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인주의자의 결혼생활
이정섭 지음 / 허밍버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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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엔 세상이 말하는 관습적인 역할을 내려놓고 지속 가능한 대안을 찾은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상적으로 각방을 쓰고, 집밥은 간단히 먹으며, 아이 없이 지내면서, 나 홀로 여행을 떠나는 우리의 생활은 티브이에 나오는 '보통의 결혼생활'과는 거리가 있다. 일견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삶이기에 지치지 않을 수 있었고, 지치지 않았기에 그 에너지로 서로를 더욱 아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p8'

비혼이 늘고, 결혼의 형태가 달라지고 있는 요즘 무조건 '결혼을 하지 않겠어!' 보다 좋은 사람과 같이 사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나의 삶도 잘 살아낼 수 있는 긍정적인 형태의 결혼 가정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했다.

 

여기에, '임신과 출산, 육아'가 갈등의 문제로 끼어들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가능할 수도 있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단언하건대, '부부'만의 가족과 '아이가 있는 가족'의 삶은 너무나도 다르다.

아무리 둘 사이가 좋아도, 아이와 양육이 끼어드는 순간 그 결혼 생활은 부부가 생각하는 결혼 생활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역시, 아이를 낳고 안 낳고의 문제도 각가의 선택이니 정답은 없겠다)

이 책 속의 이야기는 '우리 부부는 이렇게 삽니다'쯤 되겠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잘 삽니다' 로도 읽힐 수 있겠다. 그게 정답입니다! 가 아니라 이렇게 사는 부부도 있습니다,로 읽혀서 부담스럽지 않았고, 이렇게 사는 부부들이 있구나, 알게 돼서 신선했다.

만약, 결혼을 고민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은 커플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듯하다.

결혼 전엔 막연히 두려워지니까. '아, 나는 도저히 둘이 늘 함께 하는 건 자신 없는데. ' '누가 내 생활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참을 수 없는데.' 같은 고민을 하게 될 테지만 그걸 어떻게 풀어 나갈 수 있을지 떠오르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면서 함께 할 땐 즐겁게! 가 가능하다는 희망 하나로도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아 지겨워. 어떻게 이렇게 평생을 사냐' 싶은 권태기가 올 듯 말 듯 한 부부라면, 적정한 거리 두기를 어떻게 하지 헤매는 부부라면 이런 방법도 있겠구나 생각해 볼 수도 있겠고.

결혼 10년 차쯤 되니, '부부가 성격차이'로 이혼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것도 같다.

이혼 사유가 무조건 성격 차이래, 쉽게 사람들은 말하지만 결혼 생활을 해보니 부부 사이에 성격이 맞지 않는 것만큼 함께 하기 괴로운 일이 없겠다 싶기도 했다. 맞춰 산다는 건 누군가 양보하고 배려한다는 것인데 그것도 쌓이면 늘 배려한 사람이 나가떨어질 확률이 높으니까.

독립성과 사랑 중에 뭐가 먼저냐 묻는다면, 그 둘은 서로를 가능하게 해 주는 보완 요소라고 답하겠다. 사랑하기에 상대가 나와 별개로 누리려는 일상을 인정할 수 있고, 나 자신의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기에 깊은 사랑을 키워갈 여유가 생긴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는진 모르겠다. 만약에 결혼 후 지나친 속박이 두려워 누구와도 함께 살기를 꺼리는 사람이 있다면 비슷한 사람을 만나 보시도록. 존재합니다, 분명히.

- <누구랑 함께 살지 못할 사람> 중에서, p25

우리 부부는 취미도, 성향도 정말 다른데 딱 한 가지 맞는 게 있다면 '개인주의적' 성향이다.

서로의 시간과 공간 취미를 존중하기. (왜? 내가 간섭받기 싫으니까 상대에게도 간섭하지 않는 거다). 이게 부부 사이에 너무 정 없는 거 아냐? 생각하기 시작하면 또 끝이 없다. 행복한 부부 사이, 이런 건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살아보니 '내'가 그리 불행하지 않으면 그걸로 나쁘지 않은 결혼 생활 같기도 하다.

상대의 감정에 너무 치우치면 '나'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고, '나'의 감정에만 너무 매몰되다 보면 상대방의 감정은 의도치 않게 무시하게 될 수도 있다. 결혼 생활에, 부부 관계에 너무 큰 의미 부여를 하지 말자.

결혼한 지 10년이 넘으면서 알게 된 건 어느 부부든 마음속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주의 생명체 고양이가 그렇듯 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다가 문득 외로워지면 서로를 찾아 찰싹 붙어 온기를 나누며 행복해한다. 꾹꾹이를 할지도 모른다. 고양이 주인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방금까지 몸을 부비던 고양이가 갑자기 가 버린다고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이내 다시 찾아올 테니.

- <우리 부부는 각방을 쓴다> 중에서, p88

이 문장이 꽤 공감 됐는데, 우리 부부가 각방을 쓰면서도 나쁘지 않은 지점을 잘 표현해 준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작가가 글에서 이야기하는 '따로 또 같이'의 의미가 잘 함축된 느낌 들기도 했고.

