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달, 블루문 창비청소년문학 81
신운선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멍하다.
'내게는 없을 것 같던 이름, 엄마'
책 표지에 둘러진 띠지에 적힌 한 문장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었지만, 그래서 이 책을 선뜻 읽어야겠다 골라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놀라게 할 줄은 몰랐다.

내게 이수연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만 같다.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 이십 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였다.
'엄마'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될 수 있겠구나, 짐작하는 것과 엄마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일이니까.

순진했나,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억에 남는 성교육을 받아 본 기억도 없고,
주변의 아이들 중에 남자 친구와 잠을 같이 잤다고 말하는 아이를 본 기억도 없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그냥,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시대가 변했다. 통계조사를 통해 첫 경험 나이가 열셋이라는 기사를 봤을 때, 놀라움과 함께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말도 안 돼. 내 첫 반응.
나도 어느새 그렇고 그런 어른이 된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어 버린 기사였다.

요즘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교육이 아니라 정확한 피임법을 알려주는 교육이라는걸,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키고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걸 여러 책을 통해, 매체를 통해 알게 되면서 아직 어린 딸에게 언제부터 그런 교육을 시켜야 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달, 블루문>>에 등장하는 수연은
엄마에게 버림받았던 기억, 아빠에게 버림받았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빠와 살던 초등학생 때 아빠는 수연을 이모 집 앞에 데려다주고 떠났다. 이쁘고 잘 사는 엄마에게 데려다줄 거라는 말과 함께.
수연의 기대와는 다르게 엄마는 수연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곤 다시 수연을 아빠에게 돌려보냈다.

흔히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엉터리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과거에 해결하지 못한 감정들은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도망치고 싶은 기억일수록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의식 어디엔가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는 법이니까. 아홉 살 때 내가 겪은 일이 그렇다. p10

아홉 살,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아야 할 나이. 어리광을 피우고 아이답게 자라야 할 나이에 수연은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다. 어른들의 세계를 알아버렸다.
엄마에게서 다시 아빠에게로 돌려보내진 뒤, 수연은 아빠와도 더 이상 전처럼 어리광도 피우고, 웃기도 하던 관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절대로 아빠처럼은 살지 않을 거였다. 아빠처럼 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멋진 연인을 만나 남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사는 것. 별거나 이혼, 병이나 실직, 예상하지 못한 불운 등을 겪지 않고 사는 것. 그게 내 계획이었다. 계획은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어긋난 것 같았지만, 사는 게 내 뜻대로 안 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 삶의 계획을 포기할 수 없었다. p68

고3 졸업을 앞두고 수연은 자신이 임신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열여덟 살에 임신한 소녀가 세상을 대하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대하는 담담한 태도가 아닐까.
세상이 가진 편견 중, 불우한 가정환경에 처한 십 대들의 일탈도 있지 않을까. '엄마 아빠가 이혼한 애들이 그렇지 뭐. 십 대에 임신했으면 애가 뻔하지 뭐. ' 등등의 시선들.
이 소설 속 아이들은, 어리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에 대해, 친구에 대해, 사람에 대해 자신들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른들이 놀랄만한 아이들, 배워야 할 아이들. 이 소설의 매력은 거기서 극대화되는 듯하다.
수연은, 아이 아빠인 남자친구를 좋아했다. 남자친구 역시 수연을 좋아했고. 그들은 서툴렀지만 그들의 방식대로 좋아했고, 임신을 안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두려워했다.

수연은 스스로 미혼모가 쉴 수 있도록 마련된 '사랑아이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보살핌을 받고, 아이를 낳고 입양을 보낼 생각이었다. 아니, 그냥 그래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배가 점점 불러오고, 함께 시설에서 지내던 아이들이 출산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연은 아이를 낳기로 마음먹었다.

두려웠을거다. 무서웠을거다.
이야기는 이제 아이를 낳아 직접 기르기로 마음먹은 수연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리고 펼쳐지지 않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떠올려보게 한다.

