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재미라도 없든가 읽어본다
남궁인 지음 / 난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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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의 읽어본다 시리즈는 총 다섯 권.
그중에서 앞서 읽은 요조의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과 남궁인의 <차라리 재미라도 없든가> 두 권을 골랐다. 그냥 내가 알고 있는(한 번이라도 저자의 글을 접한 적 있는) 친근한 저자라는 이유로.

두 권의 책을 다 일고 나니, 나머지 세 권의 책이 읽고 싶어졌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지점을 발견했는데,
같은 책을 읽고 나서 느끼는 감정이 모두 다르다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같이 놓고 읽어보니 이게 꽤 재미있는 거다.

비슷한 시기에 여러 명이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 책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을 적은 글이 모두 제각각이다.
그런데 그 제각각인 사람들의 생각을 읽으면서 아,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아, 이 사람은 그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구나. 나는 이랬는데... 이런 비교들과 함께 독서 자체가 흥미로워지는 거다.
(아마 이런 이유로 사람들이 모여 독서모임을 하고, 책을 나누는 시도를 하는 거겠지).

대부분 혼독을 하는 나는 이 흥미로운 경험이 세 권의 책으로 더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곧, 읽어본다 시리즈 나머지 세 권이 내 손에 들려 있을 듯......

 

 남궁인의 <차라리 재미라도 없든가>는 군더더기 없는 서평이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놀란 건, 응급의학과 의사가 이렇게 책을 읽을 시간이 많다니... 하는 생각.
환자를 보는 시간 외에 나머지 시간 대부분을 독서에 쏟아붓지 않고서는 이렇게 많은 책을 일 년에 읽어낼 수 있을까 싶다.
그러니까,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읽는다는 건 어쩌면 핑계(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래서인지, 아니면 저자의 글쓰기 스타일이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글에 대한 감상(줄거리)와, 저자의 주관적 경험이나 느낌이 적절하게(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딱, 균형을 맞추는 듯한 느낌이 든다.

 

 

 

위의 사진은,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을 읽은 남궁인(왼쪽), 요조(오른쪽)의 기록이다.
글을 짧고 길고의 차이가 아니라, 앞에서 말했듯 같은 책을 읽고 기록하는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일이 흥미로웠다.
나 역시, 이 소설을 읽고 짧은 감상을 적었었는데 역시나 이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글이 되었고.

이렇게 찾아볼 수 있는(겹치는 작품) 글들이 꽤 있다.
그렇게 찾아도 보고, 내가 읽고 쓴 글도 다시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한 시간들이었다.

내가 읽지 않은 책들 중 읽고 싶어지는 책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도 큰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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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
무레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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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이 60이 되면 우리 애는 뭐가 돼 있을까?', '내 나이 60이 되면 남편이 뭐가 돼 있을까?' 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건 아이와 남편의 몫이다. ' 내 나이 60이 되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내 나이 60이 되면 나는 어느 장소에 가장 많이 가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 김미경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p120>

예전에 읽은 책 중에 김미경의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에서 오래도록 꼭! 기억하고 싶어서 다이어리에 적어두었던 문장이다.
그 책을 읽고, 나이가 들었을 때 남편, 자식이 아니라 '내'가 뭘 하고 있고, 어디에 가 있는지가 중요한 사림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다짐은 지금 내가 하루하루 열심히 살게 하는 긍정적인 자극이 되고 있다.

'예순'이라는 나이도 굉장히 많은 거라고, 그즈음 되면 할머니지. 늙은이라고 불려도 이상할 것 없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멋진 할머니가 나타났다.
아흔 살의 모모요. 아흔 살의 모모요에 비하면 예순은 아직 한창 젊은 나이 아니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나의 외할머니도 여든다섯이 넘어서까지 정정하셨고, 친할머니도 아흔이 다 되어 가신다(물론 지금은 몸이 많이 쇠약해지긴 하셨지만).