결혼 생활은 결국 케이스 바이 케이스. 결혼은 으레 이러이러하다는 일반론이 통하지 않는다. 예측 불가능한 존재인 인간 둘이 만나 이루는 결혼이란 우주가 그리 단순할 리 없다. 남들의 기준에 휘둘리지만 않으면, 뒤집어 말해 부부가 자기들의 기준으로 결혼 생활을 꾸려 나가면 거기에 일반론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둘의 의지와 노력만 남는 셈이다. - <좋은 소식은 없지만 매우 좋습니다> 중에서 - P116

인간이란 완벽하지 못하기에 결혼한 부부 모두 각자 비뚤어지는 순간이 있다. 아내는 일상적으로 자잘하게 비뚤어지고, 난 가끔 크게 비뚤어진다. 그럼에도 우리 부부가 큰 갈등이 없는 것은 아내 덕이다. 비뚤어지는 순간에 격차를 두어 최악의 순간엔 보듬어 주고, 나머지는 모두 실리를 추구한다. 진짜 거울은 아니지만, 놀라운 이해심으로 나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돌아보게 한다. - <작지만 밉지 않은 우김> 중에서 - P146

마음 깊은 곳에선 알고 있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노후의 삶은 우울해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어느 날부터 모든 게 조금씩 안 좋아지기 시작할 것이다. 감기에 걸렸는데 이상하게 잘 낫지 않을 것이고, 친한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질 것이다. (중략) 그래서 노후를 위해 또 한가지 준비할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일상을 즐기는 습관이다. 미래를 보지 못하고(않고), 눈앞에 닥친 일만 중요하게 여기는 무식함(현명함)이다. 알랭 드 보통은 저서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인간이 가진 근시안을 칭찬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생활의 지혜일지 모른다. 현자들이 가르친 대로 죽음에 대비하라는 것은 죽음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 줄 것이다." "우리를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 줄 것이다."
- P176

. 세상에 고유한 개인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 결합해 바뀌며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맞추질지 모른다. 그리고 그 바뀐 자리에 더 이상 자신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상대방의 행동 중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관계에 해를 끼는 일이 아니라면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해야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상대방 역시 나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인정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닌 두 사람의 공존이다. - <개인주의적 결혼생활> 중에서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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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미 - 누군가를 만날 줄 몰랐던 여름, 베를린
이동미 지음 / 모비딕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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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이런 고백이 그리 부끄럽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좀 부끄럽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

"나는 신혼여행 말고 해외여행 가본 적이 없어."

예전엔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이 부럽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런 사람이 부럽다.

그냥, 짧은 여행 말고

한 도시에서 오래 머물면서 낯선 곳에서의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

이 책 『동미』의 표지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책 제목도 그랬지만

사진 속, 폴짝 뛰어오른 여자의 모습이, 옆모습이지만 활짝 웃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코로나 시대,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물론 나의 경우 대부분 떠날 수 있어도 떠나지 않았지만) 요즘이라서 그랬을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사춘기 아이 마음처럼 '진짜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같다.

'동미는 자유롭다. 그의 인생엔 걸림돌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일, 연애, 결혼, 돈, 그 어떤 삶의 루틴 앞에서도 동미는 기죽지 않고 살았다. - 저자 소개 중'

일, 결혼, 돈 그 어떤 삶의 루틴 앞에 번번이 무너지는(지고 마는) 나로서는 '와, 부럽다' 하는 마음이 드는 게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그래, 나는 이미 졌다.'

그러니 실컷 대리만족이라도.

누군가의 자유로운 삶을 염탐하듯 기웃거리며 부러워라도, 상상이라도 징하게 해보자 마음먹었다.

'베를린'을 사랑했던 여자.

처음 베를린에 갔던 13년 전, 첫 만남에 베를린에 짝사랑에 빠진 여자.

한국으로 돌아와 이듬해(2008년) 결국 '다시 베를린'이라는 책을 출간한 여자.

2014년 다시 찾은 베를린에서 뭔지 모를 쓸쓸함을 감지하고 돌아왔지만,

프리랜서 여행작가로 살겠다는 확신에 회사로 돌아가야 하나 하는 고민을 접었다.

친구와 경리단에 작은 바를 차렸으나 친구는 바를 차린지 1년도 안 돼서 결혼을 하고 베를린으로 떠났다.

친구가 있는 베를린으로 여행을 떠난 게 일 년 전.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남자(사랑)을 만나 연애를 하게 되고, 동거를 시작했다.

이 책은, 처음엔 베를린 여행기로 기획되었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면서 예정에도 없던 로맨스를 쓰게 된 여행 작가의 에세이다.

원래 쓰려던 여행기를 접고, 부끄럽지만 소소한 사랑 이야기를 썼다. 뒤늦게 만난 중년의 연애 이야기가 뭐 대단한 게 있을까마는, 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싱글로 살던 한 여자의 또 다른 삶의 과정으로 읽어주면 좋겠다. 한 남자가 아니라 한 사람과 깊이 교감하며 연애와 삶에서 새로 알게 된 것과 느낀 것들, 즐거운 한때를 기록한 이야기라고 이해해 주면 좋겠다.

- 프롤로그 중에서, p8

누군가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재밌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연애 세포는 다 죽었는지 잘 생긴 남자를 봐도 '저 남자라고 집에 있는 남자랑 뭐 다르겠어.' 하는 마음이 드는 10년 차 아줌마에게도

간혹 슬쩍슬쩍 들리는 남의 연애 이야기엔 귀가 쫑긋하더란 말이지.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다.

작가가 말한 '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한 여자의 또 다른 삶의 과정'이라는 걸.

낯선 나라에서, 낯선 방식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어가는 일 자체가 뻔하지 않다.

그 뻔하지 않은 상황에 기대 글이 별로였다면 '아, 그랬구나.'하고 그만이었겠지만

여행기로서도, 에세이로서도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물론, 내 취향에 맞았으니까 그랬을 거다.)

베를린에 도착해 제일 먼저 (친구의 권유로) 데이팅 앱 '틴더'를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의 남자와 그렇고 그런 만남을 거쳐 '스벤'이라는 특별한 남자를 만났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모든 사람을 특별해지니까.

이 책 속의 이야기는 작가와 스벤의 사랑 이야기이면서 작가가 한 남자를 만나 (베를린에서) 어떻게 살게 되고,

어떤 마음의 변화를 거치게 되는지 자연스럽게 들려준다.

(외국에서의 생활이 어떨지 상상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데이팅 앱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렇게 쉬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베를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커플이 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했다.)

