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 재욱, 재훈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5
정세랑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남들에겐 없는 특별한 능력이 내게 생긴다면, 난 뭘 하고 싶을까.
이를테면 무엇보다 강력한 손톱을 갖게 된다거나, 엘리베이터를 손 대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움직이거나 멈추게 할 수 있게 된다거나,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눈 앞에 붉게 변한다거나 하는 능력이 있다면 말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 재인, 재욱, 재훈 세 남매에게 우연찮게 이런 특별한 능력이 생기고 말았다.
그들은 어느날 보낸이를 알 수 없는 소포를 받는다.

재인은 어떤 강력한 손톱도 문제 없이 깎을 수 있는 손톱깍이를, 재욱은 강력한 레이저포인터를, 재훈은 열쇠목걸이를. 각각의 소포 안엔 미색 쪽지가 한장씩 들었었다. 각각 Save 1, Save 2, Save 3라고 적혀 있었다.
그들이 소포를 받은 장소는 역시 모두 다르다.
재인은 일하고 있는 대전의 한 연구소에서, 재욱은 파견근무로 떠난 아랍 사막의 플랜트 공사장에서, 재훈은 엄마의 일방적인 강요 의해 떠난 조지아의 염소 농장에서.

그들에게 왜 그런 특별한 능력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그 능력으로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 본인들도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정세랑의 소설집을 세 번째 읽는다.
<보건교사 안은영>, <피프티피플>, 그리고 이번 책 <재인, 재욱, 재훈>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는 한 고등학교에서 일하게 된 보건교사 안은영의 특별한 능력이 보여지고, <피프티 피플>에서는 자그마치 50여명의 등장인물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재인, 재욱, 재훈>에서는 세 명의 인물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물론 소설의 발간 순서가 위의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앞서 읽은 두 권의 소설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역시 재미있구나.

다르게 표현할 수 없어 그대로 표현해 보자면 정세랑의 소설은 재미있다. 가독성이 끝내준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볍다는 느낌과는 조금 다른 재미있음이다. 그래서 더 이 작가가 좋아진다.

분량이 짧은 소설이기도 하지만, 중간에 책을 덮을 수 없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말았다.
작가의 말까지 모두. 소설만큼이나 작가의 말도 흥미로웠다.

더 이상의 소설 이야기는 이 책을 읽을 다음 독자를 위해 그만해야겠다.
재미있는 소설, 즐겁게 읽을 이야기를 찾는 독자들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권한다.

아,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내게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면 난 뭘 하고 싶을까'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면, 물론 절대 그런 일따위 내 인생에서 일어날리 만무하겠지만, 그럼에도 굳이 상상해 본다면,
누구를 구하는 일에 그 능력을 쓰지는 않을 것 같다(이 소설에선 아마도 누군가를 꼭 구해야 한다고 그 능력들을 준 듯 하지만).


- 울음을 그칠 기미가 없는 엄마를 내려주고 대전으로 돌아가며 재인은 생각했다. 이십 대 내내 가장 힘들게 배운 것은 불안을 숨기는 법이었다고 말이다. 불안을 들키면 사람들이 도망간다. 불안하다고 해서 사방팔방 자기 불안을 던져서는 진짜 어른이 될 수 없다. 가방 안에서도 쏟아지지 않는 텀블러처럼 꽉 다물어야 한다. 삼십 대 초입의 재인은 자주 마음속의 잠금장치들을 확인했다. p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 나야. - 단원고 아이들의 시선으로 쓰인 육성 생일시 모음
곽수인 외 33명 지음 / 난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곽수인, 구태민, 권지혜, 길채원, 김건우, 김동영, 김수정, 김승태, 김승환, 김제훈, 김주아
김혜선, 김호연, 박성호, 박정슬, 선우진, 심장영, 안주현, 안중근, 양온유, 오경미, 유예은
이건계, 이단비, 이영만, 이지민, 이창현, 이태민, 임경빈, 전하영, 정다혜, 정차웅, 최성호
홍순영

아이들의 이름을 나지막히 불러본다.
한 명 한 명 소중하게.