기나긴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할 거다.
어쩌면, 예상치 못한 불우한 일들이 닥칠 수도 있고, 세상의 편견과 끊임없이 맞서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절대, 포기하거나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이제는 어른들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그 아이들까지 보듬어 줄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될 기회를 스스로 놓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청소년과 어른들이 함께 읽어야 할 책이다. 어쩌면 어른들이 더 많이 읽어야 할 책이다.

- 아기를 나보다 더 좋은 부모에게 입양 보내는 게 인생의 걸림돌을 해결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식을 버리고 싶은 부모가 없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어떤 부모는 자식보다 자신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나는 더 괴로웠다. 더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게 아기를 위한 길이라고 되뇌어도 마음속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나 싶었다. 홀가분하게 살기 위해 아기를 남에게 미루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그토록 미워하던 부모처럼 말이다.
지은 언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기를 안은 지은 언니의 뒷모습에는 무거움과 가벼움이 함께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정빈이가 아기를 데리고 나가 버렸다. 도망이었다. 오후에 사무실에 내려가 보니 아기를 입양하기로 한 여자가 홀쭉한 몸으로 울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어긋남이 내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p132

- 아기는 온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은 채 내 몸속을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때 아기가 온전히 내 안에서 나만을 의지해 자라고 있고 나를 통해 세상을 보려고 한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은 나에게 속했지만 나와는 다른 새로운 생명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엄마가 뭔지 잘 모르지만 까짓것 한번 해보자는 의지가 내게 서서히 들어찼다. 모양이 있다면 작은 씨앗이 순식간에 커져 단단한 아름드리나무가 되는 모습으로.
나는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나 자신을 믿고 내가 처한 상황을 뚫고 나가기로 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한 발 한 발 디뎌 보기로 했다. 내게 엄마는 남들에게처럼 의미 있는 이가 아니었지만, 나는 이 아기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보자고 했다. 어려움이 크겠지만 살아 보겠다고 하면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미약하나마 그런 자신감이 가슴에서 불끈 솟구쳐 올랐다. 그러자 그동안의 온갖 갈등이 뒤로 물러서고 내가 불쑥 내 삶의 무대 앞으로 나와 선 느낌이 들었다. p143

- "어떤 엄마가 좋은 엄마일까?"
"글쎄...... 자식을 버리지 않는 엄마?"
나도 모르게 엄마를 떠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대부분 안 버리지. 그렇다고 좋은 엄마는 아냐. 아이 입장에서는 더 좋은 사람에게 입양 가서 크는 게 나을 수도 있잖아. 안 그래? 난 어릴 때 왜 저런 부모가 내 부모일까 얼마나 속상했는데. 차라리 프랑스나 미국 같은 데 입양 가서 좋은 부모 만났으면 불어나 영어도 저절로 잘할 거고 고생도 덜할 거고. 그런 생각 가끔했어. 부모가 너무 지긋지긋하게 마음에 안 들어서."
엄마를 닮지 않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달이가 태어나 커가면서 차라리 입양을 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좋은 엄마가 아니어서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러지 않을까? 내가 엄마를 미워한 것처럼 달이가 날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당장 내가 되어야 할 사람이 좋은 학생도 좋은 사람도 아닌 좋은 엄마라니! 멀고 낯설고 그리운 이름이었다. p196

- 엄마 노릇은 엄마 노릇일 뿐 내 삶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욕심일지라도, 조금 늦어지더라도 둘 다 잘 해내고 싶었다. 달이 엄마와 그냥 이수연의 삶 둘 다. (중략)
새삼 내 고민은 달라졌다. 어려움과 비난을 뚫고 어떻게 살아갈지, 나와 달이를 어떻게 지킬지가 중요해졌다. 그 무엇이 날 협박하려 해도 겁먹지 않을 것이다. 달이로 인해 고통만이 아니라 어떤 기운도 함께 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조금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인생길게 생각하기로 했다. p2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릿터 Littor 2018.2.3 - 10호 릿터 Littor
릿터 편집부 지음 / 민음사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8년 2/3월 호 Littor의 주제는 "커버링"
음...... 이번 주제를 통해서 '커버링'이라는 것에 대해 아마도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물론, 그 용어 자체가 낯설기도 했고.
'주류에 부합되도록 남들이 꺼려 하는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하는 것'

