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나와 당신을 돌보는 글쓰기 수업
홍승은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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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를 규정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생각하다가 '나'를 똑 부러지게 설명할 혹은 표현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조금 침울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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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직장인, 딸, 며느리 같은 거 말고,

진짜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게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때론 누군가에게 와~ 하는 시선을 받는 그런 표현이면 좋겠다 싶어질 때 잠시 멈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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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진짜 '나'인가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러니까 여전히 갈팡질팡.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글을 쓸 때마다 주위 환경이 재배치되었다. 이혼이 불행한 게 아니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견고한 사회가 불행하다는 것, 여자의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 성별 이분법과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면했던 나의 입체적인 면도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학교 밖 청소년이었기에 일찍이 제도권 밖에서 살아갈 다양한 방식을 모색할 수 있었고 정상 궤도를 이탈했기에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을 기를 수 있었다. 나는 이혼한 집 딸, 전문대 출신,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라는 몇 가지 단어로 간편하게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밀크티와 공포영화, 비 오는 날, 동물, 따뜻한 대화,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뭔가 이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주 우울하고, 주기적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무엇이었다. 쓰는 과정을 통해 나는 배웠다. 사람은 몇 가지 키워드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존재라는 사실을. - <"승은 씨에게 쓰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중에서.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대학에 입학해 다시 처음부터 소설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을 때

'나'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했다. 모든 글은 '나'로부터 시작된 다는 것.

그 이후 쓰게 된 나의 소설들은 대부분 어둡고, 누군가 부재하고, 떠나거나 상처받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은 그냥 개인적인 서사로만 남았다. 늘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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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생각과, 나의 언어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타인의 모습으로 둔갑시켜 표현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타인을 떠나 표현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여러 가지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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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작은 깨달음들은 결국 나를 '소설'에서는 조금 멀어지게 했으나

또 다른 글쓰기를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독서란 책을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한 사람의 시선과 삶의 단편을 기록한 책을 통과할 때마다 나는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지난 시간이 재배치되었고, 상처를 응시할 수 있었고, 외면했던 감각을 믿게 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관념의 집약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재하는 공간이다.

나에게 '읽다'라는 '경험하다'와 같은 말이었다. 내가 마련한 이 책이 당신에게 작은 자유를 선물하는 하나의 경험이 되길 바란다. 함께 쓰고 읽는 시간을 기록한 이 공간이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도 안전한 그곳이길 바란다. 이제 내 글의 마침표를 열고,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시간이다. -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중에서.

 

'읽는'다는 것과 '쓴 다는 것'

일상을 매일 살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된 두 행위는 때론 아주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쌓였을 때 느껴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정들을 경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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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아가고, 당신의 아픔을, 당신의 공간과 시간을 이해한다.

쓰는 행위를 통해 당신을 통해 알게 될 것들을 다시 '나'에게 대입시켜보면서 진짜 '나'와 마주한다.

때론 그것들은 아픈 상처를, 과거를 떠올려야 하는 힘든 일이 되기도 하고,

즐거운 일을 더 즐겁게 추억하게 되는 신나는 일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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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건 '읽는' 일과 '쓰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해 가다 보면 누군가를, 사회를, 나를 한 가지의 시선으로 편협하게 바라보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진다는 것. 불편한 일에 대해, 불편한 사회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덜 두려워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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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가 경험한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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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저자의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를 읽었을 때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동안 내가 가진 사회적 편견과,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고,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생각을, 가치를, 편견을 툭, 건드릴 수 있다는 일이, 그런 말을 두려움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저자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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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의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 저자의 책을 다시 만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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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야기가 선정적이고 비현실적으로 여겨질까 두려울 정도로 나는 많은 시간 동안 흔들리고 상처받았다. 그렇지만 나의 나약함을 말하고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었기에 아파도 불행하지 않았다. 상처는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때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고 했던가. 덧붙여, 상처는 연결될 때 더 이상 상처로만 머물지 않는다. 목소리가 목소리를 부른다. 내 글을 통해 나라는 타인이 당신에게 전달되길 바라고, 당신의 이야기도 말해지고 들리길 바란다. 그 과정은 분명 불편한 일이겠지만, 우리를 자유롭게 할 거라고 믿는다. 나는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다. 그래서 함께 자유로우면 좋겠다.' -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저자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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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함께 살아가는 일.