더 많은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이 책에 실린 아이들의 이름조차 이제 처음 불러준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조차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래도 그 말밖에 할 수 없어서 또 미안해.

이 책 《엄마, 나야》에 실린 서른 네 편의 시는 서른 네 명의 아이들이 말하고 시인들이 받아 적은 아이들의 이야기다. 아이들이 지은 시다.
이 책을 읽을 때, 여섯 살 된 나의 아이는 내 옆에서 종알거리며 '엄마, 엄마'를 쉬지 않고 불러댔다.
아이를 보다가, 시들을 읽다가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울컥,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이가 부르는 '엄마'라는 소리가 얼마나 애틋하고 고마운지 나는 다시 한 번 느끼고 만다.
아이가 짜증내고, 보채고, 울음을 터트리는 일이, 매일같이 사소한 일로 다투고 매일같이 화해하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 번 느낀다.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며 안아주는 아이의 품이 얼마나 따뜻하고, 아이를 안아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지, 영문도 모르는 아이를 안고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하고 수없이 말해 주었다.

그리고 또 다시 미안해.

아이들의 생일파티에서 가족, 친구들이 모여 함께 이 시들을 낭송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얼마나 눈물을 흘릴지, 그러다 아이와의 추억을 나누며 몇 번쯤은 웃기도 할테고, 다시 그리워서 서로 안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를 보니, 살아남은 아이들은 떠난 아이들의 부모를 만나는 일이 죄송스럽고 어려워하지만, 남겨진 부모들은 친구들이 찾아와 아이와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면 위로 받는다고 한다. 아마도 엄마지만, 아빠지만 몰랐던 나의 아이에 대한 소중한 이야기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옆에 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할 수 없는 아픔, 상상할 수 없는 그리움이다.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대체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 것만 같다. 잊지 않고.

- 별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날에는
햇빛이 볼에 따끔따끔 부딪히는 날에는
달이 동그란 눈을 찡끗거리는 날에는
비가 부슬부슬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는 날에는
바람이 상쾌하게 코끝을 스쳐지나가는 날에는
어김없이 내가 노는 시간이야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나는 잘 있어, 라는 신호야.
<그리운 목소리로 주아가 말하고, 시인 유현아가 받아 적다>

- 내가 잠시 다른 곳에 와 있다고 해서
우리의 깊은 사랑이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의 엄마가 보여주었으면 해.
엄마가 아픔을 이겨내고 건강하게 버텨줘서
이 특별한 생일을
아빠와 동생과 친구들과 함께 기억해줬음 좋겠어.
보고 싶을 때 모두 모여서 마음을 만지면
새로운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
슬픔도 눈물도 다 녹아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으로
내가 곁에 있을 거라는 것을.
알지, 엄마.
엄마가 지금보다 더 더 더 건강해져야 한다는 것.
더 더 더 씩씩해져야 한다는 것.
<그리운 목소리로 채원이가 말하고, 시인 이영주가 받아 적다>

- 조금 울 수도 있겠지만
슬퍼서는 아닐 거야
기뻐서도 아닐 거야
충분해서,
충분해서 울게 될 거야
아빠
나 보고 싶어 뒤척일 수도 있겠지만
노래 불러요
부르고 나면
나 만난 것처럼
나 만진 것처럼
괜찮아질 거에요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리는 내 사람들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니까
괜찮을 거야
<그리운 목소리로 온유가 말하고, 시인 박연준이 받아 적다>

- 지금은 손에 닿지는 않는 곳에 있지만
서로 얼굴을 만질 수 없는 곳에 있지만
모두들 너무 걱정 마세요.
저는 하늘 높이 올라서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고 흙이 되어
여러분 곁에 있을게요.
늘 다니던 동네 슈퍼, 운동장, 학원 근처에서
생생하게 웃으며 안녕, 하고 인사할게요.
<그리운 목소리로 순영이가 말하고, 시안 신미나가 받아 적다>

