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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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없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고백하자면 아주 많다.

뜬금없이 전화해서 "큰일 났어. 엄마 좀 도와줘."라고 말하는 엄마가 없다면...

휴대전화에 엄마의 번호가 들 때, 반가움보다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엄마가 없다면...

지난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전화를 걸었다.

두 시간쯤 지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깜박 잠들었어. 이제 깼네."

"그랬구나."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모녀 사이에 승패를 가를 싸움 따위 애초에 상관없는 일이라는걸.

모녀 사이에 누가 있고 없고를 따질 의미가 이미 없다는 걸.

그러면 엄마랑 좀 멀리 떨어져 살지 그랬니? 내 인생에서 멀리 떠나버리지 그랬어. 내가 말릴 사람도 아니고.(p319)

<<사나운 애착>>을 읽으며 꾹꾹 참아왔던 감정이 이 문장 앞에서 무너졌다. 만약 나의 엄마가 내 앞에서 그렇게 말을 했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어쩌면 나는 엄마가 끈질기게 나를 놓지 않고, 내게 무언가를 원하고, 필요로 해서 엄마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대체로 많은 엄마들이 생각한다. 자신을 희생해 자식을 키웠다고. 대체로 많은 딸들은 생각한다.

엄마의 희생은 딸인 내가 원한 건 아니라고. 고닉과 고닉의 엄마 역시 다르지 않다. 고닉의 엄마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 고닉을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아이가 아닌 고닉의 세계는 엄마 이외의 것들로 채워져 있고, 외부와 내부의 간극은 점점 벌어진다.

사랑이 모든 것이라 믿었던 고닉의 엄마는 부유하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부모와 자식으로 만들어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완벽에 가깝다고 느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남편(가장)의 죽음 이후 중심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남편(가장)을 잃은 슬픔과 자신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게 아니라 더 깊이 파고 들어간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로 읽히던 이야기가 어느 부분에서는 여자 대 여자의 이야기로 읽혔다.

고닉의 엄마는 일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나가려는 고닉에게 딸이 아닌 자신이 살고 싶었던 삶을 사는 여성의 모습을 본 것처럼.

너 정말 모르겠니?

엄마는 애원하듯 말한다.

엄마한테는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달리 뭘 가질 수 있었겠니? 네가 인생 얘기하는 거 다 옳지. 다 맞는 말이야.

너한테는 일이 있었잖아. 너만의 일이 있잖아. 너는 여행도 많이 했고. 세상에나, 여행이라니!

넌 지구 반 바퀴는 돌아봤지. 난 여행은 꿈도 못 꿔봤는데! 나한테는 네 아빠 사랑밖에 없었어.

인생 살면서 누릴 께 그것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그 사랑을 사랑했다. 아니면 뭘 어쩔 수 있었겠니? (p317)

고닉은 뉴욕 빈민가 브롱크스의 다세대 주택에서 여섯 살 때부터 스물한 살까지 살았다.

그곳은 가난한 이민자들의 거주지였다. 고닉의 엄마는 그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도 그들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활기찼고, 똑똑해 보였다. 그러나 고닉의 엄마는 브롱크스의 다세대 주택이 아니라 '다른 세상, 진짜 세상이 있음(p25)'을 알았다. '그리고 가끔은 당신이 그 세상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열렬하고 절실하게.(p25)'

엄마는 집안일에 열중하다가도 갑자기 모든 동작을 일제히 멈추고,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몇 분 동안 싱크대를, 바닥을, 스토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세상이 어디 있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데? 그게 대체 뭔데?

이것이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이었다. 여기 이 부엌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는 것. 또한 이 부엌에서 엄마는 누구나 존경하고 감탄할 정도로 훌륭히 기능한다. 이 부엌에서 당신이 하는 일을 혐오스러워한다. 어쩌면 나중에 당신 입으로 말한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공허함"에 대해 분노를 키우고 있다. (p26)

엄마는 가부장의 안전지대에서 "사랑"만이 전부라 믿었다. 그러다 그 사랑이 갑자기 세상을 뜬 뒤, 모든 슬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슬픔은 다시 딸에게 전해졌다. 딸은 원하지 않았지만, 딸에게 엄마는 세상이었다. 법이었다. 그때, 딸이 할 수 있는 생각은 한 가지였다.

"절대,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

내가 너무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생각. 나의 전부가 '엄마 '일리 없다는 부정.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순간들.

그러나 고닉의 글을 읽으며 알았다. 엄마와 딸은 단지 피로 연결된 혈육만이 아님을.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p301)

글 속에서 고닉과 그의 엄마가 함께 걸으며 나누는 대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은 대체로 평범한 대화들을 나누고, 가끔은 실없는 이야기도 하고, 가끔은 날카로운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글을 읽는 동안, 엄마와 함께 걷는 상상을 자주 했다. 

아주 오래전엔 나란히 걸은 적도 있었겠지. 그 장면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살짝 슬퍼졌다. 

오늘, 몇 주 만에 엄마 집에 다녀왔다.

최근 일을 다니기 시작한 엄마는 종일 서 있어서 다리가 붓고 무릎이 아프다고 했다.

가는 종아리, 부은 발, 어쩌면 우리의 산책은 좀 더 뒤로 미뤄질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오래 침묵했다.

그저 우리는 함께였다.

