저 실행에 옮겼다. 그런 그가 이제 다음 목표가 생겼고 그 목표(마농)를 소유하지 못하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이렇듯 욕망에 휘둘리면 삶의 대부분이 불행할 뿐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온전히 내 것이란 없으니까. 심지어 내 몸뚱이와 감정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교양의 존재 이유

욕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교양이다. 교양이란 인문학에 대한 이해 정도다. 얼 만큼 교양이 있는가는 얼마만큼 인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다. 인문학은 쉽게 말해 나(인간)와 타자(나 이외의 모든 존재),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물론 교양이 모든 욕망을 없애주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 욕망에 대해 생각할 재료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극 중 진정한 교양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보여지는 바로 마농과 베르나르 둘뿐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에 목을 매지 않는다. 직접 소유하지 않아도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문학을 통해 쌓은 교양 덕분일 것이다.

누가 누구보고 불쌍하다 그래?

마농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양치기를 하며 살지만, 지식인이었던 '장'의 딸답게 책에서 다양한 지식을 쌓는다. 그리고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를 닮아 춤과 음악을 즐긴다. 겉으로 보기엔 딱하고 한심해 보이는 그녀의 삶이지만 계속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은 되려 소비에 중독된 현대인의 쳇바퀴 돌듯 반복되고 여유 없는 삶이 더 딱해 보인다.

어필할 것이 돈밖에 없는

위골랭은 마농을 베르나르에게 뺏길 것 같으니 그제서야 한다는 짓이 돈 자랑이다. 평소와 전혀 다른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거짓말을 쏟아내며 돈 자랑을 하는 남자. 진짜 최악이다. 어필할 것이 돈밖에 없는 사람, 돈이면 무슨짓이든 하는 사람이 날 너무나 사랑한다고 외친다. 물론 돈 많은 상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의견도 존중한다. 가치의 우선순위가 서로 다를 뿐이니까. 하지만 '소유'에 관심 없는 상대를 대할 땐 그런 행동은 분명 최악 중의 최악이다.

가장 좋았던 것은 마농을 악녀로 만들지 않은 부분이다. 필자는 2부 시작부터 거대한 복수를 꿈꾸며 계획을 착실히 준비해나가는 마농의 모습을 예상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한국식 막장 스토리에 너무 찌든 탓이었다;;;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우연히 진실을 모두 알게 되고 이 때문에 매우 소박한(?) 복수를 실행한다.


소박한 복수의 시작

마을의 샘이 막히자 그제야 난리가 난 마을 사람들. 본인의 목에 칼이 들어오자 드디어 반응을 그것도 오스카급 리액션을 보여준다. 인상적인 장면은 어렵게 모셔온 농공 전문가의 설명을 알아들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마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건 재앙이다'라는 외침과 빨리 물이 나오게 하라는 억지뿐이다.

이 장면은 교양 없는 인간, '개인'이란 인식이 없었던 중세 이전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와중에 백미는 바로 위골랭의 대사다. 물이 다시 나오게만 해준다면 그게 무엇이든(원 대사에선 'progress') 찬성할 거고, 내 돈 100프랑을 전부 줄 거라는 것. 모든 것 위에 돈과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위골랭을 아주 잘 대변하는 대사다.

많이 알기만 하는 지식인(헛똑똑이) = 일자 무식자

이 작품에선 지식인 또한 풍자한다. 지식인들은 배우지 못한 다른 이들을 줄곧 무시한다. 그런 그들은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 역시 무시하다가 샘이 막히자 태세 전환하고 성당에 들어온다. 지식인과 교양인은 다르다. 지식이 많을수록 교양인일 확률은 높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종교인이라고 다를까? 신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마농의 일을 무시하다 결국 샘이 막히고서야 마농에게 미사에 함께 할 것을 부탁한다. 그들 역시 마을 사람의 일부일 뿐이다.