- 엄마와 아빠와 누나와 친구들이 나를 기억해주는 동안 나는아직 살아 있는 거예요.
기억하는 게 사랑하는 거예요.
기억하는 게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바람으로 다가가고 별빛으로 반짝이며 있을게요.엄마가 제 가슴에 새겨준 문자처럼 사랑해요 많이많이 사랑해요.내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말
엄마, 아빠, 누나 사랑해요.
<그리운 목소리로 건계가 말하고, 시인 도종환이 받아 적다>

-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어마 마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그리운 목소리로 예은이가 말하고, 시인 진은영이 받아 적다>

적으면서 다시 읽고, 읽으면서 다시 울고, 울면서 다시 미안해 하고.
오래도록 이 아이들에게 미안한 이 마음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것 뿐이라서 또 미안하다고 말 할 수 밖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할머니 엄마 웅진 우리그림책 35
이지은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때 나는 병치레가 잦았다.
감기 정도가 아니라 심장병을 앓았으니 엄마, 아빠의 걱정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기 전에는 그 마음을 잘 몰랐다. 아이를 낳고 아이가 기침만해도, 폐렴으로 입원만해도 가슴이 철렁하고 나때문에 아픈것 같아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보니 이제서야 엄마, 아빠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넉넉하지 못했던 형편에 그당시 돈으로 적은 돈이 아니었으니 수술비와, 입원비만으로도 엄마, 아빠의 걱정이 컸을 것이다. 둘이 함께 벌어 겨우, 여기저기 빌려 겨우 아이의 수술을 하고 그래도 아이가 괜찮아져서 다행이라고 마음을 쓸어 내렸을 것이다.

그때, 일하는 엄마 아빠를 대신해 외할머니가 병원에서 내내 옆에 계셨다.
생각해보니 그때 외할머니의 나이가 지금 엄마의 나이쯤이셨을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고 6년째, 엄마는 내 딸을 돌봐주고 있다. 아이를 유치원에서 하원시켜 저녁을 먹이고 내가 퇴근해 데리러 갈 때까지. 종종 주말에 신랑과 내가 출근을 하게되면 주말까지 꼬박. 그렇게 6년.

이 책 《할머니 엄마》는 할머니가 주 양육자인 지은이와 할머니의 이야기다.
엄마가 일을 간 사이 할머니는 지은이와 놀아주고, 엄마 아빠를 대신해 운동회에도 참석한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운동회에 참석해주지 않아서 속상했지만 할먹니 덕분에 그래도 든든하다.
할머니는 줄다리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아이와 춤도 추고 힘껏 해보지만 젊은 엄마들과의 달리기에서 이길 수 없었다. 지은이는 속상함에 눈물을 흘리는데....

달리기에서 져서 속상한 지은이와 할머니가 집에 돌아오는 길 시장에서 고로케를 먹으며 나누는 대화가 마음을 울렸다.
"이제 늙어 그런가... 잘 못 뛰네."
"할머니, 다시 젊어지면 안 돼?"

이 책은 할머니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아이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많이 만들어주었다.
"윤아, 윤이도 엄마 학교가면 할머니랑 씩씩하게 잘 놀고 그러는데 그치?"
"응. 엄마가 학교가도 나는 안 울고 잘 놀고 그러지. 근데, 친구들은 엄마가 안온다고 막 운대. 큭큭"

씩씩하게 말하는 아이를 보면서 미안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늘 미안해하면서도 일을 계속 하는 걸 선택한 이상 그 미안함 마음조차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 여긴지 그리 얼마 되지 않았다. 늘 마음 한 켠에 무거운 돌 하나 얹어두고 있는 것 같던 마음을 긍정적으로, '그래, 이 시간도 다 지나갈거야' 라고 바꿔먹은지 말이다.

그런데도 자꾸 걸리는 게 있다.
엄마.
나 역시 엄마에게 괜히 투정부리고 싶은 맘이다.
"엄마, 다시 젊어지면 안돼?"라고.

