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서유미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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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 밖으로 나오니 창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오빠와 동생에 전화해서 엄마를 모셔다드리고 왔다고 말했다. 딸의 출산 소식을 전하자 일이 겹쳤으면 얘기하지 그랬냐며 오빠와 동생은 각자의 성격대로 걱정하고 염려했다. 엄마는 좀 어떠셔? 두 사람의 질문은 거기에서 만났다. 오늘 엄마가 어땠던가. 나는 비로소 마음을 가라앉히며 하루를 돌아보았다. 입맛이 없었고 손에 땀이 자주 났다. 마음이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여기에서 저기로 자꾸 달려갔다. 한 페이지밖에 되지 않지만 책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지나간 것 같았다. 시간을 내어 찬찬히, 책장을 넘기며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떠올리자 이상하게 웃는 얼굴만 생각났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은 희미했다. 엄마가 많이 웃었다고 하자 오빠와 동생은 모두 울먹거렸다.
나는 시큰거리는 팔목을 천천히 주물렀다. 한 장면만으로 기억되는 하루, 하나의 표정으로 남는 얼굴도 나쁘지 않구나 싶었다. - <변해가네> 중에서, p179」

언제부턴가 서유미 작가의 소설에 빠져들었다.
그건, 환상이나 상상에 기대지 않는, 힘겹지만 철저하게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는 버티는 사람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버티는 사람들의 삶이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곤 했다.
작가의 최근 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는 늘, 한가지  '버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 친구의 이야기, 이웃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별것 아닌 하루하루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하는데, 그게 마치 내 이야기 같아서 푹, 빠져들고 말기를 여러 번.

이번 소설집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 역시 그랬다.
위에 발췌해서 적은 부분은 <변해가네>라는 단편의 마지막 문장이다.

딸아이를 결혼시키고 나서야 이혼을 실행에 옮긴 한 여자.
딸이자, 엄마인 한 여자의 삶의 이야기. 흔히 주변에서도 어쩐지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한 여자의 하루를 따라가는데, 나의 모습이. 엄마의 모습이, 딸아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무겁거나, 유독 슬프거나 한 내용도 아닌데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뭉클, 했다.
이상하다.

작가의 마법에 걸려버렸다.

<휴가>라는 단편에서는 평일에 휴가를 얻은 한 부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치 나와, 나와 같이 사는 남자의 평일 휴가의 모습 같아 읽는 내내 공감했다.
'시계를 본 순간 휴가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하루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라고 시작되는 첫 문장부터 그랬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거나 함께 무언가를 하려고 했지만(직장인에게 평일의 휴가란 얼마나 달콤하고 소중한가), 늦잠을 자고 일어나 시작부터 끝나버렸다고 느낀 부부의 휴가.
결국
'하루 잘 쉬었다.
아무 데도 안 가고 쉬는 것도 괜찮네.'
하고 끝나버린 휴가. 그런 휴가를 한두 번 이상 보내본 사람들이라면 아, 하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이야기다.

「이혼을 결정한 뒤 그녀와 나는 우리 관계가 왜 이렇게 되었나, 누구의 책임이 더 큰가, 고민할 겨를도 없이 살던 집은 어떻게 하고 물건을 어떻게 나누고 앞으로 어디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빨리 혼자가 되고 싶은데 한집에 묶여 있어야 하는 현실이 갑갑했다. 중개업소에 집을 내놓고 팔리는 대로 즉시 돈을 나누는 것만이 해결책인 것 같았다. - <이후의 삶> 중에서, p144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이혼을 앞두고 있다면 저런 고민을 하는 게 당연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책임이 크고, 마음이 아프고,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이라도 잘 살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건 어쩐지 더 현실적이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갑작스럽게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주인 때문에, 한 해의 마지막 날 집을 보러 다녀야 하는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 <에트르>는 이미 다른 작품집에서 한 번 읽은 소설이었지만, 다시 읽었다.
어쩐지, 이 소설집 속에서 더 잘 어울리는 듯한 소설이었다.