가족이라는 개념,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 가족의 삶이라는 것 모두 해석이 불가능한 세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과연 그런 진실이 존재하나 싶어진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 자신을 불운한 운명(엄마는 과부 나는 이혼녀다)을 타고난 무능력한 두 여자, 스스로 행복한 가정이라는 실체를 꾸릴 수 없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다 쇼윈도 앞에 서면 ‘행복한 가정‘이란 건 내 안에서도, 엄마 안에서도 실현되지 못한 한 조각 환상처럼 느껴진다. - P72

모든 일은 언제나 나쁘게 끝나지만 그 비극에도 위엄이란 게 있지 않을까. 내가 쓰는 이야기의 요점은 명확하다. 인생은 비극이라는 것. ‘비극 안에‘ 머물면 인생이라는 지루하고 빈곤한 고통에서 구출될 수 있다. 사실 인생이란 게 전부 무의미해 보이기도 했다. 무의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내가 알기론 가장 중요했다. 의미를 찾는 게 곧 구원이었다. - P87

나는 간발의 차로 겨우 위험에서 빠져나온 사람 심장이 철렁했다. 내가 느낀 불안이 속속들이 냉정하고 비열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뜨거운 가슴에 날 마구잡이로 끌어안도록 내버려 두었다. 몸을 빼지 않았다. 내가 속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여러 가지 확실한 문제가 있다. 숨이 막힌다. 그래도 안전하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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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아내, 엄마 지금 트러블을 일으키다 - 신나리 페미니즘 에세이 스토리인 시리즈 9
신나리 지음 / 씽크스마트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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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은 자기 검열의 기준이 된다. 스스로 조건에 부합된다 느낄 때만 비키니를 편하게 입을 수 있는데, 이때 '대상화'를 감당하는 것도 자기 몫이다. 비록 칭찬이라 해도 몸매 품평을 받아들일 각오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 날씬하지 않은 여성이 몸을 노출하면 '민폐'라고 규정하는 '사회적 규범'은 엄연히 존재한다.

이런한 규범은 내 몸을 '물건'처럼 바라보게 한다. 기준에 근접할 경우 '봐도 좋다고 과시하는 몸'이 되며, 그러지 못할 땐 '숨겨야 하는 몸'이 된다. 어떻게 입든 자유이자 취향이라고 말하지만, 마르거나 뚱뚱하거나 젊거나 늙은 사람 누구도 실상 자유롭지 못하다.

- <비키니를 버리지 않은 이유> 중에서, p51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좋든 싫든 하루에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의 매일 만난다.

"어머, 선생님. 흰머리 봐봐"

"야, 이제 조 선생도 나이 드는구나."

"염색할 때 됐다 그치?"

가깝든, 적당히 거리가 있든 사람들은 쉽게 말했다. 보이는 대로 말했을 테니 절대 악의는 없었을 거다.

작가의 '타인의 시선은 자기 검열의 기준이 된다'라는 문장을 읽다 생각했다. 내가 새치 난 머리를 참지 못하는 건 '타인의 시선'에 맞춰진 자기 검열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면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었을까.

『 여자, 아내, 엄마 지금 트러블을 일으키다』는 다섯 개의 챕터로 진행된다.

1장. 꾸미지 않은 채 살고 싶다

2장.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3장. 오늘도 난 아이 앞에서 미친년이 됐다

4장. 지금 나는 잉여력을 충전중입니다

5장. 온전히 불완전해질 자유가 필요해

삶은 성취가 아니라 지루한 반복의 연속이다. 이걸 모르고 뭘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왔지만, 나이 마흔, 물러설 수 없이 받아들일 때다. 생애주기 매 순간이 어차피 미완성이다. 부족함은 필연이다. 나이에 걸맞게 도달해야 할 성숙의 기준은 없다. 마흔 줄에 접어든 내 친구 중 그거 이룬 사람 한 명도 못 봤다. 만나면 우리의 대화는 늘어나는 주름, 뱃살, 집값과 부동산 정책, 퇴사 고민뿐. 여기에서 자유로운 자는 없다. 그저 20대의 고민만 반복하지 않아도 성공이다.

목표 설정 자체를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적어보았다. 내가 되고 싶거나 이루고 싶은 일이 아니라 단지 하고 싶은 것들을.

글을 계속 쓴다. 나의 생애 경험을 세심하게 증언하고 싶다. 아이와 여행을, 아무 목적 없이 다니고 싶다. 요가 동작을 잘하고 싶다. 가볍고 민첩하게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날까지. 바다에서 머리 들고 유유히 수영하는 법도 익힐 테다. 똑똑해지고 싶다는 허영은 차마 버리지 못하겠다.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라도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꼼꼼히 읽어 나의 언어 일부로 만들고 싶다. 요리를 즐기지 않지만 한 끼에 소박함과 정갈함을 담으려 한다. 매일 아침 창을 열러 찬바람을 맞아들이겠다. 햇살 아래 고슬고슬 마른 이불깃의 감촉을 사랑하자.

나의 피로와 혼란을 돌보며 살려 한다. 힘들면 잠을 자는 일에 왜 아직도 머뭇대는가. 외부 자극을 차단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 아닌데. 월등한 생산력을 뽑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닦달하지 않기 위한 휴식을 하고 싶다. 쥐어짜내고 갈아가며 달리던 그때로 돌아가지 않겠다.

- <마흔, 그 무엇도 되지 않을 자유> 중에서, p295-296

1장부터 3장까지 치열하게 달린다. (치열하게 어떤 면에서는 과격하게 쓴다). 작가가 그동안 여성으로, 엄마로, 아내로 살면서 무수히 싸우며 성취한(여전히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치열한 기록이다.

4장과 5장으로 가면서 그간 작가가 치열하게 싸우며 깨달은 것들을 통해 터득하게 되거나 추구하게 된 삶의 방향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나의 피로와 혼란을 돌보며 살려 한다'는 문장에 와서야 바짝 긴장했던 마음을 살짝 놓을 수 있었다.

읽는 나 역시 한 문장 한 문장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읽게 됐다. 내가 여성으로, 엄마로, 아내로 살아가며 느꼈던 부당함과 상실감, 피로와 고됨의 흔적들을 글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치열하게 싸우지 못했다. 이제야 겨우 아닌 걸 아니라고, 불편한 걸 불편하다고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2장. <부부란 무엇인가>을 읽으면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작가는 거의 독박에 가까운 육아를 감당하며 참지 않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남편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아이가 막 세 돌이 될 때쯤이었다. 어느 날 남편에게 통보했다.