아이가 자라서 할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애지중지 키워주었는지, 얼마나 사랑해주고 보듬어주었는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득,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그리워지는 날이다.
아이때문에 그림책을 많이 읽게 되면서 아이보다 내가 더 좋을때가 많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아이가 받은 감동보다 내가 받은 감동이 더 큰 것 같다.

올 해는, 엄마한테 좀 다정한 딸이 되어야지.
올 해는, 엄마를 더 많이 사랑해줘야지.

생각하게 해 준 그림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야 이동도서관
오드리 니페네거 글.그림, 권예리 옮김 / 이숲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자책을 읽어보려고 시도를 종종 해본다.
학교도서관에 책을 신청하면 전자책이 있는 건 전자책 구입이 우선이라고 해서 여러 번 전자도서관을 이용해 보기도 했다. 결과는 번번이 실패.
전자책 읽기를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작은 화면 안에 들어 있는 활자는 눈으로 읽어도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어딘가로 흩뿌려지듯 사라졌다.
다음 페이지를 넘길 때 종이책에서 나는 사각거리는 촉감 없이 미끈한 패드에 닿는 느낌도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연필을 들고 마음에 드는 문장에 쭈욱 밑줄을 그을 수 없는 게 즐겁지 않았다.

《심야 이동도서관》은 나처럼 책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거나 책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종이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한밤의 인적 없는 거리, 당신 앞에 느닷없이 캠핑카 한 대가 나타난다. 망설이며 들어간 캠핑카 안에 당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읽은 모든 텍스트가 순서대로 가지런히 꽂혀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책은 물론이고 시리얼 상자며 일기장까지. <심야 이동도서관>의 주인공은 우연히 마주친 이동도서관에서 떠올린 유년의 기억과 오래된 종이 냄새를 그리워하며 밤거리를 헤맨다. 어릴 적 읽었던 책과 지난날의 추억을 되찾으려는 주인공의 노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집착으로 변한다.』 책 소개 중(해당 책 제공)

내가 읽은 책들을 보관하는 도서관이라니, 상상만 해도 멋지다.
그 안에는 책마다 읽은 날짜를 기록해둔 흔적, 선물을 받았던 책에 적혀 있던 좋아하던 아이에 대한 추억, 친구에 대한 고마움, 많이 아팠거나 우울했던 어느 시절의 나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이 주인공이 느끼는 '풀이 죽은 기분'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절히 원했던 것을 손에 넣었다가 놓쳐버린 적이 있는가?' 이 문장과, 이 뒤에 이어지는 주인공의 행동이 연결되면서 결말이(조금은 충격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림이 없이 짧은 소설로만 읽었더라도 충분히 재미있었을 것 같지만, 그림과 함께 읽는 이야기는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내가 읽는 책들이 내 책장에 꽂혀져 있는 오래된 나의 책들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나의 한 시절을 기억하게 해 줄 사랑스러운 책들을 찾아 읽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에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찻잔을 서랍 위에 놓고 이동 도서관 뒤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거기서 나는 위안을 찾았다. 손등으로 코를 훔치고 서가를 둘러 보았다. 꽃에서 정성스레 추출한 향이 향수에 담겨 있듯이, 책장에 꽂힌 책들에는 내 삶이 스며 있었다. 나를 바람맞힌 소개팅 상대를 기다리며 카페에서 읽은 바버라 터크먼의 『희미한 거울』이 보였다. 여러 번 읽어 두툼해진 『안나 카레리나』도 있었다. 나는 『중력의 무지개』를 집어 들었다. 책을 펼치자 글이 57쪽까지만 있고 그 뒤로는 없었다.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이었다. 내가 읽다 만 페이지에 아이스크림 막대가 꽂혀 있었다.