왜, 우리는 '남들이 꺼려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까..에 대한 생각도 다시 해보게 됐고.
조금은 공부하는 마음으로 이번호 릿터를 읽고 있다(한번 쭈욱 읽은 뒤, 다시 읽고 싶은 글들을 읽고 있는 중).

플래시 픽션에서 만난 글 중 김봉곤의 「신일」이 좋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누구보다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일명은 신일을 데리고 오버로크를 해 주러 군장점에 함께 갔던 날부터 그 애가 마음에 들었다. 잔뜩 기합이 들었지만 기죽은 가엾은 모습을 볼 때, 시간이 흘러 이야기든 먹을 것이든 꼭 나누러 오던 무구한 표정의 그 애를 볼 때, 선임병들의 자갈마당이네 쌈리네 텍사스네 용주골이네 하는 무용담에 지쳐 시선을 돌린 순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신일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일명은 무언가를 느꼈다. 그땐 그 감정을 지금처럼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어떤 감정인지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소중했다고 기억되는 어느 시절의 이야기.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떠올릴 때서야 알 수 있는 어떤 감정들. 그리고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이야기들의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나를 공부하고 싶게 만든 Issue 속 글들.
가볍게 읽으면서도, 읽으면 읽을수록 좀 더 알고 싶어져서 천천히 다시 읽고 있다.
' 다수의 정상 사회는 '우리가 이렇게까지 배려해줬는데?라며 불만을 표할지도 모르지만, 소수자에게는 커버링에 대한 압력 자체가 삶을 잠식하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커버링 요구가 일부 모임에서나 혹은 작은 집단에서만 이뤄지고 만다면(물론 그 자체로도 큰일이지만) 다행일지도 모르겠으나, 한 사회의 사법 시스템 혹은 행정부 차원에서 (소수자에게) 커버링을 강요한다면 어떻게 될까? 켄지 요시노의 지적대로 "법적 판단은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따라서 소수자가 자신의 정체성, 즉 존재 자체를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사회라면, 우리는 반드시 커버링에 대해 숙고해 봐야만 한다. '이 이상 뭐?'가 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 「커버링이란 무엇인가」유상훈, 중에서-'

릿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터뷰.
이번호 역시 좋았다. 원래 좋아하는 배우 배종옥과 소설가 최은미의 인터뷰.
인터뷰를 읽다 보면, TV에서 보는 모습과 또 다른, 소설을 통해 짐작했던 작가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다. 친근하게 옆에서 조곤조곤 수다 떠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고, 많은 작품을 하고 있는 배우의 꿈이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여전히 좋은 작품을 하고 싶고, 작품 안에서 더 각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꿈.

꿈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꿈'인 모양이다.

소설에서는 조해진 작가의 「숨결보다 뜨거운」이 좋았고,
이장욱 시인의 「독심」이 마음에 남았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여러 이야기들을 만나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일이 좋아서 자꾸 읽게 된다.
10호가 발간된 릿터.
더 오래, 아주 오래 만날 수 있기를. 갑자기 이런 바람을 갖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하는 여자들 - Dear 당신, 당신의 동료들
4인용 테이블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는 일하는 여자들은 많다. 너무 많다.
나 역시 그중 한 명이고.
그럼에도  '일하는 여자'에 대해 거기에 덧붙여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는데 '일하는 여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힘들겠다. 대단하다 같은 말이 붙어야 하는지 이따금씩, 아니 실은 자주 생각한다.