"오늘 밤 이야기 안 하면 내일부턴 나 없을 거야."

몸이 너무 아파 아이를 보다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다고 해도 회사에 일이 많아 올 수 없다고 했던 그는 바로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그날 남편과 담판 지었다.

"당신을 내 인생에서 버릴 거야. 그렇게 몸 바쳐 사랑하는 회사랑 평생 살아."

회사에 그렇게 다니며 아이를 보지 않을 거라면 가족을 포기하라고 했다. 어차피 얼굴 못 보는데 따로 살자고 했다. 눈물이 차오르고 목이 메는 것을 꾹 참고 남편의 눈을 정중앙으로 노려보면서 또박 또박 말했다. 그동안 내가 울부짖어대며 했던 수많은 말 앞에서 그는 지겹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잠을 자버리곤 했지만 오늘 나의 최후통첩에 남편의 눈이 벌게졌다.

- <육아로 유지하는 부부간의 결속> 중에서, p123

최후통첩 후 작가는 다시 선택권을 넘겼다. "3개월 내에 퇴직, 이직, 휴직 중에 결정해." 그렇게 남편은 2개월의 짧은 육아휴직을 냈다. 그리고 작가는 남편의 육아휴직 기간 동안 남편이 자신에게 했던 것만큼 똑같이 했다. 아침 일찍 나가 늦게 들어오고, 육아와 가사에 손을 보태지고 않고,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어도 모른척했다. 그 사이 남편은 그걸 혼자 다 했다. 민감한 양육자가 되어 갔다.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의 첫 책 『엄마 되기의 민낯』에 담아냈다.

물론 이걸로 끝은 아니었다고 작가는 말했다. 휴전은 있을지언정 종전은 없다고. 남편은 다시 복직을 했고 여전히 아이 양육은 필요했으니까. 그럼에도 작가는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그게 남편과 다정한 사이를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쯤은 개의치 않았다. 여기서 나의 고민과 혼란이 시작됐다.

그리고 한 장면이 떠올랐다.

며칠 전 아침. 나는 분주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작은 아이 등원 준비를 시키고, 큰 아이를 깨워 등교 준비를 시켰다. 나의 출근 준비는 더 일찍 일어나 미리 준비를 마친 뒤였다. 식탁 주위를 분주히 오가는 데 거실 너머 베란다 창으로 여유롭게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남편의 뒷모습이 보였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던 창 앞에 앉아 있는 남편은 거실과 베란다 창 사이를 두고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해 내가 있는 곳은 전쟁터, 그가 있는 곳은 세상 한가로운 휴양지 같은 느낌이었달까.

식탁으로 와 앉으며 남편은 입을 열었다. "좋네요. 잠깐의 여유를 즐겨보세요." 그때 내가 해야 할 말의 정답은 뭐였을까? 아니 아무 말 없이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수프 그릇을 집어던져야 했을까?

그때 나는 그냥 웃었다. 그 웃음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의미 없는 웃음에 가까웠다. 날선 말로 아침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대체로 그랬다. 물론 우린 치열하게 싸워야 할 만큼 육아 문제로 부딪치지 않았다. 적절한 선에서 알아서 나눠했고 알아서 서로의 감정을 살폈다. 그럼에도 그날 아침의 풍경이 쉬이 잊히지 않았다.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았구나. 부부 사이의 날선 대립이 싫었던 거구나. 불편한 공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넘어갔구나. 그럭저럭 괜찮은 부부 사이를 유지하고 싶었구나. 대체로 늘 그랬구나.

여전히 답은 모르겠다. 그럼에도 생각이 많아졌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 몇은 나처럼 2장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결혼이 죽을 때까지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예감과 기대가 오늘의 나를 더 치열하게 살게 했다. 남편의 생계 부양에 의탁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일하고 무리한 빚을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35년 대출로 두 사람이 평생 묶이는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되니까. (...) 남편과 정서적으로 관계가 좋지 않더라도 두렵지 않게 됐다. 한 몸처럼 붇어 있는 부부가 아니라 현재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동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걸 그와 나누려 하지 않는다. 가족은 나를 완전히 충족해 줄 수 없음을 인정했다. 가족을 영원히 공동체가 아닌 인생 전체의 일부분에서 협업하는 공동체라고 여기니 의뢰로 많은 부분에서 관대함이 생겨났다.

부부란 무엇일까. '백년해로'라는 말은 낭만적이면서도 억압적이다. 그 말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왜 결합된 부부만을 완전하게 볼까. 독립된 개인을 온전한 주체로 볼 수는 없을까.

-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p172

작가의 첫 책 『엄마 되기의 민낯』은 내겐 최고의 육아서였다.

큰 아이를 키우며 육아서를 정말 많이도 읽었다. 읽으면서 불편함을 많이 느꼈지만 그래도 매달릴 데가 없었다. 그래서 읽었다. 어느 순간 육아서에서 말하는 엄마의 행복이나 자아 찾기 같은 말들이 엄마들에게 또 다른 폭력은 아닌지 고민하게 됐다. 그 즈음 작가의 책을 읽었다. 속 시원했다. 그래 그거지. 육아는 힘든 거지. 그게 당연하지. 그걸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엄마가 잘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게 이상한 거지 싶었다. 첫 책 속에 등장하는 아이는 어느새 자라 초등학생이 되었다. 첫 책이 아이의 탄생과 영아기 육아를 거치며 나온 육아 이야기라면 이 책 속엔 5살 이후부터 초등학생 이 된 아이의 육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역시 시원했다. 나도 자주 아이 앞에서 미친년이 되니까. 별거 아닌 일에 욱하기도 하고, 감정 조절이 안돼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중이라 '좋은 엄마' 프레임 앞에 위축되곤 했다. 작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 괜찮을 것도 같다. 아이랑 좀 싸우면 어떻고, 엄마가 좀 덜렁대면 어떻고, 헌신하지 못하면 어떠랴 싶다. 엄마와 아이를 보살펴야 하는 사람, 보살핌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하고 싶어진다.