일곱 살 첫째와 5개월 둘째를 데리로 떠났던 1박2일의 짧은 휴가 끝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더운 날씨에 힘들다 수시로 징징거리는 두 딸, 별일 없었지만 그런 아이들 틈에서 괜히 심드렁해져 버린 우리 부부. 잘 놀고 왔다, 집에 돌아와 널브러져 누우면서 던지는 의례적인 말(물론 진심도 포함된), 늦은 밤 내일 출근 걱정을 하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

소설이 살아내는 현실과,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내 삶, 어쩐지 너무 재미없는 거 아니야 괜히 볼멘소리를 내뱉는 밤.

다, 작가의 소설 탓이다.
그러니, 버티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현실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쓰고, 들려주길.
들리지도 않을 투정을 부리는 밤. 그렇게 나의 하루와 헤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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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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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블로그에서 300명의 사전 독자를 모집한다는 포스팅을 보고 덜컥, 신청해 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 내게는 단단하게 봉해진 가제본 책 한 권이 도착했다.

 가제본 된 300권의 책 중, 243번째 책이다.
300명의 사람들 중 나는 이 책을 가장 늦게 읽었거나, 가장 버벅거리며 읽지 않았을까.

「상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시월의 어느 깊은 가을날 우리가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와의 이별에 관한 회상이었지만 그래도 그 밤 내내 여러 번 반복된 이야기는 오래전 겨울, 미안해, 내가 좀 늦을 것 같아 눈을 먼저 보낼게,라는 경애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으며 같이 울었던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읽으면서 비로소 나는 이 소설을 처음부터 읽게 되었다.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소설 중간의 내용들이 이상하거나 복잡해서가 아니라, 비로소 그 어떤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이제 그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경애(敬愛)의 마음』이라는 제목에 처음부터 집중했던 건 아니었다.
소설 속 주인공 경애의 마음 정도로 이해하고 읽기 시작했달까. 그러다 읽으면 읽을수록 다의적 의미로 다가오는 '경애(敬愛)의 마음'을 쫓아다니느라 여러 번 길을 잃었다.

잘 읽히는 소설임에 분명하다. 그런데도 종종 길을 잃는 건, 내가 찾지 못한 그 '마음'때문이었을 거다.

소설은,
1999년, 고등학생 시절에 호프집 화재 사건으로 친구들을 한꺼번에 잃은 경애와, 소중한 한 친구를 잃은 상수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닌 이들이 그렇듯, IMF를 겪으면서 대학을 다녀야 했고, 취업난에 시달리는 세대였고, 정규직 비정규직의 이분화된 조직에서 헤매는 세대였다. 팀원이 없는 팀의 팀장이 된 상수와, 존재감 없던 경애의 직장 생활의 이야기는 충분히 공감되고 안타까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선배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떠나보내야 했던 경애와 보이지 않는 인터넷 세계에서 사랑에 대한 글을, 조언을 해주던 상수.
떠난 뒤에도 끝내지 못하고 다시 자신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옛 연인을 뿌리치지 못하고 은근슬쩍 다시 만나면서도 시작도 끝도 아닌 관계에 힘들어하는 경애와, 그런 경애의 고민에 익명의 조언을 건네는 상수.

얽히고 풀리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나는 그들의 마음을 찾아다니느라 함께 헤맸던 것 같다.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 어떤 아픔과 과거가 있었더라도 지금의 삶에 충실히 살고자 하는 간절함, 놓쳐버린 사랑에 대한 미련 혹은 완전 끝, 하고 외치고 싶은 갈팡질팡하는 마음, 떠난 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남은 삶에 대한 두려움 혹은 약간의 희망,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소중함과 그들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마음이 이 소설에 담겨 있는 듯하다.
상실에 대한 경애, 삶에 대한 경애, 사랑에 대한 경애, 사람에 대한 경애.

소설은 끝이 났지만, 삶은 끝나지 않았다는 어떤 무언의 메시지.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문단에서 나는 이 소설을 다시 읽는다. 소설 속의 상수와 경애가, 떠난 이들을 마음에 품은 남겨진 이들이 앞으로 살아내야 하는 쉽지 않을 현실이 경애(敬愛)의 마음으로 가득 차기를 바라면서.