세상에는 일하는 남자들도 많다. 여자들보다 더 많겠지.
나와 같이 사는 남자 역시 그중 한 명이고.
그럼에도 그들에 대해(일하는 남자에 대해), 거기에 덧붙여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는데 '일하는 남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단하다 같은 말을 왜 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아마도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부터), 나는 '내가 해야 해'라는 생각이 유독 심했다. 같이 사는 남자와 나는 같은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부서는 다르지만), 출퇴근 거리나 업무의 강도(부서가 달라 업무가 바쁜 시기가 다르기도 하지만), 직장 상사나 직장 시스템의 문제 등등을 동일하게 겪고 있다. 그럼에도 첫아이를 낳으면서 육아 때문에 동동거리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

아이 때문이라면 휴가도 내가 냈고, 저녁에 친정에서 데려오기, 씻기기, 먹이기, 재우기 등등에 할애하는 시간이 남자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남자는 주 3일 이상 꼬박꼬박 밤 운동을 나갔고, 종종 회식에 참여했다. 잠이 부족해도, 몸이 좀 힘들어도 '엄마니까 나는'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일하는 여자'에 대한 내 정체성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한 직장에서 16년을 꼬박 일했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해서 지금까지.
그 사이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다. 나의 이십 대와 삼십 대를 오롯이 보낸 곳이다.
애정이 없을 수가. 직장뿐 아니라 내 업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경력이 쌓였다. 늘 막내이다가 점점 밑에 직원도 생겼다. 책임감도 생겼지만.... 종종 나태해졌다.

퇴근 시간이 되면,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고, 퇴근 시간 즈음 상사가 부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기도 여러 번. 새로운 일을 찾아 하고 싶지 않아졌고, 근무 시간 내에 어떻게든 업무를 끝내고 싶었다.

그러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만둬야 하는 시기인가. 잠시 방황하는 건가. 갈팡질팡.
이제 둘째까지 태어나니, 육아는 점점 더 힘들어질 테고 나는 점점 더 일에 무신경해지는 건 아닐까, 같은 걱정. 출산휴가 가 끝나고 돌아갔을 때 내가 다시 예전처럼 열심히 일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일하는 여자들』은 제목 그대로, 여러 분야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열한 명의 여자들에 관한 인터뷰집이다. 그들이 그 자리까지 가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지금도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그 길을 가고 싶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 자신들의 경험을 풀어놓은 이야기들.

나는 어쩌면, 이 책을 통해 그간 나의 나태함을 조금 반성하고 싶었나 보다.
일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높은지 그런 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 읽은 뒤에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 속의 이야기들은 여자들의 성공담을 담은 이야기도 아니고, 다만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들려주는 그냥 자신들의 이야기다.
물론 성공담을 담아야 뭔가 치열한 이야기여야 와닿는 건 아니지만, 나처럼 이미 오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에겐 아, 이런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의 공감만 형성된달까.

그 안에서의 여성차별, 성추행에 대한 경험, 이직 혹은 회사를 떠나 자신만의 일을 개척해 나가는 이야기들은 곧 사회로 나가야 할,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현재 자신의 일이 맞는 일인지 아닌지 갈팡질팡하는 새내기들에게는 꽤 도움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 책의 시작과 끝에서 책을 기획한 4인용 테이블의 멤버들이 남긴 이야기는 꽤 공감되었음을, 그 말에 동의함을 남겨놓는다. 나도 잊지 않기 위해서
 ' <일하는 여자들>을 기획할 때는 단순히 '일잘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 책을 만들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남성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분야에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 사실을 꾸준히 알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
여기도, 저기도 일하는 여성이 있다는 신호를 다른 여성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계속해서 반짝, 보내고 싶다. - 황효진'