난 우는 게 창피하지 않아. 그래서 눈물도 금방 나. 혼자 있을 땐 오히려 안 울지만, 내가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 앞에선 금방 울 수 있어. 동양에서는 남자가 우는 일이 흔하지 않고 터부시된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남자건 여자건 감정을 내보이고 우는 건 절대 창피한 일이 아니야. 오히려 그걸 참고 숨기는 게 문제지. 참고 참았다가 나중에 화병이 되거나 폭력적으로 되는 게 더 나쁜 거야. 참으면 더 큰 병이 돼. 나도 한동안 불안장애를 앓았지만, 지금은 사람들에게 숨기지 않고 얘기해. 그건 절대 창피한 일이 아니니까.

- <그가 처음 울던 날> 중에서, p56

불안 장애를 앓았던, 눈물이 많은, 외국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마 작가 역시 틴더를 깔고, 남자를 만났지만 진짜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남자를 만날 기대를 한 건 아니었을 거다.

둘의 사랑은 낯섦과 불안과 (한국과 베를린의 거리만큼) 언젠가 한 번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애달픔과 그럼에도 달달함이 합쳐진

특별하게 포장될 수 있는 '사랑'처럼 보였다. 처음엔.

글을 읽을수록, 둘의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사랑은 결국 '포장'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사랑'이구나 싶어졌다.

"불안해서 그래. 불안하니까 너한테 계속 확인받으려는 거야. 네가 날 좋아한다는걸, 나랑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걸 자꾸 말로 들어야 안심이 돼. 왜 불안하냐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야. 나의 불안이 그냥 감기처럼 찾아오는 거야."

그가 불안해할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걸 알았다. (중략)

나 또한 스벤을 만나기 전, 냉소적이며,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고, 우울한 마음이 한 편에 있었다. 그 우울함은 사실 <타임아웃 서울> 매체를 그만둔 이후부터 조금씩 생겼다. 온 애정을 쏟아부어 만든 매체를 예상치 못한, 심지어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접어야 했던 것이 내게는 큰 상처와 우울이 됐다. 그런데 애써 괜찮은 척, 밝은 척하며 지냈다. 곧 괜찮아질 거라고 방치했다. 여름마다 베를린으로 온 건, 사실 일종의 도피였다. 어디로든 서울이 아닌 곳으로 떠나고 싶었고, 베를린에 오면 그나마 잠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중략)

"날 떠나지 않을 거지? 계속 나랑 같이 있을 거지?"

오늘도 그가 똑같은 불안의 질문을 한다. 이제는 애 또 묻냐고 되묻는 대신,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몇 번이고 속삭여준다.

"응, 난 너랑 같이 있을 거야. 널 떠나지 않을 거야. 너도 내 옆에 있어줄 거지?"

내가 듣고 싶은 말. 그 말을 아끼지 않고 스벤에게 한다.

- <나의 불안이 감기처럼 찾아온 것뿐이야> 중에서, p77

 

 

언젠가(정말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내게도 그런 시간이 찾아온다면 몇 개월 살아보고 싶은 곳이 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그랬고,

최근 1,2년 사이에는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내게 그렇다.

작가가 현실 도피처럼 선택했던(찾아갔던)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 또 다른 삶의 방향을 찾아내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낯선 곳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게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그 여행에 지금의 짝꿍이 동행을 하게 될지, 아이들이 함께 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되도록이면 혼자, '나'로 떠나는 여행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지고 있다.

'사랑' 이야기에 (빠져서) 여행기로서의 책 이야기를 놓친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들지만,

그건 다시 이 책을 읽게 될 또 다른 독자들의 재미로 남겨둬야겠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를 챙겨 마음에 담고 이 책을 책꽂이에 이쁘게 꽂아 두기로 했다.

언제가 내가 여행을 위한 가방을 싸게 될 때, 다시 이 책을 꺼낼 수 있으면 좋겠다(여행을 떠나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마음에 챙겨 담은 한 가지는 이거다.

'나이가 들수록 유연한 삶의 자세를 잊지 말자는 것'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의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으니

지금 내 삶을 불행이나, 행복으로 평가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으로 여기면서

일어날 수 있는 많은 가능성들에게 너무 눈치 주거나, 거리를 두지 말자는 것.

나도 베를린에서 살고 싶은 때가 있었다. 뭘 해도 자유롭고 새로운 것 투성이인 이 쿨한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걸 훌훌 털고 오기엔 용기가 없었다. 30대 중반이란 나이도 그땐 늦었다고 생각했다. 여행 기사 쓴답시고 자주 외국을 다닌 것도 다른 도시에 살고 싶은 갈망을 줄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내 집 있는 서울이 좋았다. 외국에 나가면 나갈수록 서울만큼 살기 편한 도시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내 영혼의 한식이 있는 서울을 굳이 떠날 이유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나가면 고생'이란 생각만 늘고, 도전정신은 안일함, 귀찮음과 자주 맞바꿔 먹었다.

이런 내가 다 늦게, 갑자기, 베를린에서 살게 됐다. 거창한 계획도 없이, 베를린에서 만난 남자 하나 믿고 옮겨와 살고 있다. 온갖 애정으로 사들인 서울의 살림살이며, 친구며, 가족을 다 서울에 두고 왔다. 베를린에서 뭐해 먹고 사나 하는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서울이든 베를린이든 어디서나 하는 것. 프리랜서 작가로 오래 살았고, 한 직장에 매인 몸도 아니어서 결정하기가 쉬운 것도 있었다. 하지만 베를린에 훌쩍 오게 된 건 뭐랄까, 나이가 들수록 삶이 유연해졌달까. 아니면 만만해졌달까.

- <베를린으로 오는 건 평생의 꿈이었어> 중에서,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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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나와 당신을 돌보는 글쓰기 수업
홍승은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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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를 규정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생각하다가 '나'를 똑 부러지게 설명할 혹은 표현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조금 침울해지기도 한다.