나이 듦에 대하여, 늙는다는 것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모모요 할머니는 1900년에 태어났다.
그 시대에 고등교육을 받았고, 전쟁을 겪었고, 그 시대의 여성들이 그랬듯 자식을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벌기도 했다. 자식들이 자라서 형편이 좀 나아진 뒤에도 25년이나 더, 80세가 될 때까지 지치지 않고 일을 했다.

'아흔 살'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꼬부랑 할머니거나 작은방 안에서 온종일 TV에 의지해 하루를 보내거나, 다 자란 자식들 눈치를 보거나.... 하는 모습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모모요 할머니는 시골에서 '혼자' 도쿄 여행을 감행하는, 목소리도 우렁차고, 다리에 힘도 넘치는 멋쟁이 할머니다.

모모요 할머니가 도쿄로 여행을 떠나면서 계획 한 다섯 가지.
1. 호텔에서 혼자 숙박하기
2. 우에노 동물원에 판다 보러 가기
3. 도쿄 돔 견학하기
4. 도쿄 디즈니랜드에서 놀기
5. 할머니의 하라주쿠에서 쇼핑하기

모모요 할머니는 이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 그것도 아주 멋지게.
내가 모모요 할머니에게 반한 건, 자존감이 굉장히 높은 할머니였다는 점.

편견일지 모르지만, 아흔 살쯤 되면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의 부양을 받으면서 함께 살고 있으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당당하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 그리 쉽지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모모요 할머니는 기죽거나, 눈치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집스럽게 자식들을 닦달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냥 자기 스스로를 지킨다.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굳이 자식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멋진 할머니가 된다는 건, 어쩌면 그런 모습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게 했다.
노인네가 왜 그럴까, 하는 말을 듣는 거 말고,
멋진 할머니네,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소망 하나가 생겼다.

이 책의 초판이 1995년, 모모요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발간되었다고 하니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멋지게 남기는 삶의 소중한 경험을 하고 떠나신 셈이다. 그것 역시 멋지지 않은가.

옮긴이의 말 중에서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옮긴다.

노인이 되어가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모모요처럼 나이를 먹는 것, 참 멋지지 않은가. 왕성한 호기심과 도전 정신, 몸은 바지런하고 씩씩하고, 나이 들었다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고. 어른이니 세상만사에 관대하고 너그러워야 한다고 애쓰지 않고. 나이에 대한 부담감 없이 세상 마이웨이로 사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 같다. 아흔 살에도 거뜬하게 혼자 여행 다니고, 스모와 프로야구 선수 이력을 다 외우고, 국제 정세까지 밝고, 부럽기조차 한 이상적인 노인상이다.
모모요의 파란만장한 아흔 살의 일대기. 삶이 뻑뻑하게 느껴질 때, 한 살 두 살 먹는 나이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 아무 생각 없이 페이지 넘기며, 이 에너지 넘치는 할머니 얘기 한번 읽어볼 만 하다. 나는 아흔 살 할머니보다 더 노인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뜩 드는 것 같다. - 옮긴이 권남희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 멋지게 늙어가고 싶은 이들, 지금 삶조차도 무기력해 몇 십 년 뒤의 삶은 떠올리기조차 싫은 사람들. 속는 셈 치고 한 번 읽어보자. 그냥 심심풀이로라도 좋다. 아흔 살 모모요 할머니의 기를 팍팍 받을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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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 읽어본다
요조 (Yozoh) 지음 / 난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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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적는다는 게(짧든 길든, 전문적이든 아니든)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읽는 시간만큼 쓰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쓰는 시간만큼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특히 나처럼 줄거리를  요약하는 재주가 없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럼에도 내가 내 멋대로,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이유는,
그때의 그 기분, 느낌, 감정, 나의 상태에 대해 기록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쓰고 싶고, 써야 하는, 그래야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구나, 나답게 살고 있구나 싶어지는 내게 주는 최소한의 선물 같은 거. 위로 같은 거.
나중에, 오랜 시간 뒤에라도 내가 남긴 글 한 줄이 나를 기억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 같은 거.

