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아내, 엄마 지금 트러블을 일으키다 - 신나리 페미니즘 에세이 스토리인 시리즈 9
신나리 지음 / 씽크스마트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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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은 자기 검열의 기준이 된다. 스스로 조건에 부합된다 느낄 때만 비키니를 편하게 입을 수 있는데, 이때 '대상화'를 감당하는 것도 자기 몫이다. 비록 칭찬이라 해도 몸매 품평을 받아들일 각오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 날씬하지 않은 여성이 몸을 노출하면 '민폐'라고 규정하는 '사회적 규범'은 엄연히 존재한다.

이런한 규범은 내 몸을 '물건'처럼 바라보게 한다. 기준에 근접할 경우 '봐도 좋다고 과시하는 몸'이 되며, 그러지 못할 땐 '숨겨야 하는 몸'이 된다. 어떻게 입든 자유이자 취향이라고 말하지만, 마르거나 뚱뚱하거나 젊거나 늙은 사람 누구도 실상 자유롭지 못하다.

- <비키니를 버리지 않은 이유> 중에서, p51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좋든 싫든 하루에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의 매일 만난다.

"어머, 선생님. 흰머리 봐봐"

"야, 이제 조 선생도 나이 드는구나."

"염색할 때 됐다 그치?"

가깝든, 적당히 거리가 있든 사람들은 쉽게 말했다. 보이는 대로 말했을 테니 절대 악의는 없었을 거다.

작가의 '타인의 시선은 자기 검열의 기준이 된다'라는 문장을 읽다 생각했다. 내가 새치 난 머리를 참지 못하는 건 '타인의 시선'에 맞춰진 자기 검열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면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었을까.

『 여자, 아내, 엄마 지금 트러블을 일으키다』는 다섯 개의 챕터로 진행된다.

1장. 꾸미지 않은 채 살고 싶다

2장.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3장. 오늘도 난 아이 앞에서 미친년이 됐다

4장. 지금 나는 잉여력을 충전중입니다

5장. 온전히 불완전해질 자유가 필요해

삶은 성취가 아니라 지루한 반복의 연속이다. 이걸 모르고 뭘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왔지만, 나이 마흔, 물러설 수 없이 받아들일 때다. 생애주기 매 순간이 어차피 미완성이다. 부족함은 필연이다. 나이에 걸맞게 도달해야 할 성숙의 기준은 없다. 마흔 줄에 접어든 내 친구 중 그거 이룬 사람 한 명도 못 봤다. 만나면 우리의 대화는 늘어나는 주름, 뱃살, 집값과 부동산 정책, 퇴사 고민뿐. 여기에서 자유로운 자는 없다. 그저 20대의 고민만 반복하지 않아도 성공이다.

목표 설정 자체를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적어보았다. 내가 되고 싶거나 이루고 싶은 일이 아니라 단지 하고 싶은 것들을.

글을 계속 쓴다. 나의 생애 경험을 세심하게 증언하고 싶다. 아이와 여행을, 아무 목적 없이 다니고 싶다. 요가 동작을 잘하고 싶다. 가볍고 민첩하게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날까지. 바다에서 머리 들고 유유히 수영하는 법도 익힐 테다. 똑똑해지고 싶다는 허영은 차마 버리지 못하겠다.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라도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꼼꼼히 읽어 나의 언어 일부로 만들고 싶다. 요리를 즐기지 않지만 한 끼에 소박함과 정갈함을 담으려 한다. 매일 아침 창을 열러 찬바람을 맞아들이겠다. 햇살 아래 고슬고슬 마른 이불깃의 감촉을 사랑하자.

나의 피로와 혼란을 돌보며 살려 한다. 힘들면 잠을 자는 일에 왜 아직도 머뭇대는가. 외부 자극을 차단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 아닌데. 월등한 생산력을 뽑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닦달하지 않기 위한 휴식을 하고 싶다. 쥐어짜내고 갈아가며 달리던 그때로 돌아가지 않겠다.

- <마흔, 그 무엇도 되지 않을 자유> 중에서, p295-296

1장부터 3장까지 치열하게 달린다. (치열하게 어떤 면에서는 과격하게 쓴다). 작가가 그동안 여성으로, 엄마로, 아내로 살면서 무수히 싸우며 성취한(여전히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치열한 기록이다.

4장과 5장으로 가면서 그간 작가가 치열하게 싸우며 깨달은 것들을 통해 터득하게 되거나 추구하게 된 삶의 방향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나의 피로와 혼란을 돌보며 살려 한다'는 문장에 와서야 바짝 긴장했던 마음을 살짝 놓을 수 있었다.