사족 1.
나는, 이 소설 속의 어떤 인물보다 주연도, 비중 있는 역할도 아니지만 경애의 삶에 끊임없이 걱정해주고, 쓴소리를 던져주는 미유라는 인물에 자꾸 마음이 갔다.
미유가 경애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어쩐지 정말 친구가 친구에게 사랑을 담아야 건넬 수 있는 말들 같아서.
그런 따뜻한 마음들이 모여 이 소설의 분위기를 조금 더 다정하게 만들어 준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사족 2.
작가의 단편 <체스의 모든 것>에서도 느꼈지만, 작가가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을 설정하는(표현하는, 캐릭터를 만드는) 방식이 참 좋다. 주인공의 주인공화된 삶이 아닌 주변인들과 엮여야 살아갈 수 있는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아서.

사족 3.
욕심이었다. 천천히 읽었으면, 오래 두고 읽었으면 참 좋았을 소설이라서.
정해진 시간 내에 읽어내야 한다는 게 자꾸 조바심을 나게 만들었다.
이 소설은 그렇게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소설이었다.

경애는 차라리 회사를 나갈까 싶기도 했다. 그때 경애의 엄마가 유방암 판정을 받지 않았다면, 미용실을 닫고 항암치료를 하지 않았더라면 경애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아닐지도 몰랐다. 경애는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는 죄책감과 그건 절대 자신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자기방어 속에 놓여 있었는데 그 사이를 갈팡질팡하면서도 일관되게 도망가고 싶지 않다고 다짐했다.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는 것, 한번 도망가 버리면 다시 방에 웅크리고 앉아 계절들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했다.

고통을 듣기 위해 귀를 최대한 열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휴대전화나 컴퓨터를 앞에 두고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무엇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소음 같은 것이 상상되었다. 아주 일상적인 소음일 것이었다. 냉각팬이 돌거나 의자가 끌리거나 때론 야근하는 직장 동료가 기지개를 켜면서 아직 안 갔어? 하는.
그 누군가는 지금 사랑을 잃었기 때문에 그런 일상적인 소음들과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마치 공동처럼 그 모든 일상과는 상관없는 상태에 빠져 있다. 그 공동에는 너무 많은 중력이 가해지거나 아니면 아무런 중력도 가해지지 않아 스스로가 완전히 버려진 기분일 테고, 상수가 늘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기분이었다.

마음이 끝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대체 끝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실감하고 확신하는지 알 수 없었다. 끝이 만져지는 것이라면 모를까. 느끼는 것이고 사상하고 인식하는 것인데 지금 내가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끝을 말해. 끝을 말하려면 지금 경애 발밑으로 너풀거리며 나뒹구는 아이스크림 포장이나, 택시의 노란 헤드라이트 불빛같이 눈아에 지나가는 어떤 것도 아픔을 환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어떤 풍경도 산주 선배를 떠올리게 하지 않고 지시하지 않는다고

산주 선배가 결혼하고 3년이 지나는 동안 경애는 언제든 아, 이런 것이 끝이구나, 정말 끝이다, 끝, 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로맨스가 종료됐다는 것은 느꼈지만 경애의 마음이 멈춰지지는 않았다.
경애의 이런 상태를 못 견뎌하는 미유는 경애를 설득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유를 들었다. 어린아이가 자기 손에서 놓아버린 풍선을 허공에서 찾는 것, 당뇨 환자가 여전히 당분이 든 음식을 탐하는 것, 폐암 말기 환자가 흡연 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것, 허기가 지는데 잘 차려놓은 칠첩반상을 놔두고 굳이 불량식품으로 배를 채우려고 하는 것. 미유는 하나를 잃지 않으려다가 어쩌면 너 자신을 다 잃을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경애는 그 말들을 자신에 대한 미유의 애정으로 받아들였고, 미유가 자기가 아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소개팅 자리를 만들면 선선히 나가서 앉아 있었다. 미유 말대로 대부분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이 남자들은 어디서 뭘 하며 괜찮게 있다가 자기 앞에 나타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안녕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행운이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야 했고 자라야 했고 먹어야 했고 사고를 피해야 했고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불운을. 불운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대체 피할 수 있는 건가 싶은데, 적어도 살아 있다면 그것을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경애는 알았다. 고등학생이었던 1999년에 가까웠던 친구들을 한번에 잃어봤기 때문이었다.

