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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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못했어요."
내가 달싹였다.
"꼭 할 말이 있었는데, 다 말하려고 했는데, 근데 잘 안 됐어요. 한마디도 안 한 것보다 더 우스워졌을 뿐이에요.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인지만 확인했어요."
되는 대로 말을 뱉어냈다. 눈물이 자구 콧물이 되어 나와서 삼 초에 한 번씩 코를 훌쩍거렸다.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인 거 맞네."
규옥이 손수건을 건네더니 말했다. 나는 천천히 그를 올려보았다. 뱉어낸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부드럽고 관대했다.
"그래도 위로가 될 사실이 있지요."
규옥이 낮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모두 보잘것없다는 것. 정말로, 하찮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죠. 특별한 척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누구나 아등바등 살아가요. 어떻게든, 그저 존재를 확인받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존재를 어떻게 확인받아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뭘 확인받느냐고요."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울음에 섞어 뱉었다.
그때 폭신하고 따뜻한 기운이 나를 감쌌다.
"그 고민은."
규옥이 나를 안고 있었다. 커다란 몸에 체중을 싣지도 않고 따뜻하고 가볍게. 그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아마 그 고민은 죽을 때가지 하게 될 거예요. 백 살이 될 때까지 같은 생각할걸요. 외롭다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괴롭고 끔찍하죠. 그런데 더 무서운 거는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사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질문을 외면하죠. 마주하면 괴로운 데다 답도 없고, 의심하고 탐구하는 것만 반복이니까. 산다는 건 결국 존재를 의심하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에요.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얼마나 드물고 고통스러운지 알아가는......"
'그만, 그만. 말 좀 그만해요!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말이 아니에요, 설명도 논리도, 인생 강의도 아니라고요."
나는 그만 분통을 터뜨리며 울어버리고 말았다.
<서른의 반격> 본문 중에서 p178-180

위의 한 페이지를 읽으면서, 나는 이 소설을 이 한 페이지를 읽으려고 읽었나 보다 생각했다.

 

  "산다는 건 결국 존재를 의심하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에요.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얼마나 드물고 고통스러운지 알아가는......"

1988년생 김지혜.
학창시절 한 반에 족히 서너 명은 있는 평범하고, 보통인 이름 김지혜.
김지혜 A이거나, 김지혜 B이거나, 작은 김지혜이거나, 큰 김지혜로 불렸던 그렇고 그랬던 시간을 지나 보통의 이십 대, 보통의 삼십대로 접어든.
정규직이 되고 싶어 차선으로 우선 인턴이라도. 더 나은 취업의 기회를 노리기 위해 인턴 월급의 반 이상을 토익학원에 쏟아부으면서도 그래, 괜찮아. 이 정도 투자는.. 위안을 삼아야 하는 청춘이라 불리는 세대.

부당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참고 또 그냥 참아버리고 말았던 김지혜는 새로 들어온 인턴 규옥을 만나면서, 규옥과 함께 우쿨렐레 수업을 듣고, 수업을 함께 드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목소리를 낼 연습을 한다.

스스로 보잘것없다고 내뱉을 수밖에 없는 지금 청춘들의 세대는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오래 계속될 것만 같다. 무엇을 해내야겠다는 희망과 열정을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드는 부조리한 세대를 향해 보통의 김지혜는 그래도 조금씩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희망적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 계속 답답했다. 요즈음 미투 운동의 기반에 깔려 있는 권력이란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씁쓸하게 떠올려야 했고, 답답하다 정말, 왜 말을 못하니..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비권력의 세계에 살고 있는 보통의 우리들을 떠올리며 또다시 답답해지기만.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p232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 애초에 언제나 사실이었던 사실. 그러나 종종 잊고 살 수밖에 없는 사실.
우리는 언제쯤 그 사실을 당연한 듯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이 세상을 향해 좀 더 당차게 맞설 수 있을까.

소설의 내용과 별개로 소설을 읽으면서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처음 시작의 '보통'의 존재에 대해 조금 길에 설명된 부분,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급하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달까.
그리고 이건 개인의 취향이지만 서술된 문장보다 대화체로 다뤄진 문장들은 옮겨 적어 두고 싶을 만큼 공감되기도 했다.

사족.
작가의 <아몬드>라는 전 작품은 처음 몇 페이지를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더랬다.
나랑은 잘 안 맞는 작가인가 싶었는데 결국 또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전작보다 잘 읽혔다. 이것도 아마 개인의 취향.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아몬드>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그만두려고요, 나."
"왜요?"
"그럴 상황이 생겼어요....."
규옥이 흐음, 하고 숨을 내쉬며 재미있다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제 막 기회를 얻었는데 그런 말이 쉽게 나와요? 인생 쉽게 살았나보네."
"쉽게 산 적 없어요."
내가 규옥을 노려봤다.
"그래서 이젠 편안해지고 싶은 것뿐이에요. 꿈 같은 거, 하고 싶은 거 따위 생각할 필요 없이 남한테 치이지나 말고 하루하루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치열하게 살라는 말. 치열한 거 지겨워요. 치열하게 살았어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치열했는데도 이 나이가 되도록 이래요.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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