배우 전문기자 백은하 ‘이런 시대에는 프로답게 잘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 다들 자기 자신이 재미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도 그냥 내가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내가 뭘 해야 행복한지 알면 된다. 삶을 바라보는 내 태도를 보고 후배들이 ‘저렇게 살면 되겠다‘ 정도로만 생각할 수 있다면 고맙지. (중략)
-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포기하고 막 살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는 일을 찾을 수 있는 거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각자가 잘 사는 게 중요하다. 그 어떤 인류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 나 역시도 그렇게 어떤 때보다 개인적으로, 어쩌면 이기적으로 나 하나 잘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

영화감독 윤가은 ‘자신을 믿는다면,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전하는 마음)
‘너 여자니까 이런 영화 해야 해. 이런 영화는 안 돼‘ 하는 말들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그냥 누구나 할 수 있는 ‘아무 말‘이다. 여성에 대한 시선, 가치 평가 때문에 움츠러드는 문제들은 영화를 실제로 만들기 시작하면 작아진다. 내가 창작자로 어떤 이야기를 할지 깊게 들이마시고 자신을 믿는다면, 앞으로 나아가볼 수 있는 게 영화다.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아 ‘ 본인 스스로 물어보고 결정했다면 그걸로 된다.‘
「다들 개인적으로 뭔가를 만들 때 이런 말을 많이 한다. "이걸 해도 될까요?" 본인 스스로 물어보고 결정했다면 그걸로 된다. 그 작업물 안에 어떤 대상을 혐오하거나 언어적으로 심각한 오류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걸 스스로 발견하고 제동을 걸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아티스트 양자주 ‘내가 나를 컨트롤하는 게 중요하다‘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얼마나 제대로 작업하고 있는가, 그래서 얼마나 좋은 작품을 만들고 있는가다. 그 작업을 알리는 건 꼭 기존의 미술계를 통하지 않더라도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굉장히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인스타그램만 열심히 해도 얼마든지 내 그림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고. 굳이 기존 시스템에 목매지 않았으면 한다. 남들이 닦아놓은 일률적인 길을 가는 게 예술이 아니지 않은가. 예술을 하고 싶다면, 작품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본인의 길을 닦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작가 최지은 ‘내가 먼저 했던 고민을 알려주고 싶다‘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
나는 여러모로 운이 좋은 편이었고, 지금 나보다 어린 여성들이 처한 상황이 나와 다르다는 걸 아니까 말하기가 어렵다. 다만 무엇을 선택할 때, 내가 먼저 했던 고민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려주고 싶다. ‘일이든 결혼이든 결정하기 전에는 이런 걸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 선택으로 인해 내가 잃는 것은 무엇일 수도 있다‘ 하는 부분들. 그걸 공유할 수 있다면 어떠한 시행착오든 줄지 않을까. 」

GQ 에디터 손기은 ‘ 독보적인 구성원들 사이에서 혼자 별로인 사람이고 싶지 않다‘
「다른 여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나도 똑같이 그렇게 일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하는 일이 계속 신선했으면 좋겠고, 그 신선도를 유지하고 싶다. 」

공연 연출가 이지나 ‘ 자신의 직업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 ‘월등해져라‘라는 말이 슬프고 구리지만 맞다. 정확히는 월등할 방법은 여러 가지라는 거다. 나보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은 고요한 저항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고, 나처럼 배 째라 스타일이 먹힐 때도 있다. 사람들이 나보고 성격 세다고 하지만, 어른이건 스타건 나한테 이상한 짓을 했을 때 ‘NO‘라고 말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일방적으로 부당함을 당하지 말고 저항하거나 복수하라고 말하고 싶다. 일에서의 관계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건강한 복수는 동기를 부여하며 삶의 에너지가 된다. 」

극작가 지이선 ‘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 롤 모델이나 멘토 같은 이름보다는 나는 그냥 나 자신이고 싶다.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 여성이거나 약자이면 더. 나부터가 그렇게 되어야 그런 세상이 빨리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영화 <에일리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리플리는 엄마나 선생님 같은 내 주변의 여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항해사였고 자신을 희생했고 심지어 우주선에서 고양이까지 구해 나왔다. 나에게 미래는 그 언니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현명하고 기민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감 있게 누군가를 보호하려 애쓰는 사람들. 지금도 그런 걸 꿈꾼다. 」