어쨌든 약간의 반전을 포함해 욕망의 노예였던 위골랭과 빠뻬의 최후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결국은 소유다. 소유가 최우선인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게 진짜 나를 버릴만한 일일까?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로선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그것을 가질 수 없어서 나를 버린다니... 내가 그것을 소유할 수 있어서 소중한 게 아니다. 이미 존재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마무으리

소유와 욕망, 교양과 인간관계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다. 오래전 영화고 친숙하지 않은 프랑스 영화였지만 전혀 지겹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었다. 이 리뷰를 읽고 '필자 넌 그럼 전혀 욕심 없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놈이냐?'라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당연히 그럴 리가 있나.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교양을 쌓기 위해 남들보다 좀 더 노력할 뿐이다. 나와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져가며 소비와 소유 외에 또 다른 삶의 가치와 행복을 찾을 뿐이다. 내 말은 살면서 '돈'만, '소유'만 외치지 말자는 거다.

교양을 이야기하면서 기본적인 돈 공부를 천시하는 것 역시 모순이다. 돈 또한 우리 세상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니, 말이다.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넷 반. 1부 2부 합치면 다섯 개 주고 싶다. 1부, 2부 두 편 합쳐 약 4시간 정도 되니 주말에 연달아 보시길 추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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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 [할인행사]
노라 애프런 감독, 로스 말린저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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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 만남을 믿는가? 여기 믿기 힘든 두 남녀의 만남을 다룬 영화가 있다. 이제는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이 된 작품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Sleepless In Seattle>(1993)이다.

​털털함과 금발이 매력인 여배우 맥 라이언과 <빅>(1988)의 주인공 톰 행크스의 만남. 여기에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의 노라 애프론이 설계도와 지휘봉(연출, 각본)을 잡은 작품이다.

​2012년에 삶을 마감한 노라 애프런은 할리우드의 대표 영화감독이자 작가다. 부모 모두가 1950년대 유명 로코 시나리오 작가였던 그녀는 애초부터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위해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애틀에서 볼티모어? 이 정도쯤이야

​7살 아들 '조나'를 두고 먼저 하늘로 가버린 아내를 잊지 못하는 '샘'. 고민 끝에 그는 아내와의 기억으로 가득한 시카고를 떠나 서쪽 끝 시애틀에 정착하기로 한다. 물론 그는 여전히 그녀를 너무나 그리워한다. 당장엔 누구도 그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로부터 18개월 후, 동쪽 끝 볼티모어. 한 여자가 그녀의 약혼자와 함께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부모님 댁에 들렀다. 온 가족이 함께한 식사 시간은 사실 특별함도 부족함도 없었다. 대부분 집들 마냥 평범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웠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다. 단 하나, 할머니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아 온 웨딩드레스가 찢어진 것 말고는...

그날 밤, 남친 소개 작전 대성공으로 텐션 충만해진 '애니'는 혼자 차를 운전해 집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러다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아빠에게 새엄마가 필요하다는 '조나'의 기특한 사연을 듣게 되는데...

​식당에서 똑같은 메뉴를 주문한 것조차 마법 같은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애니. 아니나 다를까 조나와 샘의 사연에 완전히 빠져들어가는데;;;;

​개연성이 밥 먹여주나?

사실 이 영화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개연성이 없다.ㅋ 아무리 복선들을 정성스레 깔아 놓았다지만 그 정도로 퉁을 치기엔 해도 해도 너무했다. 골수 현실주의자들은 아마 보다가 도중에 뛰쳐나갈지도? ㅎ 필자 역시 영화든 소설이든 개연성을 중시하는 편이라 거슬리긴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엔 그걸 상쇄시키고도 남을 매력 포인트가 있다.

​첫째. 억지 개연성으로라도 이어주고픈 세 명의 러블리 캐릭터다. 사랑했던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진 '샘(톰 행크스)'과 그런 아빠에게 새엄마를 찾아 주고 싶어 하는 아들 '조나(로스 맬링거)'. 그리고 미 대륙 끝(시애틀)과 끝(볼티모어)의 거리 차에, 얼굴도 모르는 둘(샘&조나)의 라디오 사연에 운명임을 직감하고 과감하게 진격하는 '애니(맥 라이언)'.