 

 난다의 읽어본다 시리즈로 기획된 다섯 권의 책 중 하나.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을 쓴 요조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했다.
"창작의 고통이 아니라 성실의 고통에 괴로웠다.
 나중에 또 이런 걸 하자고 누가 꼬드긴다면
 그때는 정말 진짜 죽어도 안 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승낙할 것이다."

어쩐지 저 말의 의미를 알 것만 같다.
매일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을 일기 쓰듯 적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다.
일기가 밀리면 괜히 마음이 불안하듯 말이지.

책을 읽기 전에, 어떤 책일까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책 자체에 대한 매력이 있다기보다는 이 사람이(요조) 내가 읽은 책과 얼마나 많은 책을 함께 읽었나 세어가면서 읽었다.
나도 읽은 책이 나오면 반가웠고, 내가 느꼈던 감정과 어떤 비슷한 느낌을 적은 듯 보이면 신이 났다.
일방적으로 혼자 읽고 있지만, 그냥 대화하는 듯한 느낌.

2017년 1월부터 6월까지 읽은 책은 일기처럼 적었고, 7월부터 12월까지는 읽은 책의 리스트만 실려 있다. 매일이 아니더라도 하반기의 읽은 책들도 함께 소개되었으면 더 좋았을 듯하다.
잘 썼다 못썼다, 좋다 아니다를 이야기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서 좋았다.

 

 다 읽고 나면, 결국엔 또 읽고 싶어진다.
그녀가 읽은 책들 중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책들을.
그리고 또 쓰고 싶어진다.
내가 읽은, 내가 만난 책들에 대한 이야기와 나에 대한 이야기들을.

PS. 전문적인 서평을 기대하고 읽지는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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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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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창가로 들긴 전, 어둠 속에 멍하니 누워 있는 기분.
알람이 울리기 전 일어나 조금은 느긋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흔치 않은 어느 날의 느낌.
우연히 오래전 헤어진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하곤 쿵, 쿵. 쿵 심장소리가 느껴지는 기분.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 유년 시절로 한 발짝 다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그대로 오래 누워 있었다.
어쩌진 자꾸, 잊어버린 누군가가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러다 정말 떠오르면 안 될 것 같아 아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상한 느낌이다.

오랜만에 전경린의 소설을 읽었다.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내내 읽으면서 그 소설들에 익숙해져서 인지 처음엔 '뭔가 올드 한 느낌이야'라고 생각했다.

이미지가 없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흐릿한 느낌의 소설이었다.
흐릿하다고 표현한 건, 나빴다는 게 아니라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에 가까운 표현이다.
매일 단짠단짠한 음식만 먹다가 간이 심심한 반찬들로 채워진 한 끼 식사를 한 느낌.
담백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느낌.

한 번도 강렬하게 무언가를 원하는 삶을 살지 않았을 것 같은, 늘 있는 듯 없는 듯 흘러가는 대로 살았을 것 같은 나애와 그녀를 둘러싼 희도, 강, 연태, 도희, 상, 수호, 엄마, 오원 언니....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힘들지 않은, 무겁지 않은 가방을 메고 발길 닿는대로 걸어가는 여행이었다.
그러다 힘들면 길가 아무 데나 앉아 잠시 쉬어가는 여행이었다.
길이 끝날 것 같아 아쉬운, 막상 다 끝났을 땐 휴~ 다행이다 싶었던 여행.

소설은 나애의 유년 시절인 1970년대와 나애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201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아버지의 근무로 가족들이 모두 이사 가면서 어린 동생과, 공부해야 하는 오빠들 대신 친척 집에 맡겨졌던 나애. 유년의 결핍과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오랜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뒤에 엄마와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나애의 모습이 짠하게 느껴졌다.