6년간의 연애가 끝이 나야 했다면 그건 그런 세속의 셈법이 아니라 사랑 본질의 것, 슬프게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불연속의 속성이기를 원했다. 적어도 경애에게 이별을 통보할 때 산주는 경애의 선배이기도 한 그 여자를 선택하면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어,라고 정확히 이야기했으니까. 그대 둘은 막 끓기 시작한 전골을 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윽고 경애가 왜, 왜 그런 일이 벌어졌지,라고 묻자 그렇게 되었어, 좋아하게 되었어,라고 다시 말했다. 내가 너를 우연히 좋아한 것처럼 그런 일은 그렇게 되어졌어, 라고

‘산다‘라는 것이 있어서 수많은 것들이 생장하며 싸우며 견디고 있다는 것. 다행히 그런 것들이 여전히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여름의 낮을 보내다 경애가 슬리퍼를 끌고 시장으로 나가면 그 살고 있는 것들을 두 손 무겁게 사들고 어쨌든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경애도 아무튼 살고 있다는 것. 그런 마음이 들면 경애는 불현듯 약속을 잡아보다가도 낮이 되면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며 외출을 취소하곤 했다

경애는 산주와의 일을 말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경애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천천히 혼자 가라앉고 있었다. 산주는 경애가 그런 관계의 한계에 대해 말하면 며칠이고 연락을 끊었다가 아주 상처받은 얼굴로 나타나 그냥 옆에 좀 있으면 안 되겠니? 하고 물었다. 그냥 내가 좀 아픈데 그러면 정말 안되겠어?
그 상황을 알게 된 미유는 당장 산주에게 전화하겠다며 흥분했다. 경애가 산주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을 수 있다고, 들어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을 찾아오는 것뿐이라고 설명했지만 미유는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일이니, 인생 망했는데 지금 바람이라도 나자는 거니,라고 말해서 경애를 슬프게 만들었다. 경애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간 미유는 다시 전화해 난 너가 안 힘들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런 기약 없는 일에 아까운 인생 소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 건 사랑도 아니잖아."
"아니지."
"아닌데 왜 그래? 왜 그래야 해? 너가?"

엄마는 불행했을까?
그렇게 불행이라는 글자를 붙들고 있으면 아파트의 나머지 빈 공간이 그런 온갖 거들로 가득 차고는 했다. 더이상 연락이 없는 산주가 방 어딘가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완전히 밀어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머리에서 다 지워낸 것은 아니라서 경애는 불행하지 않아? 하고 물어보고 싶어지곤 했다. 미유는 우리가 헤어져서 이제 발을 뻗고 잘 수 있겠대. 미유 딸이 열한시 정도가 되면 귀신같이 그 시각을 알고 우는 야경증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더 힘들었대, 내가 선배를 만나는 시간이. 특정 시간이 되면 그것이 왔다는 걸 감각하고 온 힘을 다해 울 수 있는 아기라니 부럽지 않아?


우리는 같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러니까 누워서 종일 음악만 듣다가 먼저 배고픈 사람이 일어나 라면을 끓였던 스무 살 시절의 우리와, 한강에서 오리배를 보고 있던 지난 계절의 우리는 같은 사람이었을까. 각자 다른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렸던 그 밤의 우리가 같았을까. 어쩌면 손상된 것이 아닐까. 제대로 봉인되어 있던 것을 뜯어서 엉망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나는 그런 의문이 들면 그날 내가 까페로 나가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해. 우산은 있어? 하고 묻지 않고 옷은 왜 그렇게 입었어?라고 걱정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해. 나도 선배가 안고 싶은데,라고 하지 않고 너랑 자고 싶어 다시 따뜻하게,라는 선배 말을 믿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해. 잘 지내고 있어? 불행하지는 않아? 혹은 그 불행이 잘 되어가고 있어? 완전히, 후회 없이, 제대로 불행해하고 있어? 이렇게 물었어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런 말들을 늘어놓다가도 정작 산주에게는 전할 수 없으니까 불행은 털실처럼 잘 말아서 이 빈 공간에 덩그러니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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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2018-05-18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사하고픈 소설입니다!
 