엄마, 직장인, 딸, 며느리 같은 거 말고,

진짜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게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때론 누군가에게 와~ 하는 시선을 받는 그런 표현이면 좋겠다 싶어질 때 잠시 멈칫한다.

그건, 진짜 '나'인가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러니까 여전히 갈팡질팡.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글을 쓸 때마다 주위 환경이 재배치되었다. 이혼이 불행한 게 아니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견고한 사회가 불행하다는 것, 여자의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 성별 이분법과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면했던 나의 입체적인 면도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학교 밖 청소년이었기에 일찍이 제도권 밖에서 살아갈 다양한 방식을 모색할 수 있었고 정상 궤도를 이탈했기에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을 기를 수 있었다. 나는 이혼한 집 딸, 전문대 출신,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라는 몇 가지 단어로 간편하게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밀크티와 공포영화, 비 오는 날, 동물, 따뜻한 대화,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뭔가 이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주 우울하고, 주기적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무엇이었다. 쓰는 과정을 통해 나는 배웠다. 사람은 몇 가지 키워드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존재라는 사실을. - <"승은 씨에게 쓰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중에서.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대학에 입학해 다시 처음부터 소설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을 때

'나'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했다. 모든 글은 '나'로부터 시작된 다는 것.

그 이후 쓰게 된 나의 소설들은 대부분 어둡고, 누군가 부재하고, 떠나거나 상처받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은 그냥 개인적인 서사로만 남았다. 늘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생각과, 나의 언어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타인의 모습으로 둔갑시켜 표현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타인을 떠나 표현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여러 가지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런 작은 깨달음들은 결국 나를 '소설'에서는 조금 멀어지게 했으나

또 다른 글쓰기를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독서란 책을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한 사람의 시선과 삶의 단편을 기록한 책을 통과할 때마다 나는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지난 시간이 재배치되었고, 상처를 응시할 수 있었고, 외면했던 감각을 믿게 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관념의 집약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재하는 공간이다.

나에게 '읽다'라는 '경험하다'와 같은 말이었다. 내가 마련한 이 책이 당신에게 작은 자유를 선물하는 하나의 경험이 되길 바란다. 함께 쓰고 읽는 시간을 기록한 이 공간이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도 안전한 그곳이길 바란다. 이제 내 글의 마침표를 열고,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시간이다. -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중에서.

 

'읽는'다는 것과 '쓴 다는 것'

일상을 매일 살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된 두 행위는 때론 아주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쌓였을 때 느껴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정들을 경험하게 한다.

읽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아가고, 당신의 아픔을, 당신의 공간과 시간을 이해한다.

쓰는 행위를 통해 당신을 통해 알게 될 것들을 다시 '나'에게 대입시켜보면서 진짜 '나'와 마주한다.

때론 그것들은 아픈 상처를, 과거를 떠올려야 하는 힘든 일이 되기도 하고,

즐거운 일을 더 즐겁게 추억하게 되는 신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분명한 건 '읽는' 일과 '쓰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해 가다 보면 누군가를, 사회를, 나를 한 가지의 시선으로 편협하게 바라보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진다는 것. 불편한 일에 대해, 불편한 사회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덜 두려워진다는 것.

이건 내가 경험한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2년 전, 저자의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를 읽었을 때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동안 내가 가진 사회적 편견과,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고,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생각을, 가치를, 편견을 툭, 건드릴 수 있다는 일이, 그런 말을 두려움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저자가 부러웠다.

 

2년의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 저자의 책을 다시 만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 내 이야기가 선정적이고 비현실적으로 여겨질까 두려울 정도로 나는 많은 시간 동안 흔들리고 상처받았다. 그렇지만 나의 나약함을 말하고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었기에 아파도 불행하지 않았다. 상처는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때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고 했던가. 덧붙여, 상처는 연결될 때 더 이상 상처로만 머물지 않는다. 목소리가 목소리를 부른다. 내 글을 통해 나라는 타인이 당신에게 전달되길 바라고, 당신의 이야기도 말해지고 들리길 바란다. 그 과정은 분명 불편한 일이겠지만, 우리를 자유롭게 할 거라고 믿는다. 나는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다. 그래서 함께 자유로우면 좋겠다.' -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저자의 말 중에서

불편한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함께 살아가는 일.

이제 그 목소리들을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들려달라고, 그래서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로워 지자고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짧은 시간이 참 소중했다.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하는 힘, 살아가는 힘,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 말할 수 있는 용기, 혼자 숨어 힘든 상황을 견디어 낸 이들에게 보내는 다정한 위로였다면

이번 책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는 어떻게 하면 함께 읽고, 쓰는 일을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지,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얼마나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함께 해보자고 손 내밀어 준다.

"도대체 글을 쓰는 게 무슨 소용이죠? 이렇게 쓴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글을 쓸 때마다 자주 D의 질문을 떠올렸다. 쓰는 일의 의미는 뭘까. 우리가 쓰는 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글이 견고한 세계에 티끌만큼의 흠집이라도 낼 수 있을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질문 앞에서 내가 내놓은 대답은 매번 초라하게 느껴졌다.

- <기꺼이 슬픔에 잠기는 사람들 : 타인에게 상처받고 영향받기> 중에서.

D의 말은 맞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다고 세상이 갑자기 아름답게 바뀔 리 없다.

불편한 일은 여전히 불편한 채로, 잘못된 일은 여전히 잘못된 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쓴다. 그리고 나는 쓰고 싶어 한다.

저자의 말처럼, 함께 글을 쓰는 일을 통해 타인의 슬픔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나의 슬픔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글을 쓸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말이 주는 힘만큼이나 글이 주는 힘이 크다는 걸 나는 믿는다.

불편한 생각들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글을 읽을 때면 언제부턴가 괜히 고마워진다.