누군가가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개인의 마음가짐을 바꿔 먹거나 능력치를 높이기보다 자신이 위치한 배치를 바꿔보라고. 혼자 하는 육아가 힘들다면 혼자 하는 능력치를 올리기보다 어떻게든 나눌 사람을 찾아야 한다. 자꾸만 무료해지고 몸이 가라앉는다면 답을 육아 속에서 헤집으며 찾는 일은 멈추어야 한다. 아이와 노는 게 재미없다면 차라리 나의 놀이를 모색해야 한다. 몇 시간이라도 어린이집에 보내는 이유, 주말이면 혼자만의 시간을 꼭 가지는 이유는 나를 둘러싼 물리적 조건을 배열하기 위해서다.

- <육아가 할만해 질 때, 힘들어질 때> 중에서, p197

엄마는 슈퍼우먼이 아니다. 슈퍼우먼으로 살 필요도 없다. 그냥 살면 된다. 작가의 말처럼 계속해서 엄마 능력치를 높이려고 노력하는 대신 개인으로서의 능력을 높이려고 애쓰는 편이 훨씬 멋지지 않을까.

앞이 보이지 않는 육아 터널을 건너고 있다면, 지겹게 남편과 기싸움 중이라면, 여성과 엄마와 아내 사이에서 갈팡질팡 중이라면 이 책을 슬쩍 권해 본다.

『엄마 되기의 민낯』과 『여자, 아내 엄마 지금 트러블을 일으키다』 두 권을 같이 읽는다면 더 좋겠다.

우리는 계속 자란다. 어렸을 때만 자라는 게 아니라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매일 자란다. 신체가 노화하는 만큼 마음은 성숙해진다. 세상엔 '엄마'만으로 살기엔 멋진 일이 너무 많다. 조금 멀리 내다보며 살고 싶다. 지금 아웅다웅하는 삶이 전부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내 안의 나를 더 채운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분담은 일의 종류로 나누는 게 아니어야 한다. 또 누가 얼마나 많은 일을 언제 하느냐는 오히려 부차적이었다. 중요한 건 시간에 대한 압박을 나누는 거다. 매일 하는 일에서, 시간에 쫓기는 일에서 나누어야 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나누어야 한다. ‘시간이 나면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하는 일‘을 나누어야 한다.

- P116

아이를 돌보는 책임감은 부부 둘이 온전히 나누어 가져야 한다. 아이를 보기 위해 남편의 시간 역시 아내만큼 쪼개져야 하고 그만큼 빠듯해져야 한다. 시간이 나면 아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어 아이를 보는 게 맞았다. 아빠도 주 양육자로서 정체성을 갖춰야 했다. 그러나 남편은 여전히 수동적이었다. 다 년간에 경험 끝에 다정하고 친근한 말로 부탁하는 일도, 눈물로 호소하는 일도, 붙잡고 논리로 설득하는 일도 불가능함을 알았다. 직장일의 완강한 중력은 남편을 제자리로 돌려두곤 했다. 여성에게만 주어진 양육의 기본값, 그것이 있는 한 협상이 되지 않았다. 통보로 밀고 나갔다. "이것 좀 부탁해"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으로 배치를 구성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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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인주의자의 결혼생활
이정섭 지음 / 허밍버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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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엔 세상이 말하는 관습적인 역할을 내려놓고 지속 가능한 대안을 찾은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상적으로 각방을 쓰고, 집밥은 간단히 먹으며, 아이 없이 지내면서, 나 홀로 여행을 떠나는 우리의 생활은 티브이에 나오는 '보통의 결혼생활'과는 거리가 있다. 일견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삶이기에 지치지 않을 수 있었고, 지치지 않았기에 그 에너지로 서로를 더욱 아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p8'

비혼이 늘고, 결혼의 형태가 달라지고 있는 요즘 무조건 '결혼을 하지 않겠어!' 보다 좋은 사람과 같이 사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나의 삶도 잘 살아낼 수 있는 긍정적인 형태의 결혼 가정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했다.

 

여기에, '임신과 출산, 육아'가 갈등의 문제로 끼어들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가능할 수도 있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단언하건대, '부부'만의 가족과 '아이가 있는 가족'의 삶은 너무나도 다르다.

아무리 둘 사이가 좋아도, 아이와 양육이 끼어드는 순간 그 결혼 생활은 부부가 생각하는 결혼 생활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역시, 아이를 낳고 안 낳고의 문제도 각가의 선택이니 정답은 없겠다)

이 책 속의 이야기는 '우리 부부는 이렇게 삽니다'쯤 되겠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잘 삽니다' 로도 읽힐 수 있겠다. 그게 정답입니다! 가 아니라 이렇게 사는 부부도 있습니다,로 읽혀서 부담스럽지 않았고, 이렇게 사는 부부들이 있구나, 알게 돼서 신선했다.

만약, 결혼을 고민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은 커플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듯하다.

결혼 전엔 막연히 두려워지니까. '아, 나는 도저히 둘이 늘 함께 하는 건 자신 없는데. ' '누가 내 생활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참을 수 없는데.' 같은 고민을 하게 될 테지만 그걸 어떻게 풀어 나갈 수 있을지 떠오르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면서 함께 할 땐 즐겁게! 가 가능하다는 희망 하나로도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아 지겨워. 어떻게 이렇게 평생을 사냐' 싶은 권태기가 올 듯 말 듯 한 부부라면, 적정한 거리 두기를 어떻게 하지 헤매는 부부라면 이런 방법도 있겠구나 생각해 볼 수도 있겠고.

결혼 10년 차쯤 되니, '부부가 성격차이'로 이혼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것도 같다.

