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빛이 창가로 들긴 전, 어둠 속에 멍하니 누워 있는 기분.
알람이 울리기 전 일어나 조금은 느긋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흔치 않은 어느 날의 느낌.
우연히 오래전 헤어진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하곤 쿵, 쿵. 쿵 심장소리가 느껴지는 기분.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 유년 시절로 한 발짝 다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그대로 오래 누워 있었다.
어쩌진 자꾸, 잊어버린 누군가가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러다 정말 떠오르면 안 될 것 같아 아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상한 느낌이다.

오랜만에 전경린의 소설을 읽었다.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내내 읽으면서 그 소설들에 익숙해져서 인지 처음엔 '뭔가 올드 한 느낌이야'라고 생각했다.

이미지가 없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흐릿한 느낌의 소설이었다.
흐릿하다고 표현한 건, 나빴다는 게 아니라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에 가까운 표현이다.
매일 단짠단짠한 음식만 먹다가 간이 심심한 반찬들로 채워진 한 끼 식사를 한 느낌.
담백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느낌.

한 번도 강렬하게 무언가를 원하는 삶을 살지 않았을 것 같은, 늘 있는 듯 없는 듯 흘러가는 대로 살았을 것 같은 나애와 그녀를 둘러싼 희도, 강, 연태, 도희, 상, 수호, 엄마, 오원 언니....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힘들지 않은, 무겁지 않은 가방을 메고 발길 닿는대로 걸어가는 여행이었다.
그러다 힘들면 길가 아무 데나 앉아 잠시 쉬어가는 여행이었다.
길이 끝날 것 같아 아쉬운, 막상 다 끝났을 땐 휴~ 다행이다 싶었던 여행.

소설은 나애의 유년 시절인 1970년대와 나애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201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아버지의 근무로 가족들이 모두 이사 가면서 어린 동생과, 공부해야 하는 오빠들 대신 친척 집에 맡겨졌던 나애. 유년의 결핍과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오랜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뒤에 엄마와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나애의 모습이 짠하게 느껴졌다.

"너는 내가 죽어도 울지 않겠지?"
질문이 아니라 고백 같았다. 나는 엄마가 죽은 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나를 상상했다. 울지도 않고 그날을 보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나를.
"그런 생각을 해요?"
"밤마다 너를 생각한다."
"왜요?"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불리한 해명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울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어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식은 어떤 이유로든 결국은 울게 되는 것이다.
"사는 게 너무 지겨워서 밤마다 죽고 싶었다. 정말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다. 참 이상한 물건이지.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래 산다니. 아침마다 눈을 뜨면 내가 놀란다. 살아 있는 게 실망스러워."
늘 하는 타령이었다. 평생의 우울증과 결벽증이 말년에는 삶에 대한 염증으로 변했다. 지겨워서 못 살겠다면서 정돈과 청결과 노동과 사람의 도리에 대한 결벽증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p58

유년시절을 함께 보냈던 도희와, 상, 연태, 수호... 의지했던 이들은 한 명씩 떠나보내며 몸으로 체득한 이별의 감정은 성인 된 이후의 나애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강과의 헤어짐, 희도와의 만남과 헤어짐 역시 답답하지만, 아.. 나애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 묻고 싶은 게 있어. 나애, 너는 나를 정말로 원하지는 않는 거니?"
나는 당황했다. 정말로 원하는 것을 잃어버려본 사람에겐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사람은 대개 원하는 것을 갖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을 갖는다.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 대신 빚이든, 사람이든, 관념이든, 제도든, 조직이든, 나를 포획하려는 모든 것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내 호흡이 그리는 자유로운 곡선과 가벼운 일상과 우연, 약간의 일탈과 사치로 구성된 소박한 삶이었다. 세계라는 허상의 파도 위에서, 가능한 한 어디에든 갇히지 않고 하루하루 또박또박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했는지 모른다. 희도는 그런 때에 내게 왔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떨림도 없이. 내가 원하기 전에, 갈망하기 전에.
" 내가 원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 p44

유년 시절에 몸에 새겨진 상처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까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을 지배한다는 건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생적으로 남겨진 흔적 같은 거니까. 어떻게 해도 벗어버리거나 떼어버리거나 잊어버릴 수 없는 거니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유년 시절을 떠올렸다.
아직 그리 오래 살진 않았지만, 나의 몸에 새겨져 있을 나의 유년의 상처와 기억들이 너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와 사이좋게 잘 지내면 좋겠다. 가끔 투닥거리다가도 금세 화해하고 서로를 보듬어 주면 좋겠다.

"부모 자식 사이란 옳고 그른 것도 없이 그저 사람됨으로 감당하는 일인 거 같다. 예쁘게 감당하기도 하고 흉하게 감당하기도 하고. 자식에게는 그 관계가 가장 큰 시련이기도 하지. 나도 그게 참 힘들었지만." p223

세상에서 좀 더 선명하게 존재하기 위해서 완전히 낯선 장소에서 모든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낯선 도시의 골목을 걷다가 희귀한 수집품들이 나열된 작은 전시장들을 둘러보고, 음악이 흐르는 공연장의 어둠 속에 몸을 파묻고, 홀로 서점과 가게들을 기웃거리고, 틈틈이 차를 마시고, 자주 연착하는 기차나 버스를 타고 낯선 풍경 속을 지나가면서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거리를 정하고 후회와 고독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입장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상충에서 불분명한 형체로 서식하는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을 확인할 것이다. p242

자신의 고독을 받아들이고 침묵할 때 부유하는 여행이 끝나고 삶이 시작된다. 방과 몇 개의 사물을 소유하며 거기에 기대어 살듯, 사람은 고독에 기대어 자신의 삶에 정착한다. 그렇게도 완전한 자신만의 질서가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p2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