읽는 나 역시 한 문장 한 문장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읽게 됐다. 내가 여성으로, 엄마로, 아내로 살아가며 느꼈던 부당함과 상실감, 피로와 고됨의 흔적들을 글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치열하게 싸우지 못했다. 이제야 겨우 아닌 걸 아니라고, 불편한 걸 불편하다고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2장. <부부란 무엇인가>을 읽으면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작가는 거의 독박에 가까운 육아를 감당하며 참지 않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남편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아이가 막 세 돌이 될 때쯤이었다. 어느 날 남편에게 통보했다.

"오늘 밤 이야기 안 하면 내일부턴 나 없을 거야."

몸이 너무 아파 아이를 보다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다고 해도 회사에 일이 많아 올 수 없다고 했던 그는 바로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그날 남편과 담판 지었다.

"당신을 내 인생에서 버릴 거야. 그렇게 몸 바쳐 사랑하는 회사랑 평생 살아."

회사에 그렇게 다니며 아이를 보지 않을 거라면 가족을 포기하라고 했다. 어차피 얼굴 못 보는데 따로 살자고 했다. 눈물이 차오르고 목이 메는 것을 꾹 참고 남편의 눈을 정중앙으로 노려보면서 또박 또박 말했다. 그동안 내가 울부짖어대며 했던 수많은 말 앞에서 그는 지겹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잠을 자버리곤 했지만 오늘 나의 최후통첩에 남편의 눈이 벌게졌다.

- <육아로 유지하는 부부간의 결속> 중에서, p123

최후통첩 후 작가는 다시 선택권을 넘겼다. "3개월 내에 퇴직, 이직, 휴직 중에 결정해." 그렇게 남편은 2개월의 짧은 육아휴직을 냈다. 그리고 작가는 남편의 육아휴직 기간 동안 남편이 자신에게 했던 것만큼 똑같이 했다. 아침 일찍 나가 늦게 들어오고, 육아와 가사에 손을 보태지고 않고,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어도 모른척했다. 그 사이 남편은 그걸 혼자 다 했다. 민감한 양육자가 되어 갔다.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의 첫 책 『엄마 되기의 민낯』에 담아냈다.

물론 이걸로 끝은 아니었다고 작가는 말했다. 휴전은 있을지언정 종전은 없다고. 남편은 다시 복직을 했고 여전히 아이 양육은 필요했으니까. 그럼에도 작가는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그게 남편과 다정한 사이를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쯤은 개의치 않았다. 여기서 나의 고민과 혼란이 시작됐다.

그리고 한 장면이 떠올랐다.

며칠 전 아침. 나는 분주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작은 아이 등원 준비를 시키고, 큰 아이를 깨워 등교 준비를 시켰다. 나의 출근 준비는 더 일찍 일어나 미리 준비를 마친 뒤였다. 식탁 주위를 분주히 오가는 데 거실 너머 베란다 창으로 여유롭게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남편의 뒷모습이 보였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던 창 앞에 앉아 있는 남편은 거실과 베란다 창 사이를 두고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해 내가 있는 곳은 전쟁터, 그가 있는 곳은 세상 한가로운 휴양지 같은 느낌이었달까.

식탁으로 와 앉으며 남편은 입을 열었다. "좋네요. 잠깐의 여유를 즐겨보세요." 그때 내가 해야 할 말의 정답은 뭐였을까? 아니 아무 말 없이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수프 그릇을 집어던져야 했을까?

그때 나는 그냥 웃었다. 그 웃음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의미 없는 웃음에 가까웠다. 날선 말로 아침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대체로 그랬다. 물론 우린 치열하게 싸워야 할 만큼 육아 문제로 부딪치지 않았다. 적절한 선에서 알아서 나눠했고 알아서 서로의 감정을 살폈다. 그럼에도 그날 아침의 풍경이 쉬이 잊히지 않았다.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았구나. 부부 사이의 날선 대립이 싫었던 거구나. 불편한 공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넘어갔구나. 그럭저럭 괜찮은 부부 사이를 유지하고 싶었구나. 대체로 늘 그랬구나.

여전히 답은 모르겠다. 그럼에도 생각이 많아졌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 몇은 나처럼 2장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결혼이 죽을 때까지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예감과 기대가 오늘의 나를 더 치열하게 살게 했다. 남편의 생계 부양에 의탁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일하고 무리한 빚을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35년 대출로 두 사람이 평생 묶이는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되니까. (...) 남편과 정서적으로 관계가 좋지 않더라도 두렵지 않게 됐다. 한 몸처럼 붇어 있는 부부가 아니라 현재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동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걸 그와 나누려 하지 않는다. 가족은 나를 완전히 충족해 줄 수 없음을 인정했다. 가족을 영원히 공동체가 아닌 인생 전체의 일부분에서 협업하는 공동체라고 여기니 의뢰로 많은 부분에서 관대함이 생겨났다.