"너는 내가 죽어도 울지 않겠지?"
질문이 아니라 고백 같았다. 나는 엄마가 죽은 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나를 상상했다. 울지도 않고 그날을 보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나를.
"그런 생각을 해요?"
"밤마다 너를 생각한다."
"왜요?"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불리한 해명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울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어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식은 어떤 이유로든 결국은 울게 되는 것이다.
"사는 게 너무 지겨워서 밤마다 죽고 싶었다. 정말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다. 참 이상한 물건이지.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래 산다니. 아침마다 눈을 뜨면 내가 놀란다. 살아 있는 게 실망스러워."
늘 하는 타령이었다. 평생의 우울증과 결벽증이 말년에는 삶에 대한 염증으로 변했다. 지겨워서 못 살겠다면서 정돈과 청결과 노동과 사람의 도리에 대한 결벽증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p58

유년시절을 함께 보냈던 도희와, 상, 연태, 수호... 의지했던 이들은 한 명씩 떠나보내며 몸으로 체득한 이별의 감정은 성인 된 이후의 나애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강과의 헤어짐, 희도와의 만남과 헤어짐 역시 답답하지만, 아.. 나애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 묻고 싶은 게 있어. 나애, 너는 나를 정말로 원하지는 않는 거니?"
나는 당황했다. 정말로 원하는 것을 잃어버려본 사람에겐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사람은 대개 원하는 것을 갖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을 갖는다.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 대신 빚이든, 사람이든, 관념이든, 제도든, 조직이든, 나를 포획하려는 모든 것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내 호흡이 그리는 자유로운 곡선과 가벼운 일상과 우연, 약간의 일탈과 사치로 구성된 소박한 삶이었다. 세계라는 허상의 파도 위에서, 가능한 한 어디에든 갇히지 않고 하루하루 또박또박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했는지 모른다. 희도는 그런 때에 내게 왔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떨림도 없이. 내가 원하기 전에, 갈망하기 전에.
" 내가 원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 p44

유년 시절에 몸에 새겨진 상처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까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을 지배한다는 건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생적으로 남겨진 흔적 같은 거니까. 어떻게 해도 벗어버리거나 떼어버리거나 잊어버릴 수 없는 거니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유년 시절을 떠올렸다.
아직 그리 오래 살진 않았지만, 나의 몸에 새겨져 있을 나의 유년의 상처와 기억들이 너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와 사이좋게 잘 지내면 좋겠다. 가끔 투닥거리다가도 금세 화해하고 서로를 보듬어 주면 좋겠다.

"부모 자식 사이란 옳고 그른 것도 없이 그저 사람됨으로 감당하는 일인 거 같다. 예쁘게 감당하기도 하고 흉하게 감당하기도 하고. 자식에게는 그 관계가 가장 큰 시련이기도 하지. 나도 그게 참 힘들었지만." p223

세상에서 좀 더 선명하게 존재하기 위해서 완전히 낯선 장소에서 모든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낯선 도시의 골목을 걷다가 희귀한 수집품들이 나열된 작은 전시장들을 둘러보고, 음악이 흐르는 공연장의 어둠 속에 몸을 파묻고, 홀로 서점과 가게들을 기웃거리고, 틈틈이 차를 마시고, 자주 연착하는 기차나 버스를 타고 낯선 풍경 속을 지나가면서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거리를 정하고 후회와 고독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입장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상충에서 불분명한 형체로 서식하는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을 확인할 것이다. p242

자신의 고독을 받아들이고 침묵할 때 부유하는 여행이 끝나고 삶이 시작된다. 방과 몇 개의 사물을 소유하며 거기에 기대어 살듯, 사람은 고독에 기대어 자신의 삶에 정착한다. 그렇게도 완전한 자신만의 질서가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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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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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 하고 관리실에서는 동파로 인한 피해가 이어지고 있으니 베란다 세탁기를 돌리지 말라고 방송을 하고 있다.
서울 어머님 댁은 계량기가 파손되어 교체를 하셨다 했고,
친정 엄마는 베란다에 놔두고 신경 못 쓴 사이, 양파며 사과가 죄다 얼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언니는, 너무 춥다며 어쩜 이렇게 춥냐며 오가는 길이 괴롭다고 하소연을 했다.