​이 영화의 두 번째 매력 포인트는 바로 감미로운 OST다. 듣자마자 <카사블랑카>(1942)를 바로 떠올리게 되는 <As Time Goes By>부터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에게도 유명한 엔딩곡 <When I Fall In Love>까지. 간만에 추억의 명곡들을 감상하느라 하던 일을 잠시 접어두고 유튜브 뮤직 서핑을 했다.

​마무으리

리즈시절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은 언제나 나의 10대 시절을 추억하게 한다. 그 시절 영화를 그닥 많이 보지 않았음에도 왜 보는 족족 두 사람이 등장하는지.ㅎㅎ 지금 생각해도 신기방기다(휴 그랜트, 줄리아 로버츠, 로빈 윌리엄스 추가요~!).ㅋㅋ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장르는 멜로/로맨스가 아니라 걍 판타지다. 비현실로 범벅이 되어있다. 그래서 화나냐고?? 그건 아니다. 대놓고 '이건 운명이야!, 마법이야!'라며 광고(?)하고 있으니 되려 이 비현실적 철부지 설정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마치 애니가 샘과 조나의 사연에 빠져들어 간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동안 만큼은 현실의 문제를 잠시 내려놓게 된다. 오로지 세 주인공이 얼른 만나 이루어지기를 응원할 따름이다.

​현실의 기준으로 보면 이건 뭐 되지도 않는 설정에 주요 캐릭터들도 완전 철부지에 사회 부적응자일 것만 같다. 보는 내내 "이게 말이 돼???", "제정신인가?"를 계속해서 연발하는 사람들이 아마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난 되묻고 싶다.

​현실적인 게 반드시 옳은 것인가?

그냥 나처럼 판타지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며 맘 편하게 그들을 응원하는 건 어떨까? 한번 해보시라 다 보고 나면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짐을 느낄지 모른다. 별점은 다섯 개 만점에 넷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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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농의 샘 1 - [초특가판]
끌로드 베리 감독, 엠마누엘 베아르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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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뒷좌석의 시점에서 극은 출발한다. 시작과 동시에 흐르는 장엄한 전주에다 마치 영화 <대부>를 연상시키는 구슬픈 하모니카 선율이 이어진다. 곡의 제목은 '운명의 힘'으로 베르디의 오페라다. 운명의 힘... 제목만으로도 영화 속 인물들의 기구한 운명의 장난을 예상하게 된다. 과연 그들 앞에 어떤 비극이 펼쳐질까?

차에 타고 있던 인물은 이제 막 군에서 제대를 한 위골랭 스베랑이다. 그는 고향인 프랑스 프로방스에 정착하기 위해 수익이 쏠쏠한 카네이션 재배를 통해 큰돈을 벌려는 계획을 세웠다. 도착하자마자 유일한 혈육인 삼촌 빠뻬 스베랑을 방문해 인사를 하고 그의 계획을 이야기한다.

꽃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는 빠뻬지만 카네이션의 수익성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부터 180도 달라지는 그의 반응.ㅎ 다른 혈육이 없다 보니 둘 사이는 거의 부모 자식이나 다름없다.

빠뻬는 위골랭에게 모든 것을 지원하고 남겨주려 한다. 여기까지는 너무나 따뜻하고 희망찬 분위기다. 이들에게 어떤 시련도 닥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지만 웬걸? 이것들이 원흉일 줄이야.ㅎ

카네이션 프로젝트에는 한 가지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물. 수조나 펌프로도 감당할 수 없는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은 고민을 하다.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그가 놀리고 있는 밭과 샘을 사기로 한다.

하지만 노인은 전혀 팔 생각이 없는 것을 넘어 뭔 사연이 있는지 스베랑 집안 욕을 둘 앞에서 아주 그냥 씨원하게(?) 날려버린다. 여기서 다시 울려 퍼지는 베르디의 운명의 힘!! 운명의 여신은 과연 어떤 장난을 펼칠까?