간절히 원했던 것을 손에 넣었다가 놓쳐버린 적이 있는가? 나는 독자로서의 내 초상을 봤던 것이다. 공기가 탁한 교실에 몇 시간씩 앉아 있던 나날, 아파서 결석하고 집에서 『낸시 드류』시리즈에 빠져든 기억, 금지된 책들을 밤늦게 몰래 읽던 어린 시절. 『네이키드 런치』, 『파우틴 헤드』, 『율리시스』, 『사랑에 빠진 여인들』처럼 남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책을 읽은, 아니 읽으려 애쓰던 10대 시절. 마치 완벽한 연인이 나온 꿈에서 깨어나 사라진 이를 그리워하며 풀이 죽은 기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도 가족일까? 풀빛 그림 아이 60
마르코 소마 그림, 다비드 칼리 글, 김경연 옮김 / 풀빛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와 함께 읽는 그림책이었지만, 이제 막 여섯 살이 된 아이와 읽기에는 그리 쉬운 책은 아니었다.
아이에게 '가족'에 대해 설명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이는 '가족'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엄마, 아빠, 나'이렇게 알고 있었지만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함과 어느정도의 책임감, 동지애, 사랑, 애증 같은 걸 아직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책, 《나도 가족일까?》는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 우연히 만나게 되어 '가족'이 된 보리스와 엄마, 아빠의 이야기다.

'보리스의 부모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어. 의사들 말로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대.'
라고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아이에게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왜, 아이가 없었어? 아이를 왜 가질 수가 없을까? 라고 묻는 아이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보리스의 부모는 늪 근처에서 보리스를 발견했다.
버려진 아이인지, 누군가 잃어버린 아이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조금 자란 아이는 바람에 실려 온 늪의 냄새를 맡고 자신이 살아야 할 곳은 '늪'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늪으로 떠난다.
보리스의 부모는 슬픔에 잠겨 자주 늪으로 찾아갔다. 병 속에 편지를 적어 늪에 두고 돌아왔다.
편지에는 늘 이렇게 적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에서 행복하다면, 우리도 행복하단다.'
보리스는 늪에서의 삶이 익숙했지만 어느순간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늪에 사는 생물들이 자신과 다르다는 걸 알게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비슷하다고 느끼는 건 사랑때문이 아닐까? 사랑하기때문에 비슷해 지는 건 아닐까' 하고. 그리고 다시 늪을 나와 엄마, 아빠가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와 세 번쯤 이 책을 함께 읽었다.
읽으면서 이 문장을 여러번 들려 주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에서 행복하다면, 우리도 행복하단다.'

아이가 갑자기 물었다.
"엄마, 우리가 같이 본 씽 영화에서도 그러지 않았어? 행복하라고"
아마도 아이는 영화 속에서 '겁난다고 가슴이 시키는 일을 포기해선 안돼'라는 장면을 보고 내가 해 준 말 "윤아, 언제라도 네가 가장 행복한 일을 해야 해"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아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책 속에서, 영화를 보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꼭 안고 말해주었다.
"윤아, 언제든 네가 행복해지는 일을 하면 돼. 그리고 그 순간순간 언제나 엄마가 널 응원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줘. 그러면 힘든 일이 생겨도 금방 이겨낼 수 있을거야."

언젠가 아이가 이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는 순간이 오겠지.
나는 그때까지 아이에게 끊임없이 믿음과 사랑을 주면 되는 거겠지. 언제까지나.

 

 서정적인 느낌의 그림과, 글이 참 좋았다.

보리스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던 말 '너 정말 행복해? 이게 정말 네가 원하는 삶이야? 아니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삶이야?'을 나에게도 물어본다.

언제가 아이가 자라서 혼자 이 책을 읽을 때 쯤, 아이도 이해하게 될까.
아이와 함께 읽고, 엄마 혼자 읽어도 좋은 그림책을 만나서 괜히 좋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얼마나 비슷할까?
이 질문이 물고기처럼 보리스의 마음을 헤엄쳤어.
보리스의 부모는 비늘이 없었지만 보리스를 사랑했지
자신들과 닮았든 닮지 않았든 개의치 않았어.
비슷하다고 느끼는 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하기 때문에 비슷해지는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