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달, 블루문 창비청소년문학 81
신운선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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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다.
'내게는 없을 것 같던 이름, 엄마'
책 표지에 둘러진 띠지에 적힌 한 문장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었지만, 그래서 이 책을 선뜻 읽어야겠다 골라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놀라게 할 줄은 몰랐다.

내게 이수연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만 같다.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 이십 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였다.
'엄마'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될 수 있겠구나, 짐작하는 것과 엄마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일이니까.

순진했나,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억에 남는 성교육을 받아 본 기억도 없고,
주변의 아이들 중에 남자 친구와 잠을 같이 잤다고 말하는 아이를 본 기억도 없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그냥,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시대가 변했다. 통계조사를 통해 첫 경험 나이가 열셋이라는 기사를 봤을 때, 놀라움과 함께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말도 안 돼. 내 첫 반응.
나도 어느새 그렇고 그런 어른이 된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어 버린 기사였다.

요즘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교육이 아니라 정확한 피임법을 알려주는 교육이라는걸,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키고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걸 여러 책을 통해, 매체를 통해 알게 되면서 아직 어린 딸에게 언제부터 그런 교육을 시켜야 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달, 블루문>>에 등장하는 수연은
엄마에게 버림받았던 기억, 아빠에게 버림받았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빠와 살던 초등학생 때 아빠는 수연을 이모 집 앞에 데려다주고 떠났다. 이쁘고 잘 사는 엄마에게 데려다줄 거라는 말과 함께.
수연의 기대와는 다르게 엄마는 수연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곤 다시 수연을 아빠에게 돌려보냈다.

흔히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엉터리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과거에 해결하지 못한 감정들은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도망치고 싶은 기억일수록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의식 어디엔가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는 법이니까. 아홉 살 때 내가 겪은 일이 그렇다. p10

아홉 살,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아야 할 나이. 어리광을 피우고 아이답게 자라야 할 나이에 수연은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다. 어른들의 세계를 알아버렸다.
엄마에게서 다시 아빠에게로 돌려보내진 뒤, 수연은 아빠와도 더 이상 전처럼 어리광도 피우고, 웃기도 하던 관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절대로 아빠처럼은 살지 않을 거였다. 아빠처럼 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멋진 연인을 만나 남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사는 것. 별거나 이혼, 병이나 실직, 예상하지 못한 불운 등을 겪지 않고 사는 것. 그게 내 계획이었다. 계획은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어긋난 것 같았지만, 사는 게 내 뜻대로 안 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 삶의 계획을 포기할 수 없었다. p68

고3 졸업을 앞두고 수연은 자신이 임신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열여덟 살에 임신한 소녀가 세상을 대하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대하는 담담한 태도가 아닐까.
세상이 가진 편견 중, 불우한 가정환경에 처한 십 대들의 일탈도 있지 않을까. '엄마 아빠가 이혼한 애들이 그렇지 뭐. 십 대에 임신했으면 애가 뻔하지 뭐. ' 등등의 시선들.
이 소설 속 아이들은, 어리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에 대해, 친구에 대해, 사람에 대해 자신들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른들이 놀랄만한 아이들, 배워야 할 아이들. 이 소설의 매력은 거기서 극대화되는 듯하다.
수연은, 아이 아빠인 남자친구를 좋아했다. 남자친구 역시 수연을 좋아했고. 그들은 서툴렀지만 그들의 방식대로 좋아했고, 임신을 안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두려워했다.

수연은 스스로 미혼모가 쉴 수 있도록 마련된 '사랑아이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보살핌을 받고, 아이를 낳고 입양을 보낼 생각이었다. 아니, 그냥 그래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배가 점점 불러오고, 함께 시설에서 지내던 아이들이 출산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연은 아이를 낳기로 마음먹었다.

두려웠을거다. 무서웠을거다.
이야기는 이제 아이를 낳아 직접 기르기로 마음먹은 수연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리고 펼쳐지지 않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떠올려보게 한다.