1부의 원제가 '장 드 플로레트'인 이유

프랑스 최고의 프로듀서 중 하나인 클로드 베리. 그의 1986년 연출 작 <마농의 샘>의 원제는 장 드 플로레트(Jean De Florette)다. 이는 이웃 노인의 집과 땅을 상속받은 손자의 이름이다. 제목이 앞서 언급한 스베랑 가의 두 인물이 아닌 만큼 장은 이 영화의 핵심 인물이다.

아내와 예쁜 딸 마농과 함께 노인의 집으로 온 장은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하모니카로 '운명의 힘'을 연주한다. 그의 아내 역시 멜로디를 따라 부르는데...(아.. 안돼!!!)

도시와 시골

도시에서 세무공무원을 하던 장과 오페라 가수였던 그의 아내는 전형적인 도시 사람이다. 장은 위골랭과 함께 가구를 정리하던 중 그에게 본인이 시골로 온 이유를 말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 도시인이 바라는 평화롭고 낭만적인 전원생활을 꿈꾸는 듯하다. 도시 속 경쟁에 신물이 난 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여유를 찾아온 것이다.

물론 꼽추인 그를 무시하는 시선 역시 도피의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근데 그런 시선은 시골 역시 마찬가지;;;;). 그런 그에게 장이 떠나기만을 바라는 위골랭은 시골생활의 현실로 팩트 폭격을 해보지만 장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지식과 경험

장의 믿는 구석이란 결국 그의 어머니가 남긴 돈과 지식이었다. 농사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담은 책들, 그리고 도시에서 그가 배웠을 새로운 과학 지식들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도움을 준다. 하지만 한계 또한 분명했다.

경험이 없다면 아무리 강력한 지식으로 무장한 들 시행착오 없이 성공을 거두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운전면허 필기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바로 운전을 잘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장은 연속되는 실패 앞에 좌절하고 만다.

욕망과 죄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모두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심적 여유를 찾아온 듯 보이는 장 조차 중반부터 토끼 대량 사육이라는 그의 욕망을 드러낸다. 그의 욕망을 처음 이야기할 때의 연출은 그 이전과 크게 다르게 표현된다.

마치 그전까지 차분하고 여유로운 그의 모습과 반대로 격정적이고 너무나 확신에 가득 찬 연출이다. 그래도 그는 양반이다. 적어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빠뻬와 위골랭은 앞서도 말했듯 카네이션 재배를 꿈꾸고 있다. 그들이 장과 다른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살인만 아니면 남에게 피해를 끼쳐도 된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그런 말은 빈말이 아니었음이 영화 내내 증명된다. 원래 주인이었던 노인은 이들의 그런 부분을 잘 알았기 때문에 스베랑 집안을 향해 그렇게나 분노했던 걸까? 그렇다면 인정!

본격 예비 귀농인을 위한 영화

귀농이나 귀촌을 꿈꾸는 분들께 추천하고픈 영화다. 장은 분명 능력 있고 좋은 사람이지만 너무 지식과 자신을 믿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현지인들과 친해지려 노력하고 적극적으로 교류했으면 어땠을까? 그럼 장네 가족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물론 그랬다면 2부가 존재하지 않았겠지만.ㅋㅋ

<마농의 샘>은 2부작이다. 내용이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1986년 같은 해에 개봉했다. 2부의 원제가 <마농의 샘(Manon Des Sources , Manon Of The Spring)>인 만큼 장의 딸인 마농을 중심으로 사건이 진행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이번 주말에 볼 예정인데 정말 기대 중이다.

마무으리

80년대 영화, 게다가 프랑스 영화는 나에게 그리 친숙하지 않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갭을 전혀 고려할 필요 없을 만큼 재미있게 본 작품이다. 비극적인 사건과 대비되는 전원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은 이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다.

인간의 양면성을 비롯해 개인의 욕망과 운명, 도시와 시골, 지식과 경험, 죄와 양심 등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너무 많아서 리뷰에 다 담지 못해 아쉬울 정도. 2부가 남아 있으니 못다 한 이야기는 2부의 리뷰에서 다뤄볼 생각이다.