기자/방송인 이지혜 ‘소리 내서 말하고 지치지 않아야 한다‘
「이제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계획은 없다. 오랫동안 일하고 싶으니까 주어지는 것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할 수 있도록 생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계획은 생존이다.」

뉴프레스 공동대표 우해미 ‘아이를 사랑하지만, 나에게는 내 삶이 있다‘
「 (아이를 낳은 뒤 일한다는 것은?)
사회적 환경이나 인프라는 좋지 않다. 내 경우는 타이밍이 프리랜서가 된 다음이었기 때문에 시간 조율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 쉽지 않지만 나는 계속 일을 할 것이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언젠가 아이는 내 품을 떠날 것이고, 나에게는 내 삶이 있다. 독립 후 가장 좋은 점은 내가 일상의 균형을 스스로 맞출 수 있다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면서는 불가능했겠지. 회사 다니면서 육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힘들지 보인다. 하지만 장단점이 있다. 나는 대신 고정 수입을 포기했다. 이런 것들을 자기 성향에 맞게 결정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

N잡러 홍진아 ‘N개의 일이 서로 연결되어 내 삶을 만들어낸다‘
「지금 20대들은 선택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성의 노동 환경 역시 자기 계발을 하거나 개인적인 차원으로 해결되는 상황이 아니다. 나는 앞으로 사회가 망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형태의 일이 많아야 하고,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라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걸 개선하는 기반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반드시 정치가 아니어도 머리가 필요하다면 기획으로, 때로는 목소리로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해야 나의 환경도 나아진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노력을 하며 N잡을 해볼 계획이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에게 맞는 미니멀 라이프 - 비움에 서툰 당신을 위한 생활의 기술
아키 지음, 허영은 옮김 / 웅진리빙하우스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미니멀라이프를 잊지 않기 위해서, 조금 더 나와 맞는 미니멀라이프를 찾기 위해서 최근 들어 자주 관련 책들을 찾아 읽고 있다.

어떤 책은 미니멀라이프의 의미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하고, 어떤 책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예찬(대부분이)고, 어떤 책은 완전 실용서적에 가깝다. 그러나 대부분은 내용이나, 구성이 비슷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쓴 이들의 개인적 취향을 알게 되는 것에 그치거나, 지난번에 봤던 책이랑 비슷하네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계속 보게 된다. 이상하지. 아마도 아직 나만의(내 스스로 생각하고, 발견하는) 미니멀라이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실은, 이번에 읽은 이 책과는 크게 상관없지만(이 책이 계기가 됐을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없는(거의) 거실, 주방, 침대 등등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음, 내가 추구하는 미니멀라이프는 뭘까. 이렇게 거의 비우고 사는 건가. 아끼는 건가. 물건을 안 사는 건가. 버리는 건가' 이런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불현듯 '텅 빈' 공간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다고나 할까.

 

 이 책의 제목은 나에게 맞는 미니멀라이프》. 아마도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제목 때문에.
이 책에서 무조건 버려라, 사지 말아라, 없애라,라고 이야기 한 것도 아닌데, 다시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미니멀 라이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것은.

나에게 맞는 미니멀라이프는 뭘까.

저자는 여섯 살 아이와, 남편과 함께 15평 공간에서 살고 있다. 외국계 회사를 다니는 워킹맘.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두고 있고, 직장 맘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이 책이 좀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워킹맘들의 비슷비슷한 고민인 '시간 활용'에 대한 공감이랄까.