이혼 사유가 무조건 성격 차이래, 쉽게 사람들은 말하지만 결혼 생활을 해보니 부부 사이에 성격이 맞지 않는 것만큼 함께 하기 괴로운 일이 없겠다 싶기도 했다. 맞춰 산다는 건 누군가 양보하고 배려한다는 것인데 그것도 쌓이면 늘 배려한 사람이 나가떨어질 확률이 높으니까.

독립성과 사랑 중에 뭐가 먼저냐 묻는다면, 그 둘은 서로를 가능하게 해 주는 보완 요소라고 답하겠다. 사랑하기에 상대가 나와 별개로 누리려는 일상을 인정할 수 있고, 나 자신의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기에 깊은 사랑을 키워갈 여유가 생긴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는진 모르겠다. 만약에 결혼 후 지나친 속박이 두려워 누구와도 함께 살기를 꺼리는 사람이 있다면 비슷한 사람을 만나 보시도록. 존재합니다, 분명히.

- <누구랑 함께 살지 못할 사람> 중에서, p25

우리 부부는 취미도, 성향도 정말 다른데 딱 한 가지 맞는 게 있다면 '개인주의적' 성향이다.

서로의 시간과 공간 취미를 존중하기. (왜? 내가 간섭받기 싫으니까 상대에게도 간섭하지 않는 거다). 이게 부부 사이에 너무 정 없는 거 아냐? 생각하기 시작하면 또 끝이 없다. 행복한 부부 사이, 이런 건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살아보니 '내'가 그리 불행하지 않으면 그걸로 나쁘지 않은 결혼 생활 같기도 하다.

상대의 감정에 너무 치우치면 '나'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고, '나'의 감정에만 너무 매몰되다 보면 상대방의 감정은 의도치 않게 무시하게 될 수도 있다. 결혼 생활에, 부부 관계에 너무 큰 의미 부여를 하지 말자.

결혼한 지 10년이 넘으면서 알게 된 건 어느 부부든 마음속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주의 생명체 고양이가 그렇듯 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다가 문득 외로워지면 서로를 찾아 찰싹 붙어 온기를 나누며 행복해한다. 꾹꾹이를 할지도 모른다. 고양이 주인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방금까지 몸을 부비던 고양이가 갑자기 가 버린다고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이내 다시 찾아올 테니.

- <우리 부부는 각방을 쓴다> 중에서, p88

이 문장이 꽤 공감 됐는데, 우리 부부가 각방을 쓰면서도 나쁘지 않은 지점을 잘 표현해 준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작가가 글에서 이야기하는 '따로 또 같이'의 의미가 잘 함축된 느낌 들기도 했고.

결혼 생활은 결국 케이스 바이 케이스. 결혼은 으레 이러이러하다는 일반론이 통하지 않는다. 예측 불가능한 존재인 인간 둘이 만나 이루는 결혼이란 우주가 그리 단순할 리 없다. 남들의 기준에 휘둘리지만 않으면, 뒤집어 말해 부부가 자기들의 기준으로 결혼 생활을 꾸려 나가면 거기에 일반론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둘의 의지와 노력만 남는 셈이다. - <좋은 소식은 없지만 매우 좋습니다> 중에서 - P116

인간이란 완벽하지 못하기에 결혼한 부부 모두 각자 비뚤어지는 순간이 있다. 아내는 일상적으로 자잘하게 비뚤어지고, 난 가끔 크게 비뚤어진다. 그럼에도 우리 부부가 큰 갈등이 없는 것은 아내 덕이다. 비뚤어지는 순간에 격차를 두어 최악의 순간엔 보듬어 주고, 나머지는 모두 실리를 추구한다. 진짜 거울은 아니지만, 놀라운 이해심으로 나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돌아보게 한다. - <작지만 밉지 않은 우김> 중에서 - P146

마음 깊은 곳에선 알고 있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노후의 삶은 우울해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어느 날부터 모든 게 조금씩 안 좋아지기 시작할 것이다. 감기에 걸렸는데 이상하게 잘 낫지 않을 것이고, 친한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질 것이다. (중략) 그래서 노후를 위해 또 한가지 준비할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일상을 즐기는 습관이다. 미래를 보지 못하고(않고), 눈앞에 닥친 일만 중요하게 여기는 무식함(현명함)이다. 알랭 드 보통은 저서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인간이 가진 근시안을 칭찬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생활의 지혜일지 모른다. 현자들이 가르친 대로 죽음에 대비하라는 것은 죽음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 줄 것이다." "우리를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 줄 것이다."
- P176

. 세상에 고유한 개인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 결합해 바뀌며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맞추질지 모른다. 그리고 그 바뀐 자리에 더 이상 자신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상대방의 행동 중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관계에 해를 끼는 일이 아니라면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해야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상대방 역시 나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인정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닌 두 사람의 공존이다. - <개인주의적 결혼생활> 중에서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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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미 - 누군가를 만날 줄 몰랐던 여름, 베를린
이동미 지음 / 모비딕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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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이런 고백이 그리 부끄럽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좀 부끄럽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

"나는 신혼여행 말고 해외여행 가본 적이 없어."

예전엔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이 부럽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런 사람이 부럽다.

그냥, 짧은 여행 말고

한 도시에서 오래 머물면서 낯선 곳에서의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

이 책 『동미』의 표지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책 제목도 그랬지만

사진 속, 폴짝 뛰어오른 여자의 모습이, 옆모습이지만 활짝 웃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코로나 시대,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물론 나의 경우 대부분 떠날 수 있어도 떠나지 않았지만) 요즘이라서 그랬을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사춘기 아이 마음처럼 '진짜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같다.

'동미는 자유롭다. 그의 인생엔 걸림돌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일, 연애, 결혼, 돈, 그 어떤 삶의 루틴 앞에서도 동미는 기죽지 않고 살았다. - 저자 소개 중'

일, 결혼, 돈 그 어떤 삶의 루틴 앞에 번번이 무너지는(지고 마는) 나로서는 '와, 부럽다' 하는 마음이 드는 게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그래, 나는 이미 졌다.'