사실 1부 만으로도 완결성이 충분히 있지만 인과응보 측면에서 보면 고구마 백만 개 씹은 상태라 2부는 꼭 있어야 한다. 1부의 별점은 다섯 개 만점에 넷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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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당갈 : 700장 풀슬립 넘버링 한정판 - 부클릿(32p)+엽서(6종)+캐릭터카드(6종)
니테쉬 티와리 감독, 아미르 칸 외 출연 / 노바미디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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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덩치의 오피스(?) 레슬링


인도의 어느 회사 사무실. TV에선 올림픽 레슬링 72kg급 결승전이 펼쳐지고 있다. 그. 브라운관을 팔짱 끼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한 남자. 한가락 할 것 같은 덩치를 가진 그(이하 덩치1)는 말한다.


"우리 애들이 나가면 메달을 딸 텐데,

후원을 받아야 말이지..."


그 말을 들은 또 다른 덩치(이하 덩치2) 왈.


"메달을 말로 따는 거면,

진작에 따셨을 것 같네요."

그렇게 덩치2의 빈정거림에 존심 상한 덩치1, 역시 상대의 존심에 스무스하게 흠집을 내주는데... 그 순간 평범한 사무실은 마치 트랜스포머처럼 레슬링 경기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의례 자주 있는 일인 마냥 기계적으로 책상을 치우는 직원들.ㅎ 그렇게 한바탕 오피스 레슬링 경기가 펼쳐지는데... 이 경기의 배경에 정확히 겹치는 TV 중계. 시작부터 감독의 연출이 예사롭지 않다.

당갈이 뭐야?

느닷없이 두 덩치의 레슬링 경기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니테쉬 티와리 감독의 인도 영화 <당갈>(2016)입니다. 당갈은 힌디어로 '레슬링 경기장'과 '레슬링 경기(대회)'를 뜻하는 단어인데요. 제목이 말해주듯 레슬링을 주제로 한 스포츠 영화입니다.

2010년 국제 레슬링 대회에서 인도 역사상 첫 메달을 목에 건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 기반 작품입니다. 앞서 '덩치1'로 출연한 인물이 바로 두 자매의 아버지인 '마하비르 싱 포갓(아미르 칸)'입니다.

반가운 얼굴 아미르 칸

자매의 아버지 마하비르를 연기한 배우는 한국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아미르 칸'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세 얼간이>(2009)라는 작품으로 이미 그를 만나 셨을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7년이란 시간이 흐른 만큼 나이 든 그의 모습이 처음에는 꽤 낯설었습니다.

믿고 보는 연기력과 믿기 싫은 체중조절력(?)

이미 '아미르 칸'의 연기력이야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않을까 합니다. 이 작품에서도 인정사정 유감 없이 제 실력을 십분 발휘합니다. 꼰대와 츤데레가 융합(?) 된 아버지 역할을 찰떡같이 소화해냈지요.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체중 변화인데... 이게 참 뭐랄까;;; 마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 속 토르의 갭 그 이상의 체중 변화를 보여줍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토르는 실제 살을 찌운 건 아니겠죠?(아시는 분 댓글 좀;;) 암튼 이 영화에선 실제로 체중을 변화시킨 것 같습니다.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것으로 보이네요. 진짜 대단한 배우입니다.

빤한 스토리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한 주인공이 자신의 자녀를 성공시켜 대리만족한다는 스토리는 뻔하다 못해 이젠 완전 식상하죠. 하지만 이 영화는 몇 가지 차별화로 그 식상함을 걷어차버립니다.

우선 레슬링이라는 종목 자체가 영화에선 나름 참신합니다. 게다가 자녀는 아들이 아닌 딸. 그것도 자매고요. 할리우드가 아닌 인도영화라는 점도 극에 참신함을 더합니다. 스포츠 영화지만 인도영화이기에 가능한 중간중간 스며드는 뮤직 타임~!ㅎ

인도영화하면 뮤지컬 같은 장면을 떠올리시겠지만 이 영화에선 음악만 나옵니다. 그래서 저 같이 단체 율동이 나오는 부분을 선호하지 않는 관객까지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적재적소에 위트 있는 가사를 담은 음악들을 심어 놓아서 노랫말과 장면을 보며 절로 미소 짓게 됩니다. 음악 자체도 그리 인도스럽지 않은 곡들이라 감상하는데 부담이 덜합니다.