노후자금이 없습니다
가키야 미우 지음, 고성미 옮김 / 들녘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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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적인 제목이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노령화되어가지만 정년은 정해져 있고, 그 이후에 뭘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건 20대부터 50대까지 혹은 이미 60대에 들어선 사람들까지도 하고 있지 않을까.
혹은 과연 정년까지는 다닐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역시.
나 역시 그런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년이 보장되어 있긴 하지만, 정년까지 채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연금이 나올 때까지는 뭘 하면서 살아야 하는 고민. 신랑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신랑 역시 비슷한 고민.
특히 둘째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신랑 정년이 있기 때문에 신랑은 나보다 조금 더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책 「노후자금이 없습니다」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우리의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다. 물론 소설에선 남편도 아이들도 별 고민 없는데 아내 혼자 고민하고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은행계 신용카드회사에서 사무직으로 10년이 넘게 일하고 있는 아츠코는 남편과 딸, 아들을 둔 주부다.
50대 부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중이거나 취업을 앞둔 자녀를 둔 평범한 가정.
 요양병원에 있는 시부모님에게 월마다 9만 엔씩을 지출하고 있고,
결혼을 앞둔 딸은 시댁에서 요구하는 대로 결혼식 피로연에 6백만 원을 들여야 하는 상황.
아츠코는 다가올 딸의 결혼식 자금으로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갈 것을 걱정하고, 남편은 그래도 사돈 보기에, 남들 보기에 꿀리지 않는 결혼식을 해주고 싶어 한다.
남편은 월급을 받아 아내에게 주고, 경제 상황에 대한 모든 문제는 아내가 처리하고 해결해왔다.
아츠코의 말처럼, 남편은 아내가 마치 돈을 쌓아두고 있기라도 한 듯, 지출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남편 말대로 그 정도 돈은 써도 될지 모른다. 매사를 너무 동동거리며 걱정하는 자신의 조바심이 좀 심한 것일지도......
자식이 둘 다 독립하면 돈뿐 아니라 시간적인 여유도 생겨날 것이다.
-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 혼자 지내보고 싶다.
지금까지 늘 이런 바람을 마음속으로만 간직한 채 살아왔다.
아이들이 어릴 때, 아츠코는 단 한 시간만이라도 좋으니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보기를 간절히 원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꽁꽁 묶여 지내는 느낌이다. 하루 24시간을 몽땅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삼고 싶다는 바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제한받지 않는 자유에 대해 갈망으로 변해갔다. 50을 맞이하던 생일날, 이제 살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생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때면 누구나 이미 늙어버린 후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인생이란 것이 원래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p21

'엄마라는 생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때면 누구나 이미 늙어버린 후다.'

하아- 이 문장이 왜 그렇게 콕 와닿는지. 나의 젊음을 육아에 바치고, 늙어서 자유로우면 뭐 해. 싶은 마음이 불쑥 들 때가 있는데, 체념하듯 남긴 작가의 다음 말 '안타깝기는 하지만 인생이란 것이 원래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에서 나도 모르게 또 공감해버리고 말았다.
선택했던, 선택됐든 '엄마'라는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 말이지.

아츠코는 10년이 넘게 다닌 회사에서 계약만료로 퇴직을 당하고, 남편 역시 정리해고. 점점 줄어드는 통장 잔고. 아직 돈이 들어가야 할 데가 많이 남은 50대 부부에게 노후 걱정은 어쩌면 당연한 일.
거기에 결혼한 딸 걱정, 시아버지 장례,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님 걱정까지.

소설 속의 이야기가 어쩐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들이라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읽게 된 소설이다.
걱정을 안게 하는 소설이지만 덕분에 먼 미래라고만 생각했던 일들에 대해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을 주기도 했던 소설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소설이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다.
중간중간 황당하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한 에피소드들에서는 소소한 웃음이 나게도 한다.
뭐랄까, 우리가 하는 걱정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달까.