견고한 세계에 티끌만큼의 흠집, 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흠집을 내려고 노력했던 우리는 달라질 수 있다고도 믿는다.

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점이 나는 두렵다. 혼자 쓰고 읽는 일기와는 다르게 타인에게 읽히면 내 한계가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감 없이 드러나는 내 인식의 한계를 접할 때마다 멈칫하고, 내가 쉽게 타인의 고통을 글의 기폭제로 이용할까 봐 긴장한다. 때로 글은 삶을 쉽게 왜곡하고, 비틀고, 조롱하니까.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한계를 폭로하고 해체하는 글쓰기는 가능할까. (중략)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지녀야 할 태도를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는 내 위치의 한계 알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기.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고통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쓸 수 없는 말을 쓰기. -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걸 : 멈칫하는 태도가 필요한 순간> 중에서.

만약 내가, '읽는'일을 하지 않았다면,

'쓰는'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쉽게 이해한다고 적었을 것이다.

이해해요.라는 말이 때론 얼마나 이기적인 말인지, 때론 얼마나 가벼운 말인지 이제는 안다.

우리가 쉽게 내뱉는 타인을 향한 평가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도 읽고 쓰는 일을 통해 배웠다.

저자의 글 속에서 나는 다시 '읽고'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로부터 시작된 글쓰기가, 우리를 어떻게 연결해 주는지 생각한다.

그 연결됨을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넓은 세계로, 또 다른 인식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다.

생각 없이 쓰는 언어가 실재하는 존재를 어떻게 지우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쉽게 말을 뱉지 않는다. 나는 이런 태도가 글을 쓸 때도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게 보면 문자 언어도 일부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지만, 적어도 글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말을 걸 때는 시대의 감수성에 섬세하게 다가가는 서사와 표현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섬세한 언어에 관한 잣대 역시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구술 생애사나 현장을 전달하는 르포의 경우에는 정제된 언어가 자칫 당사자의 역사나 계급성을 지울 수 있다.

내 표현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누구의 얼굴을 지우는지, 그 표현으로 누가 사회적 공간에서 밀려나는지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편견에 휩싸여 소중한 존재에게 "그러다가 너 맘충돼"라거나 "너 된장녀 같아"라고 말하는 무지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비문이나 맞춤법은 수정하면 그만이지만, 차별적인 언어는 누군가의 상처를 찌르고 눈물샘을 건드린다. - <얼굴을 지우는 말들 : 무해한 글을 쓰기 위한 고민> 중에서.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듯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일기장에 남몰래 적는 글이 아니라면 그 글은 언제나 타인을 향해 있다.

자신의 생각이 오롯이 옮겨지는 게 글이라면 글을 쓰기 전에, 아니 다 쓰고 나서라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 내가,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건 아닌지.

결국 그 상처가 다시 돌아 나에게 올 것은 자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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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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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직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에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열 살이 넘게 차이 나는 남자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친구의 결혼식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래오래 달려 도착한 곳은 '진주'의 작은 예식장이었습니다.

그날, 아주 짧은 울음을 울었고, 그 이후 오래도록 그날의 결혼식도, 그 친구도 잊고 살았습니다.

제게 '진주'라는 도시는 희미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아니 어쩌면 오래전 잊힌 그냥 그런 도시입니다.

그날 '진주'에서 어쩌면 저는 아주 잠깐 어른이 되었던 것도 같습니다.

진주.라고 발음해 봅니다.

저는 어쩐지 자꾸 경건한 마음이 됩니다.

나의 이야기도 아니고, 내 아버지의 이야기도 아니고, 내 친구의 이야기도 아닌

이 소설 속의 이야기는 끝내 나의 이야기가, 내 아버지의 이야기가, 내 친구의 이야기가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합니다.

진주.

아버지가 수감되어 있던 도시.

수감되어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열 살의 아이가 처음 비행기를 타고 가본 도시.

수많은 이름 없는 민주화운동가 중 한 명이었던 아버지.

어머니와 학교 선생님들과, 부모님의 동지들은 어린아이에게 '너희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훌륭한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아이의 아버지들처럼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아버지를, 훌륭한 일을 하는데 늘 경찰에 쫓기고, 정착하지 못하고,

끝내 감옥에 간 아버지를 말이지요.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시다.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하거라. 담임선생님은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 나를 따로 자신의 책상 앞으로 불러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다음 해 선생님도 그 다음 해 선생님도 그랬습니다. 선생님들은 그렇게 훌륭한 분이 왜 이 세상에서 도망을 다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름 활자들이 작게 인쇄된 신문은 선생님 책상 위에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시다. 선생님 책상 앞에 앉은 내 시선은 교실 바닥에 맺힌 작은 빛 무늬를 따라 움직여갔습니다. 먼 데서 누군가 만화경을 돌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지러웠습니다. 눈앞이 어른어른했습니다. 한 세계가 바뀔 때마다 그들의 도망 그들의 고초 그들의 시간과는 아득히 먼 거리에, 학교 간부회 어머니들이 가져다준 과일 바구니와 난초 화분이 있는 작은 탁자 위에, 정물처럼 단정하게 아버지는 놓여 있었습니다. - <비밀은 당신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증거입니다> 중에서, p115

아버지와 신념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 사회의 주요한 자리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삶을 살아갈 때

아버지는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다시 세상을 배워야 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전기 배선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당신은 영어 시험 급수를 취득해야 합니다.

당신은 엑셀 함수값 계산법을 익혀야 합니다.

당신은 한글 프로그램으로 그래프 그리고 표 만드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전산 자격증과 컴퓨터 프로그래밍 자격증도 따야 합니다.

또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p49

그런 아버지를 둔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가 내 옆에 정말 있었나'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없으면서 있는 사람.

잊고 싶지만 각인되는 사람.