스포츠 영화라면!

스포츠 영화니 만큼 경기 장면 연출 역시 중요하죠. 솔직히 큰 기대를 안 했습니다. 원래 레슬링을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딱히 레슬링으로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연출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웠으니까요.

하지만 결과물은 암울한 예상을 보기 좋게 날려버렸습니다. 진짜 실제 스포츠 경기 보듯 몰입해서 보게 되더라고요.


마지막 결승전은 진짜 손에 땀을 쥐고 봤습니다. 하지만 역시 절정의 클리셰 부분은 좀 뻔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면 무난! 크게 불만 없습니다. 그래도 딱 한 가지! 슬로 모션을 조금 길게 가져간 건 아닌지...

블록버스터급 러닝타임

보기 전에는 161분, 2시간 41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적잖이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플레이 후에는 2시간 보는 것처럼 무난하게 지루함 없이 지나갔습니다. 그만큼 흡입력이 있다는 거겠죠?

대화의 중요성

아들을 낳아서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고자 했던 기대를 보기 좋게 그것도 네 번이나 거두어야 했던 마하비르... 하지만 네 딸 중 첫째와 둘째의 재능을 확인한 후 문자 그대로 '매몰차게' 레슬링 훈련을 시킵니다. 솔직히 요즘 같으면 아동학대로 바로 신고 감이라는;;; 그래도 기억에 체벌은 없었던 것 같네요.

진짜 초반에는 두 아이가 너무너무너무너무 안쓰럽더라고요. 게다가 인도 역시 유교국가 뺨칠 정도로 고정 관념이 어찌나 심한지 몸이 힘든 건 둘째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아주 그냥 영화를 보는 저까지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디다요. 어휴~

두 아이는 견디다 못해 레슬링을 그만하고 싶어서 온갖 꾀를 내지만, 어느 계기로 생각을 180도 돌리게 되는데요. 이 부분을 보면서 가족 간 대화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뜬금 고백이지만 저희 가족도 서로 간에 대화가 너무 없어서 문제였거든요. 더 깊이 이야기하면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라 여기서 마이크 끄겠습니다.

사회적 편견에 맞서가면서까지 딸들에게 레슬링을 가르치는 만큼 자신의 의도를 두 딸에게 미리 진솔하게 말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본인의 못다 이룬 꿈은 물론이고 딸들의 미래에 대한 것까지도요. 그럼 두 아이들이 초반에 그 괴로움을 온전히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요.

여성주의 영화? 가족영화!!

영화 속 여성에 대한 가치관은 한국의 60, 70년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여자아이가 반바지를 입고 조깅하는 모습을 보고 눈이 휘동 그래지는 수준이니까요. 스포츠머리로 자른 건 완전 천지개벽 수준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생각하면 여성주의 영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중으로 따지면 가족 영화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어디까지나 이건 부녀지간의 이야기가 중심이니까요.

선수(과정) 중심 or 메달(결과) 중심

영화 속에선 두 명의 다른 스타일의 코치가 나옵니다. 극의 결말까지 서로 대립하는데요. 여러 부분에 차이점이 있지만 제가 보기에 가장 큰 것은 첫 번째 코치이자 아버지인 마하비르는 '선수'를 중심에 둔다는 겁니다.


반면에 국대 코치인 프라모드(기리시 쿨카니)는 선수 개개인보다는 결과. 즉, 메달을 중심에 둡니다. 메달만 딸 수 있다면 선수는 누가 됐든 상관없는 것이죠. 물론 국대 코치의 입장에서는 후자가 훨씬 실용적이고 현실적입니다. 하지만 선수 개인에게는 좋다고만 할 순 없죠.