그러니 실컷 대리만족이라도.

누군가의 자유로운 삶을 염탐하듯 기웃거리며 부러워라도, 상상이라도 징하게 해보자 마음먹었다.

'베를린'을 사랑했던 여자.

처음 베를린에 갔던 13년 전, 첫 만남에 베를린에 짝사랑에 빠진 여자.

한국으로 돌아와 이듬해(2008년) 결국 '다시 베를린'이라는 책을 출간한 여자.

2014년 다시 찾은 베를린에서 뭔지 모를 쓸쓸함을 감지하고 돌아왔지만,

프리랜서 여행작가로 살겠다는 확신에 회사로 돌아가야 하나 하는 고민을 접었다.

친구와 경리단에 작은 바를 차렸으나 친구는 바를 차린지 1년도 안 돼서 결혼을 하고 베를린으로 떠났다.

친구가 있는 베를린으로 여행을 떠난 게 일 년 전.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남자(사랑)을 만나 연애를 하게 되고, 동거를 시작했다.

이 책은, 처음엔 베를린 여행기로 기획되었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면서 예정에도 없던 로맨스를 쓰게 된 여행 작가의 에세이다.

원래 쓰려던 여행기를 접고, 부끄럽지만 소소한 사랑 이야기를 썼다. 뒤늦게 만난 중년의 연애 이야기가 뭐 대단한 게 있을까마는, 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싱글로 살던 한 여자의 또 다른 삶의 과정으로 읽어주면 좋겠다. 한 남자가 아니라 한 사람과 깊이 교감하며 연애와 삶에서 새로 알게 된 것과 느낀 것들, 즐거운 한때를 기록한 이야기라고 이해해 주면 좋겠다.

- 프롤로그 중에서, p8

누군가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재밌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연애 세포는 다 죽었는지 잘 생긴 남자를 봐도 '저 남자라고 집에 있는 남자랑 뭐 다르겠어.' 하는 마음이 드는 10년 차 아줌마에게도

간혹 슬쩍슬쩍 들리는 남의 연애 이야기엔 귀가 쫑긋하더란 말이지.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다.

작가가 말한 '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한 여자의 또 다른 삶의 과정'이라는 걸.

낯선 나라에서, 낯선 방식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어가는 일 자체가 뻔하지 않다.

그 뻔하지 않은 상황에 기대 글이 별로였다면 '아, 그랬구나.'하고 그만이었겠지만

여행기로서도, 에세이로서도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물론, 내 취향에 맞았으니까 그랬을 거다.)

베를린에 도착해 제일 먼저 (친구의 권유로) 데이팅 앱 '틴더'를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의 남자와 그렇고 그런 만남을 거쳐 '스벤'이라는 특별한 남자를 만났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모든 사람을 특별해지니까.

이 책 속의 이야기는 작가와 스벤의 사랑 이야기이면서 작가가 한 남자를 만나 (베를린에서) 어떻게 살게 되고,

어떤 마음의 변화를 거치게 되는지 자연스럽게 들려준다.

(외국에서의 생활이 어떨지 상상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데이팅 앱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렇게 쉬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베를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커플이 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했다.)

난 우는 게 창피하지 않아. 그래서 눈물도 금방 나. 혼자 있을 땐 오히려 안 울지만, 내가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 앞에선 금방 울 수 있어. 동양에서는 남자가 우는 일이 흔하지 않고 터부시된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남자건 여자건 감정을 내보이고 우는 건 절대 창피한 일이 아니야. 오히려 그걸 참고 숨기는 게 문제지. 참고 참았다가 나중에 화병이 되거나 폭력적으로 되는 게 더 나쁜 거야. 참으면 더 큰 병이 돼. 나도 한동안 불안장애를 앓았지만, 지금은 사람들에게 숨기지 않고 얘기해. 그건 절대 창피한 일이 아니니까.

- <그가 처음 울던 날> 중에서, p56

불안 장애를 앓았던, 눈물이 많은, 외국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마 작가 역시 틴더를 깔고, 남자를 만났지만 진짜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남자를 만날 기대를 한 건 아니었을 거다.

둘의 사랑은 낯섦과 불안과 (한국과 베를린의 거리만큼) 언젠가 한 번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애달픔과 그럼에도 달달함이 합쳐진

특별하게 포장될 수 있는 '사랑'처럼 보였다. 처음엔.

글을 읽을수록, 둘의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사랑은 결국 '포장'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사랑'이구나 싶어졌다.

"불안해서 그래. 불안하니까 너한테 계속 확인받으려는 거야. 네가 날 좋아한다는걸, 나랑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걸 자꾸 말로 들어야 안심이 돼. 왜 불안하냐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야. 나의 불안이 그냥 감기처럼 찾아오는 거야."

그가 불안해할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걸 알았다. (중략)

나 또한 스벤을 만나기 전, 냉소적이며,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고, 우울한 마음이 한 편에 있었다. 그 우울함은 사실 <타임아웃 서울> 매체를 그만둔 이후부터 조금씩 생겼다. 온 애정을 쏟아부어 만든 매체를 예상치 못한, 심지어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접어야 했던 것이 내게는 큰 상처와 우울이 됐다. 그런데 애써 괜찮은 척, 밝은 척하며 지냈다. 곧 괜찮아질 거라고 방치했다. 여름마다 베를린으로 온 건, 사실 일종의 도피였다. 어디로든 서울이 아닌 곳으로 떠나고 싶었고, 베를린에 오면 그나마 잠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중략)

"날 떠나지 않을 거지? 계속 나랑 같이 있을 거지?"

오늘도 그가 똑같은 불안의 질문을 한다. 이제는 애 또 묻냐고 되묻는 대신,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몇 번이고 속삭여준다.

"응, 난 너랑 같이 있을 거야. 널 떠나지 않을 거야. 너도 내 옆에 있어줄 거지?"