나는 종종 헷갈리는데,
지금을 즐기면서 살고 싶은 마음과, 아이들을 위해 미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마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투자하는 것을 무조건 포기하면 안 된다는 마음, 이런 것들이 내 안에서 수십 번씩 다툰다.
가계부를 쓰면서 아껴야지, 하다가도 나를 위해 장바구니 한가득 책을 담아 주문하는 날 슬쩍 모르는체하면서 그렇게 여전히 갈팡질팡.
그럼 어때. 그게 사는 거지. 하는 자기 위안까지.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다.
뭐가 맞는지 정답은 없는 삶이니, 나에게 맞는 적절한 삶의 질을 위해 소소한 노력을 하면서, 그 가운데 소소한 행복을 느끼면서 또 그렇게 오늘을, 내일을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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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걱정하지 마 우리가 뭐 우주를 만들 것도 아니고 - 샴마의 노답북
샴마 지음 / 팩토리나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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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걱정하지 마. 우리가 뭐 우주를 만들 것도 아니고

책 제목을 보자마자 '그래, 맞다' 싶었다.
'괜한 걱정으로 소중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즐겁게 살아야지. 걱정한다고 안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나지 않잖아.' 뭐 이런 맘.
늘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처럼 소심한 사람에게 걱정과 불안함은 늘 붙어 다니는 감정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하다고 하는데 책을 읽기 전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그냥 책으로 보고 싶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샴마.
'늘 밝고 웃기고 고민 없어 보이는 '소정'이 안에 생각 많고 복잡하고 때때로 우울하기도 한 진짜 '소정'이의 생각을 쓰고 그리는 사람.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스타일, 머리카락 하나 제 맘대로 하지 못해 십 년 넘게 단발머리, 거절도 거절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 그래도 끊임없이 '소정'이의 진짜 모습을 사랑하려는 노력파.'

저자 소개를 읽으면서 공감했다. 어쩐지 내 이십 대를 보는 것도 같았다.
특히 '착한 사람 콤플렉스'
지금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이십 대 초반에 나의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거의 최강이었다. 그 때문에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늘 우울하거나, 울거나 둘 중 하나.
시간이 지나면서, 직장 연차가 쌓여 가면서, 조금씩 자라면서 '내' 스스로 자존감 높이기 연습을 하면서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고 스스로 생각 중(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어디선가 툭, 튀어 나오기도;;)

 

누군가의 일기장을 슬쩍 엿본 느낌이 들었던 책이다.
그림 한 컷, 말 한 줄을 읽으면서 글을 쓴 사람을 상상하게 만들기도 했고.

지금의 '내'가 공감하기보다는,
예전의 '나'를 자꾸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리숙하고, 소심하기만 했던 나의 이십 대를 떠올리며 지금의 '나'는 그래도 흔들렸지만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왔구나, 하는 안도. 감사.

사는 게 벅찰 때, 지금의 '내'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한 번씩 오래전의 '나'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그렇게 흔들리고 힘들었지만 씩씩하게 잘 견뎠으니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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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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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못했어요."
내가 달싹였다.
"꼭 할 말이 있었는데, 다 말하려고 했는데, 근데 잘 안 됐어요. 한마디도 안 한 것보다 더 우스워졌을 뿐이에요.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인지만 확인했어요."
되는 대로 말을 뱉어냈다. 눈물이 자구 콧물이 되어 나와서 삼 초에 한 번씩 코를 훌쩍거렸다.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인 거 맞네."
규옥이 손수건을 건네더니 말했다. 나는 천천히 그를 올려보았다. 뱉어낸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부드럽고 관대했다.
"그래도 위로가 될 사실이 있지요."
규옥이 낮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모두 보잘것없다는 것. 정말로, 하찮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죠. 특별한 척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누구나 아등바등 살아가요. 어떻게든, 그저 존재를 확인받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존재를 어떻게 확인받아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뭘 확인받느냐고요."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울음에 섞어 뱉었다.
그때 폭신하고 따뜻한 기운이 나를 감쌌다.
"그 고민은."
규옥이 나를 안고 있었다. 커다란 몸에 체중을 싣지도 않고 따뜻하고 가볍게. 그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아마 그 고민은 죽을 때가지 하게 될 거예요. 백 살이 될 때까지 같은 생각할걸요. 외롭다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괴롭고 끔찍하죠. 그런데 더 무서운 거는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사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질문을 외면하죠. 마주하면 괴로운 데다 답도 없고, 의심하고 탐구하는 것만 반복이니까. 산다는 건 결국 존재를 의심하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에요.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얼마나 드물고 고통스러운지 알아가는......"
'그만, 그만. 말 좀 그만해요!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말이 아니에요, 설명도 논리도, 인생 강의도 아니라고요."
나는 그만 분통을 터뜨리며 울어버리고 말았다.
<서른의 반격> 본문 중에서 p178-180