이제 그 목소리들을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들려달라고, 그래서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로워 지자고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짧은 시간이 참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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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하는 힘, 살아가는 힘,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 말할 수 있는 용기, 혼자 숨어 힘든 상황을 견디어 낸 이들에게 보내는 다정한 위로였다면

이번 책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는 어떻게 하면 함께 읽고, 쓰는 일을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지,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얼마나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함께 해보자고 손 내밀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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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글을 쓰는 게 무슨 소용이죠? 이렇게 쓴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글을 쓸 때마다 자주 D의 질문을 떠올렸다. 쓰는 일의 의미는 뭘까. 우리가 쓰는 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글이 견고한 세계에 티끌만큼의 흠집이라도 낼 수 있을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질문 앞에서 내가 내놓은 대답은 매번 초라하게 느껴졌다.

- <기꺼이 슬픔에 잠기는 사람들 : 타인에게 상처받고 영향받기> 중에서.

D의 말은 맞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다고 세상이 갑자기 아름답게 바뀔 리 없다.

불편한 일은 여전히 불편한 채로, 잘못된 일은 여전히 잘못된 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쓴다. 그리고 나는 쓰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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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처럼, 함께 글을 쓰는 일을 통해 타인의 슬픔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나의 슬픔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글을 쓸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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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주는 힘만큼이나 글이 주는 힘이 크다는 걸 나는 믿는다.

불편한 생각들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글을 읽을 때면 언제부턴가 괜히 고마워진다.

견고한 세계에 티끌만큼의 흠집, 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흠집을 내려고 노력했던 우리는 달라질 수 있다고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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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점이 나는 두렵다. 혼자 쓰고 읽는 일기와는 다르게 타인에게 읽히면 내 한계가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감 없이 드러나는 내 인식의 한계를 접할 때마다 멈칫하고, 내가 쉽게 타인의 고통을 글의 기폭제로 이용할까 봐 긴장한다. 때로 글은 삶을 쉽게 왜곡하고, 비틀고, 조롱하니까.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한계를 폭로하고 해체하는 글쓰기는 가능할까. (중략)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지녀야 할 태도를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는 내 위치의 한계 알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기.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고통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쓸 수 없는 말을 쓰기. -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걸 : 멈칫하는 태도가 필요한 순간> 중에서.

만약 내가, '읽는'일을 하지 않았다면,

'쓰는'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쉽게 이해한다고 적었을 것이다.

이해해요.라는 말이 때론 얼마나 이기적인 말인지, 때론 얼마나 가벼운 말인지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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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쉽게 내뱉는 타인을 향한 평가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도 읽고 쓰는 일을 통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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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글 속에서 나는 다시 '읽고'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로부터 시작된 글쓰기가, 우리를 어떻게 연결해 주는지 생각한다.

그 연결됨을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넓은 세계로, 또 다른 인식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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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없이 쓰는 언어가 실재하는 존재를 어떻게 지우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쉽게 말을 뱉지 않는다. 나는 이런 태도가 글을 쓸 때도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게 보면 문자 언어도 일부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지만, 적어도 글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말을 걸 때는 시대의 감수성에 섬세하게 다가가는 서사와 표현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섬세한 언어에 관한 잣대 역시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구술 생애사나 현장을 전달하는 르포의 경우에는 정제된 언어가 자칫 당사자의 역사나 계급성을 지울 수 있다.

내 표현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누구의 얼굴을 지우는지, 그 표현으로 누가 사회적 공간에서 밀려나는지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편견에 휩싸여 소중한 존재에게 "그러다가 너 맘충돼"라거나 "너 된장녀 같아"라고 말하는 무지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비문이나 맞춤법은 수정하면 그만이지만, 차별적인 언어는 누군가의 상처를 찌르고 눈물샘을 건드린다. - <얼굴을 지우는 말들 : 무해한 글을 쓰기 위한 고민> 중에서.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듯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일기장에 남몰래 적는 글이 아니라면 그 글은 언제나 타인을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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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각이 오롯이 옮겨지는 게 글이라면 글을 쓰기 전에, 아니 다 쓰고 나서라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 내가,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건 아닌지.

결국 그 상처가 다시 돌아 나에게 올 것은 자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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