책의 시작에서 <아키식 미니멀 라이프의 기본>이라는 장이 있다.
죄책감 버리기
이상적인 생활을 그리면 쓸데없는 집안일이 보인다
정해진 시간만큼만 노력하기

집안일이란 게 가족의 생활을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만들기 작업인데, 그 작업이 성공하려면 그 일을 하는 주부가 미소를 잃기 않고 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이것저것 다 챙기려다 놓치는 일이 생기면 마치 주부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처럼 죄책감을 느끼게 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 그러니 과감하게 하지 않아도 되는 집안일에서는 손을 뗄 것! (죄책감 따위 느끼지 말 것!)

회사에서 근무 프로세스에 따라 일을 하듯 집안일도 하다 보면 중요한 가치를, 이상적인 결과물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직장일, 육아, 집안일 모두를 하면서 지치지 않기 위한 방법. 무리하지 않고 자신에게 허락된(자신이 허용한) 시간 내에서 해낼 수 있는 집안일하기.

이 세 가지가 저자가 추구하는 미니멀라이프의 기본이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그 기본을 바탕으로 저자가 어떻게 집안일(청소, 요리, 가계부 정리 등 모두 포함)을 해나가고 있는지 사진과 함께(저자의 집을 모델로 직접) 친절하게 보여 준다.

 

 다 읽은 뒤에도 역시, 앞서 읽은 여러 권의 미니멀라이프 책과 크게 차별화된 건 없다 싶긴 하지만...
워킹맘으로 접근했을 때 가장 공감도가 높았던 듯하다.

우선, 죄책감을 버리고 최대한 내게 허용된(내가 스트레스받지 않을 선에서) 시간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순서를 정해보자는 건, 꽤 도움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미니멀라이프'는 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물론,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분명한 건 무조건 버리고, 비워내는 건 아닌 것 같다는 것.
이제부터 조금씩 찾아가 볼 생각이다.
나만의 기준과, 내가 원하는 미니멀라이프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서가 아니라 '나에게 맞는', '나만의' 미니멀라이프를 기록해보는 게 올해 또 다른 나의 목표가 되었다.

이 책이 준 가장 큰 도움은 바로 이것!
'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혹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했던) 사람들이라면 가볍게, 부담 없이 접해보길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 왕자의 눈 + 어린 왕자 (문고판) 세트 - 전2권
저우바오쑹 지음, 최지희.김경주 옮김 / 블랙피쉬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어린 왕자를 처음 만난 건, 중학생이 막 되고 난 직후였다.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선명하게 기억 남는 건,
보아 구렁이.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 구렁이.

책 속에서 그 장면을 읽었을 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어린 왕자를 떠올리면 그 모자가 같이 떠오른다.
그리고 한동안 연습장에, 책 사이사이에 그 그림을 따라 그렸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어린 왕자 사랑이 시작되었다.

 

 이 책 <어린 왕자의 눈>을 읽으면서 내가 왜 그 그림을, 그 장면 좋아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 아마 그때 나는 '어른'들 때문에 꽤 쉽지 않은 시기를 보내고 있던 시기였는데 어린 왕자 속 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겠어' 생각했던 것 같다(이건 물론 지금 짐작해 보는 것).  이 책에서 이야기해주는 '동심'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있는 중.

 

 「어린 왕자의  저자 저우바우쑹이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 왕자》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쓴 이다. 저자는 문학을 사랑하고 교육에 관심이 많은 정치철학자.

「2014년 9월 홍콩에서 우산혁명이 일어났을 때, 수십만 명의 홍콩인과 함께 거리로 나가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했고, 자진해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몸과 마음이 지친 나는 2015년 가을부터 반년 동안 방문학자로 대만에 갔다. 대만에서 지내는 동안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는데, 이때 다시 《어린 왕자》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p5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마 저자도 어린 시절부터 《어린 왕자》를 무척 좋아했을 터. 마음이 힘들 때, 위로받고 싶은 때, 쉬고 싶을 때 다시 만나게 된 어린 왕자를 통해 아마 저자는 철학자 다운 깨달음을 새롭게 얻어낸 듯하다. 그리고 그걸 힘든 시대를 힘겹게 건너가고 있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툭, 세상에 한 권의 책으로 던져 놓았다.