위의 한 페이지를 읽으면서, 나는 이 소설을 이 한 페이지를 읽으려고 읽었나 보다 생각했다.

 

  "산다는 건 결국 존재를 의심하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에요.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얼마나 드물고 고통스러운지 알아가는......"

1988년생 김지혜.
학창시절 한 반에 족히 서너 명은 있는 평범하고, 보통인 이름 김지혜.
김지혜 A이거나, 김지혜 B이거나, 작은 김지혜이거나, 큰 김지혜로 불렸던 그렇고 그랬던 시간을 지나 보통의 이십 대, 보통의 삼십대로 접어든.
정규직이 되고 싶어 차선으로 우선 인턴이라도. 더 나은 취업의 기회를 노리기 위해 인턴 월급의 반 이상을 토익학원에 쏟아부으면서도 그래, 괜찮아. 이 정도 투자는.. 위안을 삼아야 하는 청춘이라 불리는 세대.

부당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참고 또 그냥 참아버리고 말았던 김지혜는 새로 들어온 인턴 규옥을 만나면서, 규옥과 함께 우쿨렐레 수업을 듣고, 수업을 함께 드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목소리를 낼 연습을 한다.

스스로 보잘것없다고 내뱉을 수밖에 없는 지금 청춘들의 세대는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오래 계속될 것만 같다. 무엇을 해내야겠다는 희망과 열정을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드는 부조리한 세대를 향해 보통의 김지혜는 그래도 조금씩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희망적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 계속 답답했다. 요즈음 미투 운동의 기반에 깔려 있는 권력이란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씁쓸하게 떠올려야 했고, 답답하다 정말, 왜 말을 못하니..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비권력의 세계에 살고 있는 보통의 우리들을 떠올리며 또다시 답답해지기만.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p232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 애초에 언제나 사실이었던 사실. 그러나 종종 잊고 살 수밖에 없는 사실.
우리는 언제쯤 그 사실을 당연한 듯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이 세상을 향해 좀 더 당차게 맞설 수 있을까.

소설의 내용과 별개로 소설을 읽으면서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처음 시작의 '보통'의 존재에 대해 조금 길에 설명된 부분,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급하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달까.
그리고 이건 개인의 취향이지만 서술된 문장보다 대화체로 다뤄진 문장들은 옮겨 적어 두고 싶을 만큼 공감되기도 했다.

사족.
작가의 <아몬드>라는 전 작품은 처음 몇 페이지를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더랬다.
나랑은 잘 안 맞는 작가인가 싶었는데 결국 또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전작보다 잘 읽혔다. 이것도 아마 개인의 취향.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아몬드>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그만두려고요, 나."
"왜요?"
"그럴 상황이 생겼어요....."
규옥이 흐음, 하고 숨을 내쉬며 재미있다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제 막 기회를 얻었는데 그런 말이 쉽게 나와요? 인생 쉽게 살았나보네."
"쉽게 산 적 없어요."
내가 규옥을 노려봤다.
"그래서 이젠 편안해지고 싶은 것뿐이에요. 꿈 같은 거, 하고 싶은 거 따위 생각할 필요 없이 남한테 치이지나 말고 하루하루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치열하게 살라는 말. 치열한 거 지겨워요. 치열하게 살았어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치열했는데도 이 나이가 되도록 이래요.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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