부부란 무엇일까. '백년해로'라는 말은 낭만적이면서도 억압적이다. 그 말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왜 결합된 부부만을 완전하게 볼까. 독립된 개인을 온전한 주체로 볼 수는 없을까.

-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p172

작가의 첫 책 『엄마 되기의 민낯』은 내겐 최고의 육아서였다.

큰 아이를 키우며 육아서를 정말 많이도 읽었다. 읽으면서 불편함을 많이 느꼈지만 그래도 매달릴 데가 없었다. 그래서 읽었다. 어느 순간 육아서에서 말하는 엄마의 행복이나 자아 찾기 같은 말들이 엄마들에게 또 다른 폭력은 아닌지 고민하게 됐다. 그 즈음 작가의 책을 읽었다. 속 시원했다. 그래 그거지. 육아는 힘든 거지. 그게 당연하지. 그걸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엄마가 잘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게 이상한 거지 싶었다. 첫 책 속에 등장하는 아이는 어느새 자라 초등학생이 되었다. 첫 책이 아이의 탄생과 영아기 육아를 거치며 나온 육아 이야기라면 이 책 속엔 5살 이후부터 초등학생 이 된 아이의 육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역시 시원했다. 나도 자주 아이 앞에서 미친년이 되니까. 별거 아닌 일에 욱하기도 하고, 감정 조절이 안돼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중이라 '좋은 엄마' 프레임 앞에 위축되곤 했다. 작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 괜찮을 것도 같다. 아이랑 좀 싸우면 어떻고, 엄마가 좀 덜렁대면 어떻고, 헌신하지 못하면 어떠랴 싶다. 엄마와 아이를 보살펴야 하는 사람, 보살핌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하고 싶어진다.

누군가가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개인의 마음가짐을 바꿔 먹거나 능력치를 높이기보다 자신이 위치한 배치를 바꿔보라고. 혼자 하는 육아가 힘들다면 혼자 하는 능력치를 올리기보다 어떻게든 나눌 사람을 찾아야 한다. 자꾸만 무료해지고 몸이 가라앉는다면 답을 육아 속에서 헤집으며 찾는 일은 멈추어야 한다. 아이와 노는 게 재미없다면 차라리 나의 놀이를 모색해야 한다. 몇 시간이라도 어린이집에 보내는 이유, 주말이면 혼자만의 시간을 꼭 가지는 이유는 나를 둘러싼 물리적 조건을 배열하기 위해서다.

- <육아가 할만해 질 때, 힘들어질 때> 중에서, p197

엄마는 슈퍼우먼이 아니다. 슈퍼우먼으로 살 필요도 없다. 그냥 살면 된다. 작가의 말처럼 계속해서 엄마 능력치를 높이려고 노력하는 대신 개인으로서의 능력을 높이려고 애쓰는 편이 훨씬 멋지지 않을까.

앞이 보이지 않는 육아 터널을 건너고 있다면, 지겹게 남편과 기싸움 중이라면, 여성과 엄마와 아내 사이에서 갈팡질팡 중이라면 이 책을 슬쩍 권해 본다.

『엄마 되기의 민낯』과 『여자, 아내 엄마 지금 트러블을 일으키다』 두 권을 같이 읽는다면 더 좋겠다.

우리는 계속 자란다. 어렸을 때만 자라는 게 아니라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매일 자란다. 신체가 노화하는 만큼 마음은 성숙해진다. 세상엔 '엄마'만으로 살기엔 멋진 일이 너무 많다. 조금 멀리 내다보며 살고 싶다. 지금 아웅다웅하는 삶이 전부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내 안의 나를 더 채운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분담은 일의 종류로 나누는 게 아니어야 한다. 또 누가 얼마나 많은 일을 언제 하느냐는 오히려 부차적이었다. 중요한 건 시간에 대한 압박을 나누는 거다. 매일 하는 일에서, 시간에 쫓기는 일에서 나누어야 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나누어야 한다. ‘시간이 나면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하는 일‘을 나누어야 한다.

- P116

아이를 돌보는 책임감은 부부 둘이 온전히 나누어 가져야 한다. 아이를 보기 위해 남편의 시간 역시 아내만큼 쪼개져야 하고 그만큼 빠듯해져야 한다. 시간이 나면 아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어 아이를 보는 게 맞았다. 아빠도 주 양육자로서 정체성을 갖춰야 했다. 그러나 남편은 여전히 수동적이었다. 다 년간에 경험 끝에 다정하고 친근한 말로 부탁하는 일도, 눈물로 호소하는 일도, 붙잡고 논리로 설득하는 일도 불가능함을 알았다. 직장일의 완강한 중력은 남편을 제자리로 돌려두곤 했다. 여성에게만 주어진 양육의 기본값, 그것이 있는 한 협상이 되지 않았다. 통보로 밀고 나갔다. "이것 좀 부탁해"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으로 배치를 구성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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