그런 아버지를 배우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모든 과정들은 아이가 소녀가 되고, 소녀가 어른이 되는 시간과 맞닿아 있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이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 되고,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일이 세상과 소통하는 일이 되는 세계에서

아이는, 무럭무럭 어른으로 자랐습니다.

세상이 달라지고, 사람들이 변하고, 이제는 민주화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곳에 정말 아버지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아버지는, 지금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지금의 아버지는 어쩌면 여전히 그 시절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끝내 세상과 타협하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누구나가 알듯 평범한 가장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개인을 위한 삶이란, 자신의 입에 밥을 넣는 것뿐 아니라 다른 식구들 입에 밥을 떠 넣는 것을 포함하는 개인적인 삶이란, 당신은 이제부터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당신에게 더없이 낯설고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혼자였던 적 없이 언제나 함께 투쟁했고 그래서 우리는 형제였고 겨레였고 민중이었으며 바로 그런 우리 자신이 우리나라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제 당신 동지들로부터, 벗들로부터, 민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신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우리였던 당신은 한겨울 옷을 빼앗긴 맨몸으로 차가운 거리에 내던져진 듯하다. - <우리가 아닌 삶> 중에서, p48

우리는 자주 잊고 살지만 그 시대의 투쟁의 기록들과, 그 기록을 남긴 많은 운동가들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시대의 이야기는,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된 뒤에야 어떤 서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르포이기도 하고, 소설 이이기도 하고, 시이기도 하고, 역사이기도 하고,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무럭무럭 자라 기어이 어른이 되고만 아이는, 어린 시절의 자신의 둘러싼 은밀한 이야기들이 자신의 온몸에,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사랑했으나, 늘 그리웠으나 때론 미워했던, 두려웠던 과거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는 언제나 나를 붙잡는다.

나는 아빠처럼 옷깃이 뒤집힌 셔츠를 그런 줄도 모른 채 입고 다니고, 아빠처럼 현관 문턱에 서서 급하게 구두를 고쳐 신으며, 아빠처럼 엄마를 통해서만 이야기하고, 아빠처럼 잘못된 일들과 잘못된 관행에 분노한다.

그러나 나는, 아빠처럼 그렇게 분노하다가는 평생 월세살이를 전전하고야 말 것임을 알고, 아빠처럼 누군가를 돕다가는 평생 새카맣게 어린 상사들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날만 올 것임을 알고, 아빠처럼 제 몫을 챙기는 데 소홀하다가는 평생 연금은커녕 죽을 때까지 일을 구하러 다녀야 할 것임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아빠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것이며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 <지상의 꿈은 혼들의 거처입니다> 중에서, p178

우리에게 허락된 이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투쟁과, 어떤 죽음과, 어떤 희생과, 어떤 헤어짐들이 그 안에 담겨 있는지 오늘도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그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무언가를 잊어야 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우리는 한 번쯤 헤아려볼 수나 있을까요.

여기 살고 있었던 거구나.

우리집에 잠깐이라도 들렀던 친구들이 애써 난감한 표정을 감추려 할 때마다 나는 내가 초대한 사람이 놀라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평범한 삶이란 얼마나 얻기 어려운가. 메뉴판을 볼 때 가격표의 동그라미부터 셈하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삶이란, 무조건 값싼 물건만을 고르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삶이란, 불로 전소된 가게에서 반값으로 내놓은 그을린 물건을 보러 가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삶이란, 끈 떨어진 구두를 미련 없이 버리고 새 구두를 살 수 있는 평범한 삶이란, 경찰이 들이닥칠 걱정을 안 해도 되는 평범한 삶이란 얼마나 얻기 어려운가.

그 평범한 삶을 위해 나는 먼저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눈 감아야 하고 입다물어야 하고 고개를 처박고 견뎌야 하고 자신이 견딘다는 사실마저 깨끗이 잊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을 잊어야 하는가. - <지상의 꿈은 혼들의 거처입니다> 중에서, p179

자주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잊고,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기억합니다.

기억해야 할 사람들을 외면하고, 기억에서 지워도 될 사람들을 오래 그리워합니다.

기억은 자주 왜곡되거나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잊을 수 없어서 때론 슬픈 세상에서 우리가 진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나의 평범이 누군가에게 투쟁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합니다.

한 마디의 말이, 한 번의 눈 맞춤이, 가끔은 슬쩍 모른척하는 다정한 무관심이 지금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 돌아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기다림을 끝내고 그들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래 이어지기를,

당신은 말이 없습니다. 당신은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왜 말할 수 없는가? 당신은 왜 이곳에서 잠을 자고 있는가 당신은 왜 집에 들어갈 수 없는가 당신은 왜 도망 다녀야 했는가 당신은 왜 그때 혼자여야 했는가 당신은 왜 어렵게 들어간 학교를 졸업할 수 없었는가 당신은 왜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를 저버리고 어머니마저 저버린 아들이어야 했는가 당신은 왜 그렇게 부모 뜻을 저버린 아들이어야 했는가 당신은 왜 이름을 숨기고 학력을 숨기고 거짓 이력서를 만들어 공장에서 일해야 했는가 당신은 왜 주당 팔십 시간 넘게 일하는 노동자들이 계속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못했는가 당신은 왜 그들에게 더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인간일 권리를 찾아야만 한다고 그토록 말하고 또 말하려 했는가 당신은 왜 임금 체불을 당하고 철야 수당을 받지 못하고 손가락 팔다리가 잘리는 산재를 당하고도 언제든 해동당한다 해도 아무 말 못하고 쫓겨날 사람들 죽어도 모를 당신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들을 왜 도와주려 했는가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법무사도 회계사도 아닌 당신, 당신은 왜 법률을 공부했는가 당신 정체를 밝히시오 당신은 자유민주주의자입니까 당신은 공산주의자입니까 신문지로 표지를 감싼 마르크스를 읽는 수상한 당신, 당신은 빨갱이입니까 당신은 반동분자입니까 정체를 밝히라 지금 당장 너의 모든 것을 말하라 당신은 고개 숙이고 당신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그들 중 누군가 당신에게 불을 건네고 당신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렇다 말없이 구개를 끄덕이며, 연기 속에서 당신은 걷습니다.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 지금은 집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결국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당신의 아내, 당신의 딸, 당신의 동지, 없는 고향, 없는 부모, 그러나 당신의 조국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돌아가기 위해 당신은 여전히 꿈속을 헤맵니다. - <당신 뒤에 딸도 받아쓰기를 했습니다> 중에서, p134

돌아온 그곳에서 따뜻하게 당신을 맞아 주는 사람들과 행복하시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평범한 일상을 지켜주기 위해 여전히 당신을 기억하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오래전 잠시 발 디여 보았던 도시에 대해 다시 생각합니다.