총 열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 속에는 각 장마다, 《어린 왕자》 속 한 장면을 통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얻어낼 수 있는 인생의 지혜를, 위로를,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철학자의 눈으로 다시 한 번 풀어내 이야기해 준다.

'꿈, 동심, 첫사랑, 길들여짐, 책임감, 친구, 고독, 선택, 행복, 이해, 아름다움' 같은 것들에 대해 어린 왕자의 눈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도, 작지도 않다.

 

 《어린 왕자》이야기 중에서 좋아하는 또 다른 부분은 바로 '길들여진다'라는 내용이 나오는 부분.
책 속에는 열다섯 장의 첫 장이 시작될 때마다, 읽는 이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을 하나씩 던진다.
'어린 왕자는 어떻게 장미와 여우, 그리고 조종사까지 그토록 쉽게 길들이고 그들 하나하나와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을까?'

「길들여짐은 절대로 일방적이거나 절대적으로 어느 한쪽의 결정에 따른 행위가 아니다.(중략)
중요한 건 일단 관계가 시작되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가 아니라 서로 어우러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된다. 왜냐하면 길들여짐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이 발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주체성도 존중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p83」

어린 왕자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교감하고, 길들일 수 있었던 건,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의 전제는 내가 '나'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 물론 이건 꼭 어린 왕자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론적으로 어쩌면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잊고 지낸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면서 사랑받기를 원하기도 하고,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쉽게 자존감에 상처입지는 않았는지. 연인 간에도 부부간에도 말이지.

이 책은, 알고 있지만 잊고 있었던 것들. 알고 있지만 쉽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아, 그랬지. 그랬어.'하고 생각해 보게 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내 옆의 가장 가까운 이들을 함께 두고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게 해 준다.

 

 

 어린 왕자는 말한다. 길들여진다는 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결국, 작은 단위의 가족부터 시작해서 친구, 직장, 사회로 나가 우리가 가장 많이 신경 쓰고, 상처받으면서 해 나가고 있는 게 바로 관계 맺기가 아닌가.
어떻게 하면 그 관계들을 조금 더 평등하고 평화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저자는 '제도'가 달라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제도는 결국 '우리가' 바꿔 나야가 한다.
권력의 간섭 따위 걱정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신경 쓰지 않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걱정하지 않는 공정한 사회.

이 책을 읽으면서 책장에 꽂혀 있던 《어린 왕자》책들을 다시 꺼내 보았다.
90년에 산 책도 있고, 99년에 대학에 들어가면서 다시 구입한 책도 있다. 일본어로 된 책을 사기도 했고 최근엔 컬러링북으로 발간된 어린 왕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어린 왕자》를 읽는다.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작은 판형의 어린 왕자로.
잊고 지냈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이다. 그런데도, 어제 만났다 헤어진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 않은 느낌. 반갑고 또 반갑다.
혹시 이 책(어린 왕자의 눈)을 읽는다면, 《어린 왕자》를 꼭 같이 읽어보시길. 반가움이 두 배가 될 테니.

말을 멈춘 여우는 한참 동안 어린 왕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부탁이니 날 길들여 줄래?"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는 걸. 난 친구들을 찾아야만 하고 아라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어린 왕자가 대답했다.
"누구든 자신이 길들이는 것 외에는 알 수 없는 거야. 사람들은 이제 무얼 알아 갈 시간도 없이 살지. 그들은 상점에서 다 만들어진 걸 사니까.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는 거야. 친구를 원한다면, 날 길들이면 돼."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어린 왕자가 물었다.
"인내심을 가져야 해. 우선 나한테 좀 멀리 떨어져서 아까처럼 풀밭에 앉아 있어. 내가 곁눈질로 널 볼테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말이란 오해의 씨앗이니까. 하지만 매일 조금씩 더 가까이 내 쪽으로 다가와 앉아야 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