휴가 중인 나는 코에 바람 들어갈 일 없이 꼼짝도 않고 집 안에서 따뜻하게 이불 뒤집어 쓰고 뒹굴뒹굴하고 있으니 최강 한파라는 말을 체감하지 못하고 겨울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이불 돌돌 싸매고 침대에 기대 <<바깥은 여름>>을 다시 꺼내 읽는다.
작년, 책일 발간되자마자 구입해 첫 소설을 읽곤, 그대로 덮어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어쩐지 그땐, 다 읽고 나면 너무 우울해질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 나중에, 나중에 다시 읽자 했더랬다.

갑자기 왜 그 책이 눈에 띄었는지, 결국 책을 꺼내 와 첫 소설부터 다시 읽었다.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감정.

 

 지난봄, 우리는 영우를 잃었다. 영우는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그 자리서 숨졌다. 오십이 개월. 봄이랄까 여름이란걸, 가을 또는 겨울이란 걸 다섯 번도 채 보지 못하고였다. 가끔은 열불이 날 만큼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웠지만 딱 그 또래만큼 그랬던, 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제 부모를 안을 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던, 이제 다시는 안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아이였다. 무슨 수를 쓴들 두 번 다시 야단칠 수도, 먹일 수도, 재울 수도, 달랠 수도, 입 맞출 수도 없는 아이였다. 화장터에서 영우를 보내며 아내는 '잘 가'라 않고 '잘 자'라 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양손으로 사진을 매만지며 그랬다. - <입동> 중에서.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이야기. 마치 너무 실제 같아서 읽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입동>은 이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 중 제일 처음에 실린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읽고, 다음 소설로 넘어가기까지 몇 개월이 걸린 셈이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이 소설을 읽었다. 여전히 저 문단에서 멈칫. <입동>은 무리해서 대출을 받아 새 집으로 이사한 뒤 세 식구의 보금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하려는 찰나,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죽은 아이, 남겨진 부모, 어느 하나 안타깝지 않은 게 없지만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남겨진 이들'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무엇보다 안타깝고, 아팠다.

<노찬성과 에반>,<건너편>,<침묵의 미래>,<풍경의 쓸모>,<가리는 손>,<어디로가고 싶으신가요> 여섯 편의 단편들 중 <건너편>,<침묵의 미래>,<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이미 다른 책을 통해 읽은 소설이었지만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때 좋았던 부분들은 여전히 좋았고, 다시 읽으니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 있어 더 좋았다.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이 묵직하다.
최강 한파라는 연일 계속되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집 안에서 따뜻한 공기만 느끼고 있는 나는,
안과 밖의 온도차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바깥은 여름>>은 바깥만 여름이라는, 안으로 들어오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상실의 아픔,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를 잃은<입동>, 아끼던 개를 잃은<에반>,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지는<건너편>, 남편과 이혼하고 혼혈 아이를 혼자 키우는<가리는 손>, 남편을 잃은<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이들의 남겨진 삶에 대한 이야기를 어찌 담담하게 읽을 수 있을까.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남겨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내 시선일지도 모르는>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감정이입이 자꾸 되면서.

다시 읽기를 잘했다. 천천히 읽기를 잘했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을 다 읽었고, 모두 소장하고 있다. 그중 지금까지도 어떤 작품보다 <<달려라 아비>>라는 소설집을 애정 해왔다. 이제 그 자리를 <<바깥은 여름>>이 차지할 듯.

도희가 침착한 얼굴로 이수를 바라봤다. 오래전, 이수가 현관을 나설 때면 ‘저 사람 저대로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길 가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가슴이 저렸던 기억이 났다.
- 이수야.
- 응.
-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건너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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