최근 많이 좋아졌지만 우리 역시 과거에 '선수'보다 '메달'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지금은 정말 정말 많이 개선되었죠.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겠지만 스포츠 정신과 감동을 생각했을 때 '선수'에 중점을 두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갈수록 결과보다 과정, 결말보다 이야기 자체의 힘이 더 커지는 추세입니다. 이제 졸업장, 자격증보다는 실력과 포트폴리오. 빽빽한 이력서보단 자신만의 브랜딩이 우선인 시대니까요.

마무으리

오래간만에 본 인도영화. 인도영화 특유의 색깔이 많이 옅긴 했지만 암튼 <당갈> 정말 좋았습니다. 러닝타임이 살짝 부담스럽지만 보다 보면 지루하단 생각은 들지 않으실 겁니다.


배우들 연기도 다들 좋고 특히 아역 배우들이 정말 정말 귀여워요.ㅎㅎ 가족끼리 오손도손 모여서 보는 것 적극 추천드립니다. 아마 재미와 감동을 두 손 가득 담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제 별점은 4개 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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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3-07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려고 찜해둔 영화입니다.
글 읽으니 기대됩니다. ^^

세상틈에 2021-03-09 19:30   좋아요 1 | URL
정말 재미있더라구요.^^ 즐거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블루레이] 위트니스
피터 위어 감독, 해리슨 포드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녹색 풀이 가득한 들판에 신비함을 담은 BGM이 흐르고 마치 유대인을 떠올릴 법한 검은색 복장의 사람들과 마차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서 펼쳐지는 누군가의 장례식.

신비한 BGM은 계속되고 영화의 첫 대사는 마치 독일어처럼 들리는 낯선 언어다. 이렇게 오프닝 시퀀스는 이 작품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익숙하지 않은 장소 임을 전한다.

노인과 여인, 어린아이, 이렇게 세 명이 탄 마차가 시골길을 달린다. 곧이어 행복해 보이는 그들 바로 뒤로 거대한 트럭과 승용차들이 느릿느릿 따라가고 있다. "잉?" 이 장면에서 난 자동차를 보며 이질감을 느꼈다.

한 마디로 '차가 왜 거기서 나와~~!" 랄까? 난 당연히(?)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의 미국을 떠올렸다. 심지어 초반에 1984년 펜실베이니아라는 자막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상의 힘이란 이렇게도 강력하다.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패스트푸드점과 수많은 신호등 그리고 차들에 둘러싸인 마차다. 결국 영화 속 현실에서 이질적인 존재는 차들이 아니라 마차를 탄 그들인 것이다.

감독은 일부러 이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오프닝 시퀀스를 짠 것으로 보인다. 정말 노린 거라면 제대로 성공했다. 초반부터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으니까. 솔직히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봤는데 순간 확 몰입 되었다.

그렇게 평온한(?) 전원 풍경에 이어 한 모자가 기차를 타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제 막 미망인이 된 레이첼(켈리 맥길리스)과 그의 아들 사무엘(루카스 하스)이다.

BGM은 80년대 유행한 신스(신디사이저)팝과 뉴에이지의 영향인지 마치 sf 영화 속 신비주의 음악을 연상시킨다. 진짜 듣도 보도 못한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는 듯한 음악. 모든 것이 낯선 8살 사무엘의 관점에 딱 맞는 음악이다.




이 영화가 그린 스릴러라고 불리는 이유

여기서부터 상황은 급반전한다. 장르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완전 딱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본 나는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위트니스'(목격자, 증인)인지 제대로 알았다.

여기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아역인 루카스 하스다. 조연급 이상 캐스팅이 처음인 아이의 연기가 너무나도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해당 사건을 다룬 다큐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너무 귀엽잖아.ㅜ.ㅜ

장르의 급반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놀랍다. 마치 관객의 멱살을 잡고 스크린 앞으로 잡아당기는 듯 몰입시킨다. 거기엔 빠른 진행이 큰 몫을 했지만 세 주인공, 특히 형사 존 북으로 분한 해리슨 포드의 연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말 그대로 리즈 시절.

해리슨 포드하면 대개 스타워즈와 인디아나 존스, 블레이드 러너 등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난 이 작품 속 그의 모습이 더 마음에 든다. 비슷한 역할을 연기한 작품들을 찾아봐야겠다.