아주 잠깐 어른 되었던 도시. 누군가에겐 슬픔의 도시, 누군가에겐 그리움의 도시, 누군가에겐 애틋함의 도시,

그곳에서 아버지는 이제 그만 자유로워지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꿈에서 깨어나 성큼성큼, 가볍게 걸어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눈을 뜹니다.

찾으려는, 찾고자 하는 불가능한 시도 어딘가에서 매일 피 흘리며 태어나는 사람처럼.

눈을 뜹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빠를 만나기 위해서 왔던 도시에서.

오래된 성과, 강과, 대학교와, 놀이공원과, 동물원과, 시장과, 카페와, 옷집과, 식당이 있는 곳에서.

다른 도시와 특별히 다르지 않은 모습의 평범한 도시에서.

눈을 뜹니다.

감옥이 있는 작은 도시에서.

특별할 것 없이 전쟁이 끝나고, 특별할 것 없는 사랑이 생겨나고, 특별할 것 없는 아이들이 태어나고, 또 특별할 것 없는 많은 일들, 그런 무수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또 잊힌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특별할 것 없는 이곳에서.

심야버스에서.

매일의 식탁에서.

그리고, 핀으로 나비의 날개를 고정하던

빈 교실의 작은 책상에서.

나는 지켜보았습니다.

투명한 심장처럼 팔락이던 한 쌍의 날개가

독에 취해 서서히 굳어가던 것을. - <부서지는 나는 있습니다> 중에서,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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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1.

한강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열흘 전쯤, 나는 긴 편지와 함께 이 원고를 그녀에게 우편으로 보냈었다.

선생은 대뜸 말했다.

이 책은 에세이보다 소설로 이름 붙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에세이를 초과하는 것들이 들어 있어서요. 그래서 전화했어요.

- 작가의 말 <나의 이야기는 당신에게 가닿기 위해 쓰인다> 중에서, p293

이 책은 그렇게 소설이 되었다.

에세이였든, 시였든, 소설이었든 그 무엇이었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지만,

소설이어서 좋았다는 마음이 크다.

'당신에게 가닿기 위해 쓰인다'라는 작가의 글에서 오래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

나의 몸을, 나의 몸을 관통해 지나가는 묵직한 울림에서 오래 헤어 나오지 못한다 해도

어쩐지 나는 행복할 것만 같다.

덧붙임 2.

「아름답고 담백하며, 다층적인 서사다. 허구가 아니다. 후일담 문학이 아니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지금의 르포이고, 지금의 시이고, 지금의 신화다. 이들의 다장르, 다매체, 혼합 언어 텍스트다. 이 소설은 작고, 개인적인 나와 엄마의 바느질 이야기가 제일 크고 광대한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증거한다. 나는 이제까지 우리나라 질곡의 시간을 이렇게 아름답게, 천진하게, 여성스럽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것이 응전의 방식이 되도록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김혜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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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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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하나를 두고 여섯 집이 모여 살던 그 시절의 기억을 나는 애써 지우며 살고 있었다.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국민학교 저학년 때까지 살던 그 집을 떠올리면 나는 어쩐지 불우한 유년시절을 겪었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마당이 있었지만, 마당이라기보다는 여섯 집을 한 대문 안에 몰아넣기 위한 계략처럼 느껴졌고, 문을 열면 바로 방으로 연결되는 집이라기보다는 방이었던 그곳에서 그래도 행복했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애써 잊고 지냈던, 그러면 진짜 잊힐 것 같았던 그 시절의 기억이 속절없이 떠올랐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기억과 작가의 기억이 뒤섞여 온통 먹먹해진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야 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고 기어이 마지막 책장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건,

그때의 내가, 그때의 우리가 결국 지금의 나,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는 극명한 사실 때문이었다.

 

인천 공단 내 작은 공장에서 3교대 근무를 하던 아빠.

이른 나이에 두 딸을 낳고, 가난한 집 장남인 아빠의 짐을 같이 지고 시동생들까지 뒷바라지해야 했던 엄마.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으나 다정했던 기억은 없는 부모 밑에서

늘 둘만 남겨졌던 언니와 나는 자주 아프거나, 자주 싸웠다.

 

 

그 집을 떠나 근처의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한 뒤에도 사정이 그리 나아진 건 아니었지만

우리의 불행이 갑작스럽게 행복으로 바뀌지 못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들과 화장실을 같이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행복이 크기가 아주 조금은 커졌던 것 같다.

 

 

그 이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맺음 할 수 없는 그 시절의 기억을 나는 참 숨기고 살고 싶었는데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는 동안, 결코 그럴 수 없음을, 잊으려 할수록 부정하고 싶을수록 생생하게 떠오르리란 걸 알아버리고 말았다.

 

 

지나고 나면 슬픔은 더러 아름답게 떠오르는데, 기쁨은 종종 회한으로 남아 있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는 내가 버텨온 흔적이 있고, 기쁨이 남은 자리에는 내가 돌아보지 못한 다른 슬픔이 있기 때문이리라. 내가 살아온 자리도 돌아보면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갈 마음은 조금도 없다. 내가 살던 개천은 오래전에 복개되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나는 그 사실이 가끔 다행스럽다.