내가 듣고 싶은 말. 그 말을 아끼지 않고 스벤에게 한다.

- <나의 불안이 감기처럼 찾아온 것뿐이야> 중에서, p77

 

 

언젠가(정말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내게도 그런 시간이 찾아온다면 몇 개월 살아보고 싶은 곳이 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그랬고,

최근 1,2년 사이에는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내게 그렇다.

작가가 현실 도피처럼 선택했던(찾아갔던)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 또 다른 삶의 방향을 찾아내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낯선 곳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게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그 여행에 지금의 짝꿍이 동행을 하게 될지, 아이들이 함께 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되도록이면 혼자, '나'로 떠나는 여행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지고 있다.

'사랑' 이야기에 (빠져서) 여행기로서의 책 이야기를 놓친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들지만,

그건 다시 이 책을 읽게 될 또 다른 독자들의 재미로 남겨둬야겠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를 챙겨 마음에 담고 이 책을 책꽂이에 이쁘게 꽂아 두기로 했다.

언제가 내가 여행을 위한 가방을 싸게 될 때, 다시 이 책을 꺼낼 수 있으면 좋겠다(여행을 떠나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마음에 챙겨 담은 한 가지는 이거다.

'나이가 들수록 유연한 삶의 자세를 잊지 말자는 것'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의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으니

지금 내 삶을 불행이나, 행복으로 평가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으로 여기면서

일어날 수 있는 많은 가능성들에게 너무 눈치 주거나, 거리를 두지 말자는 것.

나도 베를린에서 살고 싶은 때가 있었다. 뭘 해도 자유롭고 새로운 것 투성이인 이 쿨한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걸 훌훌 털고 오기엔 용기가 없었다. 30대 중반이란 나이도 그땐 늦었다고 생각했다. 여행 기사 쓴답시고 자주 외국을 다닌 것도 다른 도시에 살고 싶은 갈망을 줄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내 집 있는 서울이 좋았다. 외국에 나가면 나갈수록 서울만큼 살기 편한 도시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내 영혼의 한식이 있는 서울을 굳이 떠날 이유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나가면 고생'이란 생각만 늘고, 도전정신은 안일함, 귀찮음과 자주 맞바꿔 먹었다.

이런 내가 다 늦게, 갑자기, 베를린에서 살게 됐다. 거창한 계획도 없이, 베를린에서 만난 남자 하나 믿고 옮겨와 살고 있다. 온갖 애정으로 사들인 서울의 살림살이며, 친구며, 가족을 다 서울에 두고 왔다. 베를린에서 뭐해 먹고 사나 하는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서울이든 베를린이든 어디서나 하는 것. 프리랜서 작가로 오래 살았고, 한 직장에 매인 몸도 아니어서 결정하기가 쉬운 것도 있었다. 하지만 베를린에 훌쩍 오게 된 건 뭐랄까, 나이가 들수록 삶이 유연해졌달까. 아니면 만만해졌달까.

- <베를린으로 오는 건 평생의 꿈이었어> 중에서,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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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나와 당신을 돌보는 글쓰기 수업
홍승은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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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를 규정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생각하다가 '나'를 똑 부러지게 설명할 혹은 표현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조금 침울해지기도 한다.

엄마, 직장인, 딸, 며느리 같은 거 말고,

진짜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게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때론 누군가에게 와~ 하는 시선을 받는 그런 표현이면 좋겠다 싶어질 때 잠시 멈칫한다.

그건, 진짜 '나'인가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러니까 여전히 갈팡질팡.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글을 쓸 때마다 주위 환경이 재배치되었다. 이혼이 불행한 게 아니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견고한 사회가 불행하다는 것, 여자의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 성별 이분법과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면했던 나의 입체적인 면도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학교 밖 청소년이었기에 일찍이 제도권 밖에서 살아갈 다양한 방식을 모색할 수 있었고 정상 궤도를 이탈했기에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을 기를 수 있었다. 나는 이혼한 집 딸, 전문대 출신,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라는 몇 가지 단어로 간편하게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밀크티와 공포영화, 비 오는 날, 동물, 따뜻한 대화,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뭔가 이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주 우울하고, 주기적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무엇이었다. 쓰는 과정을 통해 나는 배웠다. 사람은 몇 가지 키워드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존재라는 사실을. - <"승은 씨에게 쓰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중에서.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대학에 입학해 다시 처음부터 소설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을 때

'나'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했다. 모든 글은 '나'로부터 시작된 다는 것.

그 이후 쓰게 된 나의 소설들은 대부분 어둡고, 누군가 부재하고, 떠나거나 상처받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은 그냥 개인적인 서사로만 남았다. 늘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생각과, 나의 언어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타인의 모습으로 둔갑시켜 표현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타인을 떠나 표현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여러 가지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런 작은 깨달음들은 결국 나를 '소설'에서는 조금 멀어지게 했으나

또 다른 글쓰기를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독서란 책을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한 사람의 시선과 삶의 단편을 기록한 책을 통과할 때마다 나는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지난 시간이 재배치되었고, 상처를 응시할 수 있었고, 외면했던 감각을 믿게 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관념의 집약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재하는 공간이다.

나에게 '읽다'라는 '경험하다'와 같은 말이었다. 내가 마련한 이 책이 당신에게 작은 자유를 선물하는 하나의 경험이 되길 바란다. 함께 쓰고 읽는 시간을 기록한 이 공간이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도 안전한 그곳이길 바란다. 이제 내 글의 마침표를 열고,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시간이다. -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중에서.

 

'읽는'다는 것과 '쓴 다는 것'

일상을 매일 살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된 두 행위는 때론 아주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쌓였을 때 느껴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정들을 경험하게 한다.

읽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아가고, 당신의 아픔을, 당신의 공간과 시간을 이해한다.

쓰는 행위를 통해 당신을 통해 알게 될 것들을 다시 '나'에게 대입시켜보면서 진짜 '나'와 마주한다.