드라마에서 범죄 스릴러로, 다시 로맨스로 장르가 바뀐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이것은 연출과 연기도 큰 영향이 있지만 분명 각본의 힘, 설정의 힘이다. 여러 장르가 같이 동시에 진행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통째 분위기가 바뀌며 관객은 그 바뀜에 거부감이 없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미시라는 종교 공동체를 소재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공동체로 들어가는 순간 외부와의 연결은 끊어진다. 그만큼 그들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아미시가 뭐길래

아미시 공동체는 스위스-독일계 이민자 집단이다. 매우 보수적이고 금욕적이기에 소위 기계와 같은 문명의 이기와 쾌락, 폭력 등을 극도로 멀리한다.

그래서 그들은 1980년대임에도 여전히 마차를 타고, 물레 방아를 돌리며, 오로지 수작업으로 마을 사람 전체가 모여 마을에 필요한 건물을 짓는다. 덕분에 관객들에겐 평소에 쉽사리 느낄 수 없는 감상을 전한다. 이게 만약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였다면 전혀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것은 살인사건이지만 난 두 남녀 주인공의 뜨거운 관계와 아미시라는 흥미로운 공동체에 모든 관심이 몰렸다. 아무리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 해도 남과 여는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유전자의 목적은 같기 때문에... 물론 그 사랑의 감정은 고귀하다.

어쨌든 둘의 사랑을 갈수록 커져만 간다. 하지만 그들의 끝은 캐릭터 설정에서부터 정해져 있다. 공동체의 법을 집행하는 남자와 속세의 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는 금욕적인 공동체의 일원인 여자.

그렇기에 그들의 마지막은 정말이지 담백하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든다. 한국 영화 같았으면 눈물 몇 대야 정도는 가뿐하게 흘리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이 작품은 눈물 따윈 저리 가라다.



아미시가 이상하게 보이는가?

우리가 아미시 교도들을 이상하게 보는 것만큼 그들도 우리를 이상하게 볼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상대적인 거니까. 그러고 보면 세상은 너무나도 다양한 아미시(공동체)들의 공존이다.

국가나 인종, 성별, 종교, 세대는 너무도 당연하고 직업 간이나 계급 간에도 그들만의 아미시(공동체)를 가진다. 심지어 같은 분야의 소모임 간에도 서로 다른 가치와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를 만날 수 있다.

인간은 결국 사회적 동물이기에 각자만의 아미시를 가져야만 살아갈 수 있다. 인간 세상이 실로 흥미진진한 이유는 하늘 아래 별의별 인간들이 존재하며 공동체들의 존재방식 또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류에게 대안 없이 무조건 서로 분열하지 말고 갈등하지 말자는 말은 '독재'와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민주주의가 아직까지는 최강인 것이다.



아미시 공동체의 장단점

영화 속 청교도적 아미시 공동체의 모습은 과거 끈끈한 공동체의 그것들을 거의 다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도시와 시골의 차이를 생각하면 쉽다.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시골 마을의 공동체는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구성원에게 기쁜 일이 있으면 마치 제 일처럼 함께 나누고, 어려운 점이 있을 때 역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도움을 건넨다. 그런 영화 속 아미시들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특히 다 함께 힘을 합쳐 건물을 짓는 장면은 그러한 감정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듯. 장단점이 존재한다. 끈끈한 공동체일수록 보수적이다. 보수적이란 말은 지키고자 하는 절대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고로 그들의 교육은 주입식이 될 수밖에 없다. 답정너인 것이다.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구성원은 공동체 내에 존재할 수 없다.

영화에서도 나오 듯 이어지는 것은 파문과 추방이다. 이렇게 보면 공산주의 역시 지극히 보수적인 시스템이다. 좌든 우든 극단에 있는 이들은 모두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에 다름 아니다.


누구에게나 좋을 영화

공동체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유익한 작품이다. 물론 영화적인 재미까지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명작으로 기억되는 게 아닐까. 이건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하다. 하지만 유명한 작품임에도 너무 오래되어서인지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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