- <프롤로그> 중에서, p6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갈 마음은 조금도 없다'라는 작가의 말에 안도했다.

만약 그 시절이 그래도 그립다 말했다면, 어쩌면 나는 내 기억 속의 시간들을 애써 괜찮은 기억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느라 조금 더 우울해질 뻔했다.

작가가 그리는 '나의 살던 골목'을 천천히 탐험하듯 따라다니다 보면 어쩐지 그곳엔 젊은 나의 아버지가, 그보다 더 젊은 나의 엄마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들의 종종거리는 발, 늘 피곤해 보이던 얼굴,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 그들의 주머니 속의 꼬깃꼬깃 접혀 있을 지폐 몇 장, 땟자국이 눌어붙은 아이였던 나, 그보다 몇 살 위의 언니, 그 모습들이 겹쳐진다.

그러다 불쑥 끼어드는 밥 짓는 소리, 밥 먹으라고 소리 지르며 나의 이름을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 동네 어른들의 즐거운 웃음소리.

어쩌면, 불행한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작가의 이야기 속에는 네 가지의 골목이 등장한다.

가난했지만 그럼에도 포근했을 것만 같은, 엄마의 억척스러움이 아이들을 단단하게 보호했을 것 같은 유년시절의 첫 번째 골목,

한 번도 풍족하지 못했던 아버지, 아버지의 죽음과 아버지가 남긴 가계부 속 기록들, 그 이후 찾아온 엄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아픔도, 미움도, 이별도 어쩌면 다 그리움 혹은 진한 사랑이었을 것만 같은 두 번째 골목,

엄마가 된 뒤 다시 들여다보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내면. 나의 부모와 나의 아이를 연결하는 그리고 나를 만들어 내는 '가족'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게 하는 세 번째 골목,

생계를 위해 세상으로 내몰리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는 사람들이 모인, 생리대를 살 수 없는 저소득층 아이들, 빈부격차와 사회 부조리, 폭력에 대한 고발 등 드디어 광장으로 모여드는 네 번째 골목,

그 골목들을 다 돌고 나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쯤이지 생각하게 된다.

구조조정으로 인한 송별식으로 라이브 술집에 우르르 몰려가 한 시간쯤 쉬지 않고 노래를 뽑아 대고 거리로 나와 눈이 퍼붓고 있던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함박함박 떨어지는 눈이 귓가에서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말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따라 하고 있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살면서 자주 괜찮지 않은 순간이 찾아오고, 다시는 괜찮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하는 순간 나는 이 문장을 주문처럼 외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괜찮다는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정말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는 작가의 속삭임에 슬쩍 묻어가고 싶은, 그 다정함을 나눠갖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빠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난했다. 아빠는 부자가 되지 못했다. 명예를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아빠는 아빠만의 방식으로 아빠의 삶을 증명했다고 믿는다. 존재를 증명하는 일, 세상에 그것보다 위대하고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지기보다 더 나빠지기가 쉬울 것이다. 나는 이제 섣불리 낙관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꿈을 꾸었던, 최선을 다했던 순간의 어떤 기록은 버리지 않기로 한다. 나는 아직 나로서의 증명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 두 번째 골목 <서울 78-236415의 남자> 중에서, p113

 

가난하든, 부유하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증명할 수 있다면,

누군가 그 삶을 기억해 줄 수 있다면 그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내가 나의 부모를 미워하면서도 기어이 사랑하고 만 것처럼, 그들의 지난 시간에 대한 감사와 애잔함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삶을 증명할 수 있는 존재가 결국엔 그들이 남긴 '나' 뿐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은 때문이었다.

그 다짐을 또다시 해버리고 만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는 '나'를 보며 세상에서 누구보다 행복했을 그들이 서 있던 그 골목 끝, 희미한 어떤 불빛 하나를 자꾸 붙잡고 싶은 밤이다.

꺼지지 않게, 사라지지 않게.

'나의 살던 골목에는'

나를 만들어준 그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

 

사람은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이다. 모든 환경과 경험도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경험은 있지만 똑같은 경험은 없다. 그러므로 나도 너와 똑같이 경험해봤다는 말이나 한 발 더 나아가 해봐서 안다는 말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 많은 인생을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시련에 혹독하거나 냉정하기 쉽다.
경험이 누군가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면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지 타인의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할 것이다. p46

인생의 모든 우여곡절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면 된다‘라는 구호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능력과 성실과 비전을 간단하게 묵살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세사으이 모든 불합리와 실패와 차별을 개인의 노력 여하로 돌리는 사회가 가장 비겁하다고 여전히 믿는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모든 절망의 바탕에 개인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성공은 시스템의 문제일 수 있지만, 성취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p64

판 평도 되지 않는 좁은 베란다에서 여기가 네 세상의 끝이야, 라고 아이에게 말할 때 나는 단단한 디딤돌을 상상한다. 그 안전한 터를 밟고 내 아이가 세상을 향해 힘차게 발 굴렀으면 좋겠다. 바람 불면 날아갈세라 애지중지 키우고 혹 복권에라도 당첨되어 막대한 유산을 물려준다 한들 내 아이에게도 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내 아이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종착역으로 집을 기억할 수 있다면 부모로서 나는 참 행복할 것이다. p178

희망이 외려 아픈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꿈은 꾸는자의 몫이 아니라 컨트롤하는 자의 몫이라는 생각을 한다. 성장에도 통이 있고, 씨앗도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발아열을 견뎌야 한다. 마라토너들은 달리다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사점死點과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 사점을 통과하고 나면 다음은 비교적 쉽게 달리게 된단다.
아프고 괴롭고 불안하고 막막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망치지 마라. 원래 희망은 아프다. 그래서 꽃이 피는 것이다.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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