기나긴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할 거다.
어쩌면, 예상치 못한 불우한 일들이 닥칠 수도 있고, 세상의 편견과 끊임없이 맞서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절대, 포기하거나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이제는 어른들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그 아이들까지 보듬어 줄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될 기회를 스스로 놓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청소년과 어른들이 함께 읽어야 할 책이다. 어쩌면 어른들이 더 많이 읽어야 할 책이다.

- 아기를 나보다 더 좋은 부모에게 입양 보내는 게 인생의 걸림돌을 해결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식을 버리고 싶은 부모가 없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어떤 부모는 자식보다 자신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나는 더 괴로웠다. 더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게 아기를 위한 길이라고 되뇌어도 마음속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나 싶었다. 홀가분하게 살기 위해 아기를 남에게 미루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그토록 미워하던 부모처럼 말이다.
지은 언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기를 안은 지은 언니의 뒷모습에는 무거움과 가벼움이 함께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정빈이가 아기를 데리고 나가 버렸다. 도망이었다. 오후에 사무실에 내려가 보니 아기를 입양하기로 한 여자가 홀쭉한 몸으로 울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어긋남이 내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p132

- 아기는 온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은 채 내 몸속을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때 아기가 온전히 내 안에서 나만을 의지해 자라고 있고 나를 통해 세상을 보려고 한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은 나에게 속했지만 나와는 다른 새로운 생명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엄마가 뭔지 잘 모르지만 까짓것 한번 해보자는 의지가 내게 서서히 들어찼다. 모양이 있다면 작은 씨앗이 순식간에 커져 단단한 아름드리나무가 되는 모습으로.
나는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나 자신을 믿고 내가 처한 상황을 뚫고 나가기로 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한 발 한 발 디뎌 보기로 했다. 내게 엄마는 남들에게처럼 의미 있는 이가 아니었지만, 나는 이 아기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보자고 했다. 어려움이 크겠지만 살아 보겠다고 하면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미약하나마 그런 자신감이 가슴에서 불끈 솟구쳐 올랐다. 그러자 그동안의 온갖 갈등이 뒤로 물러서고 내가 불쑥 내 삶의 무대 앞으로 나와 선 느낌이 들었다. p143

- "어떤 엄마가 좋은 엄마일까?"
"글쎄...... 자식을 버리지 않는 엄마?"
나도 모르게 엄마를 떠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대부분 안 버리지. 그렇다고 좋은 엄마는 아냐. 아이 입장에서는 더 좋은 사람에게 입양 가서 크는 게 나을 수도 있잖아. 안 그래? 난 어릴 때 왜 저런 부모가 내 부모일까 얼마나 속상했는데. 차라리 프랑스나 미국 같은 데 입양 가서 좋은 부모 만났으면 불어나 영어도 저절로 잘할 거고 고생도 덜할 거고. 그런 생각 가끔했어. 부모가 너무 지긋지긋하게 마음에 안 들어서."
엄마를 닮지 않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달이가 태어나 커가면서 차라리 입양을 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좋은 엄마가 아니어서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러지 않을까? 내가 엄마를 미워한 것처럼 달이가 날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당장 내가 되어야 할 사람이 좋은 학생도 좋은 사람도 아닌 좋은 엄마라니! 멀고 낯설고 그리운 이름이었다. p196

- 엄마 노릇은 엄마 노릇일 뿐 내 삶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욕심일지라도, 조금 늦어지더라도 둘 다 잘 해내고 싶었다. 달이 엄마와 그냥 이수연의 삶 둘 다. (중략)
새삼 내 고민은 달라졌다. 어려움과 비난을 뚫고 어떻게 살아갈지, 나와 달이를 어떻게 지킬지가 중요해졌다. 그 무엇이 날 협박하려 해도 겁먹지 않을 것이다. 달이로 인해 고통만이 아니라 어떤 기운도 함께 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조금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인생길게 생각하기로 했다.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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