때론 그것들은 아픈 상처를, 과거를 떠올려야 하는 힘든 일이 되기도 하고,

즐거운 일을 더 즐겁게 추억하게 되는 신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분명한 건 '읽는' 일과 '쓰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해 가다 보면 누군가를, 사회를, 나를 한 가지의 시선으로 편협하게 바라보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진다는 것. 불편한 일에 대해, 불편한 사회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덜 두려워진다는 것.

이건 내가 경험한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2년 전, 저자의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를 읽었을 때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동안 내가 가진 사회적 편견과,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고,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생각을, 가치를, 편견을 툭, 건드릴 수 있다는 일이, 그런 말을 두려움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저자가 부러웠다.

 

2년의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 저자의 책을 다시 만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 내 이야기가 선정적이고 비현실적으로 여겨질까 두려울 정도로 나는 많은 시간 동안 흔들리고 상처받았다. 그렇지만 나의 나약함을 말하고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었기에 아파도 불행하지 않았다. 상처는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때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고 했던가. 덧붙여, 상처는 연결될 때 더 이상 상처로만 머물지 않는다. 목소리가 목소리를 부른다. 내 글을 통해 나라는 타인이 당신에게 전달되길 바라고, 당신의 이야기도 말해지고 들리길 바란다. 그 과정은 분명 불편한 일이겠지만, 우리를 자유롭게 할 거라고 믿는다. 나는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다. 그래서 함께 자유로우면 좋겠다.' -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저자의 말 중에서

불편한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함께 살아가는 일.

이제 그 목소리들을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들려달라고, 그래서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로워 지자고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짧은 시간이 참 소중했다.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하는 힘, 살아가는 힘,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 말할 수 있는 용기, 혼자 숨어 힘든 상황을 견디어 낸 이들에게 보내는 다정한 위로였다면

이번 책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는 어떻게 하면 함께 읽고, 쓰는 일을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지,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얼마나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함께 해보자고 손 내밀어 준다.

"도대체 글을 쓰는 게 무슨 소용이죠? 이렇게 쓴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글을 쓸 때마다 자주 D의 질문을 떠올렸다. 쓰는 일의 의미는 뭘까. 우리가 쓰는 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글이 견고한 세계에 티끌만큼의 흠집이라도 낼 수 있을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질문 앞에서 내가 내놓은 대답은 매번 초라하게 느껴졌다.

- <기꺼이 슬픔에 잠기는 사람들 : 타인에게 상처받고 영향받기> 중에서.

D의 말은 맞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다고 세상이 갑자기 아름답게 바뀔 리 없다.

불편한 일은 여전히 불편한 채로, 잘못된 일은 여전히 잘못된 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쓴다. 그리고 나는 쓰고 싶어 한다.

저자의 말처럼, 함께 글을 쓰는 일을 통해 타인의 슬픔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나의 슬픔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글을 쓸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말이 주는 힘만큼이나 글이 주는 힘이 크다는 걸 나는 믿는다.

불편한 생각들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글을 읽을 때면 언제부턴가 괜히 고마워진다.

견고한 세계에 티끌만큼의 흠집, 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흠집을 내려고 노력했던 우리는 달라질 수 있다고도 믿는다.

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점이 나는 두렵다. 혼자 쓰고 읽는 일기와는 다르게 타인에게 읽히면 내 한계가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감 없이 드러나는 내 인식의 한계를 접할 때마다 멈칫하고, 내가 쉽게 타인의 고통을 글의 기폭제로 이용할까 봐 긴장한다. 때로 글은 삶을 쉽게 왜곡하고, 비틀고, 조롱하니까.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한계를 폭로하고 해체하는 글쓰기는 가능할까. (중략)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지녀야 할 태도를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는 내 위치의 한계 알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기.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고통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쓸 수 없는 말을 쓰기. -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걸 : 멈칫하는 태도가 필요한 순간> 중에서.

만약 내가, '읽는'일을 하지 않았다면,

'쓰는'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쉽게 이해한다고 적었을 것이다.

이해해요.라는 말이 때론 얼마나 이기적인 말인지, 때론 얼마나 가벼운 말인지 이제는 안다.

우리가 쉽게 내뱉는 타인을 향한 평가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도 읽고 쓰는 일을 통해 배웠다.

저자의 글 속에서 나는 다시 '읽고'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로부터 시작된 글쓰기가, 우리를 어떻게 연결해 주는지 생각한다.

그 연결됨을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넓은 세계로, 또 다른 인식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다.

생각 없이 쓰는 언어가 실재하는 존재를 어떻게 지우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쉽게 말을 뱉지 않는다. 나는 이런 태도가 글을 쓸 때도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게 보면 문자 언어도 일부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지만, 적어도 글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말을 걸 때는 시대의 감수성에 섬세하게 다가가는 서사와 표현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섬세한 언어에 관한 잣대 역시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구술 생애사나 현장을 전달하는 르포의 경우에는 정제된 언어가 자칫 당사자의 역사나 계급성을 지울 수 있다.

내 표현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누구의 얼굴을 지우는지, 그 표현으로 누가 사회적 공간에서 밀려나는지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편견에 휩싸여 소중한 존재에게 "그러다가 너 맘충돼"라거나 "너 된장녀 같아"라고 말하는 무지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비문이나 맞춤법은 수정하면 그만이지만, 차별적인 언어는 누군가의 상처를 찌르고 눈물샘을 건드린다. - <얼굴을 지우는 말들 : 무해한 글을 쓰기 위한 고민> 중에서.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듯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일기장에 남몰래 적는 글이 아니라면 그 글은 언제나 타인을 향해 있다.

자신의 생각이 오롯이 옮겨지는 게 글이라면 글을 쓰기 전에, 아니 다 쓰고 나서라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 내가,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건 아닌지.

결국 그 상처가 다시 돌아 나에게 올 것은 자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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