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위트니스
피터 위어 감독, 해리슨 포드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녹색 풀이 가득한 들판에 신비함을 담은 BGM이 흐르고 마치 유대인을 떠올릴 법한 검은색 복장의 사람들과 마차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서 펼쳐지는 누군가의 장례식.

신비한 BGM은 계속되고 영화의 첫 대사는 마치 독일어처럼 들리는 낯선 언어다. 이렇게 오프닝 시퀀스는 이 작품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익숙하지 않은 장소 임을 전한다.

노인과 여인, 어린아이, 이렇게 세 명이 탄 마차가 시골길을 달린다. 곧이어 행복해 보이는 그들 바로 뒤로 거대한 트럭과 승용차들이 느릿느릿 따라가고 있다. "잉?" 이 장면에서 난 자동차를 보며 이질감을 느꼈다.

한 마디로 '차가 왜 거기서 나와~~!" 랄까? 난 당연히(?)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의 미국을 떠올렸다. 심지어 초반에 1984년 펜실베이니아라는 자막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상의 힘이란 이렇게도 강력하다.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패스트푸드점과 수많은 신호등 그리고 차들에 둘러싸인 마차다. 결국 영화 속 현실에서 이질적인 존재는 차들이 아니라 마차를 탄 그들인 것이다.

감독은 일부러 이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오프닝 시퀀스를 짠 것으로 보인다. 정말 노린 거라면 제대로 성공했다. 초반부터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으니까. 솔직히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봤는데 순간 확 몰입 되었다.

그렇게 평온한(?) 전원 풍경에 이어 한 모자가 기차를 타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제 막 미망인이 된 레이첼(켈리 맥길리스)과 그의 아들 사무엘(루카스 하스)이다.

BGM은 80년대 유행한 신스(신디사이저)팝과 뉴에이지의 영향인지 마치 sf 영화 속 신비주의 음악을 연상시킨다. 진짜 듣도 보도 못한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는 듯한 음악. 모든 것이 낯선 8살 사무엘의 관점에 딱 맞는 음악이다.




이 영화가 그린 스릴러라고 불리는 이유

여기서부터 상황은 급반전한다. 장르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완전 딱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본 나는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위트니스'(목격자, 증인)인지 제대로 알았다.

여기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아역인 루카스 하스다. 조연급 이상 캐스팅이 처음인 아이의 연기가 너무나도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해당 사건을 다룬 다큐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너무 귀엽잖아.ㅜ.ㅜ

장르의 급반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놀랍다. 마치 관객의 멱살을 잡고 스크린 앞으로 잡아당기는 듯 몰입시킨다. 거기엔 빠른 진행이 큰 몫을 했지만 세 주인공, 특히 형사 존 북으로 분한 해리슨 포드의 연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말 그대로 리즈 시절.

해리슨 포드하면 대개 스타워즈와 인디아나 존스, 블레이드 러너 등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난 이 작품 속 그의 모습이 더 마음에 든다. 비슷한 역할을 연기한 작품들을 찾아봐야겠다.

드라마에서 범죄 스릴러로, 다시 로맨스로 장르가 바뀐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이것은 연출과 연기도 큰 영향이 있지만 분명 각본의 힘, 설정의 힘이다. 여러 장르가 같이 동시에 진행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통째 분위기가 바뀌며 관객은 그 바뀜에 거부감이 없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미시라는 종교 공동체를 소재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공동체로 들어가는 순간 외부와의 연결은 끊어진다. 그만큼 그들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아미시가 뭐길래

아미시 공동체는 스위스-독일계 이민자 집단이다. 매우 보수적이고 금욕적이기에 소위 기계와 같은 문명의 이기와 쾌락, 폭력 등을 극도로 멀리한다.

그래서 그들은 1980년대임에도 여전히 마차를 타고, 물레 방아를 돌리며, 오로지 수작업으로 마을 사람 전체가 모여 마을에 필요한 건물을 짓는다. 덕분에 관객들에겐 평소에 쉽사리 느낄 수 없는 감상을 전한다. 이게 만약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였다면 전혀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것은 살인사건이지만 난 두 남녀 주인공의 뜨거운 관계와 아미시라는 흥미로운 공동체에 모든 관심이 몰렸다. 아무리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 해도 남과 여는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유전자의 목적은 같기 때문에... 물론 그 사랑의 감정은 고귀하다.

어쨌든 둘의 사랑을 갈수록 커져만 간다. 하지만 그들의 끝은 캐릭터 설정에서부터 정해져 있다. 공동체의 법을 집행하는 남자와 속세의 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는 금욕적인 공동체의 일원인 여자.

그렇기에 그들의 마지막은 정말이지 담백하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든다. 한국 영화 같았으면 눈물 몇 대야 정도는 가뿐하게 흘리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이 작품은 눈물 따윈 저리 가라다.



아미시가 이상하게 보이는가?

우리가 아미시 교도들을 이상하게 보는 것만큼 그들도 우리를 이상하게 볼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상대적인 거니까. 그러고 보면 세상은 너무나도 다양한 아미시(공동체)들의 공존이다.

국가나 인종, 성별, 종교, 세대는 너무도 당연하고 직업 간이나 계급 간에도 그들만의 아미시(공동체)를 가진다. 심지어 같은 분야의 소모임 간에도 서로 다른 가치와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를 만날 수 있다.

인간은 결국 사회적 동물이기에 각자만의 아미시를 가져야만 살아갈 수 있다. 인간 세상이 실로 흥미진진한 이유는 하늘 아래 별의별 인간들이 존재하며 공동체들의 존재방식 또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류에게 대안 없이 무조건 서로 분열하지 말고 갈등하지 말자는 말은 '독재'와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민주주의가 아직까지는 최강인 것이다.



아미시 공동체의 장단점

영화 속 청교도적 아미시 공동체의 모습은 과거 끈끈한 공동체의 그것들을 거의 다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도시와 시골의 차이를 생각하면 쉽다.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시골 마을의 공동체는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구성원에게 기쁜 일이 있으면 마치 제 일처럼 함께 나누고, 어려운 점이 있을 때 역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도움을 건넨다. 그런 영화 속 아미시들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특히 다 함께 힘을 합쳐 건물을 짓는 장면은 그러한 감정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듯. 장단점이 존재한다. 끈끈한 공동체일수록 보수적이다. 보수적이란 말은 지키고자 하는 절대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고로 그들의 교육은 주입식이 될 수밖에 없다. 답정너인 것이다.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구성원은 공동체 내에 존재할 수 없다.

영화에서도 나오 듯 이어지는 것은 파문과 추방이다. 이렇게 보면 공산주의 역시 지극히 보수적인 시스템이다. 좌든 우든 극단에 있는 이들은 모두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에 다름 아니다.


누구에게나 좋을 영화

공동체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유익한 작품이다. 물론 영화적인 재미까지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명작으로 기억되는 게 아닐까. 이건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하다. 하지만 유명한 작품임에도 너무 오래되어서인지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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