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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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소설인데 소설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간혹 있는데 이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딱 그랬다.

    

'김지영. 흔한 이름이다. 누구나 주위에 지영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1982년에 태어난 여성들의 이름 중 가장 많은 것이 김지영이란다. 82년생이나 이제 30대 중반.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목적을 잘 함축하고 있다. 그 목적은 물론 현재를 살고 있는 여성의 보편적인 삶을 그리는 것이다'(작품해설 '우리모두의 김지영' 김고연주) 중

내 이름은 '은영'이다. 언니의 이름은 '지영'
소설 속의 '나'의 이름은 '지영' 언니의 이름은 '은영'이다. 뭔가 재미있지 않은가. 현재를 살고 있는 여성의 보편적인 삶, 이라는 소설의 목적에 정확히 부합하는.

30대 중반, 아이 엄마, 나이가 비슷하니 겪어온 시대가, 사회가 비슷하고 삶의 방식이나 조건도 엇비슷하게 느껴져 읽는 내내 너무 흥미로웠다. 물론 소설속 '지영'의 가족보다 조금 더 가난했으며(후에 소설 속 지영의 가족은 풍요로워졌으나), 소설 속 '지영'의 가족들 보다 불화했음이 차이라면 차이였을 것이다. 보편적인 삶이라는 말이 주는 평범함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어릴 땐 미처 알지 못했다.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특별'한 삶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다 '평범'하게 잘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소설은 김지영시와 정대현 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김지영씨의 인생을 거칠게 정리한 내용이다(남편 정대현은 아내 김지영에게 이상증세가 나타나자 먼저 정신상담을 받는다. 소설은 상담을 토대로 의사가 김지영시의 인생을 거질게 정리했다고 표현한다).
지영에게 이상증세가 나타난 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지영은 갑자기 장모가 되기도 하고, 대현의 첫사랑이 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의사가 직접 만나보니 산후우울증에서 육아우울증으로 이어진 매우 전형적인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담이 이어질수록 의사는 확신할 수 없었다.

김지영 씨는 당장의 고통과 부당함을 호소하지도 않고, 어린 시절의 상처를 계속 되새기지도 않는 편이다. 먼저 쉽게 입을 열지는 않지만 한번 물꼬가 트이면 깊은 곳의 이야기까지 스스로 끄집어내 담담하고 조리 있게 잘 말한다. 김지영 씨가 선택해서 내 앞에 펼쳐 놓은 인생의 장면 장면들을 들여다보며 나는 내 진단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세상이 있다는 뜻이다. p170

82년생 김지영씨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직장생활을 거치면서 되도록이면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듣는 쪽에, 참는 쪽에 가까웠다. 그건 그 시기를 거쳐간 대부분의 여학생이, 여성직원이 그래왔던 일이다. '내'가 참는 편이, 견디는 편이 사는데 더 나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절이기도 했고. 김지영씨는 억울해도 참았고 견뎠다. 그러다가 결국 터져버렸다.

선배는 평소와 똑같이 다정하고 차분히 물었다. 껌이 무슨 잠을 자겠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김지영씨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p94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 순간들이었다. 김지영씨는 충분히 건강하다고, 약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가족 계획은 처음 보는 친척들이 아니라 남편과 둘이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에요, 괜찮아요,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p134

그럼 너도 계속 구역질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못하면서, 피곤하고, 졸립고, 여기저기 아픈 상태로 지내든지. 겉으로 말하지 못했다. p138


여성으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이 힘들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소설 속 에피소드들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부분 공감되고 이해된다. 그래서 소설은 마치 나의,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술술 잘 넘어간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공감 돼. 맞아맞아. 그런데?

희망이 있는거야? 라고 묻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김지영씨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여전히 간혹 다른 사람으로 빙의해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내뱉는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로 말한다.  그것 역시 아쉽지만 현실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히 낼 수 없는 사회. 용기를 내 낸다고 해도 묵살당하거나 무시당해 오히려 더 절망하게 되는 사회에서 얼마나 더 묵묵히 참고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오늘도  여기저기에서 흩어져 힘겹게 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김지영'씨에게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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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애하는 적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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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부턴가 허지웅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거의 없다. MC든 패널이든. 처음 그의 책 <버티는 삶에 관하여>를 읽었을 땐, 방송에 나와 삐딱하지만 다정해보이게 이야기하는 그가 궁금해서 책을 찾아 읽었었다. 그게 벌써 2년 전이다. 그 이후 그가 방송에서 어떤 모습인지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가 쓴 글이나 기사를 읽고 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더 많다. 때로 단편적으로 올라오는 기사를 통해 그가 프로그램에서 했다는 이야기들을 접하고,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을 보기도 하는데 역시 그것보다는 글을 통해 얻는 이미지로 기억하는 게 맞을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방송에 종종 불려나가고 있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건달에 불과하다'라고 적었는데 그가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자신만의 어떤 믿음이 있는 듯해서 부럽기도 했다.     


이번 책의 맨 서두에 실린 작가의 말이 참 좋았다. 여러번 곱씹어 읽어봐도 그렇다.

어른이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절한 거리를 자연스레 알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흔 살에 가깝게 된 지금에도 나는 그 거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너무 다가가면 아픈 일이 생겼고 너무 떨어지면 외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장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겨우 떠올린 건 상대를 존경할 만한 적장처럼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가까워지면 속을 모조리 내보여버리는 버릇이 쉽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서둘려 벽을 허물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상대가 서운해하고, 서운해하는 상대를 보며 내가 미안해하는 가장 어려운 순간만 견뎌내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친애하는 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질수록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나 자신에 지나치게 심취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에 심취하면 쉽게 뜨거워지고 자기 사정과 감정만이 특별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 사정에만 너그럽다보면 남의 사정은 나보다 덜한 별것 아닌 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괴물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주변 세계를 친애하는 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확실히 도움이 되어주었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상대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조심할 수 있는 방법을 아주 조금은 깨달은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쉰 살이 되기전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완벽한 거기를 수식으로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사이의 적적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그 사람들을 '친애하는 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인간관계의 어려운 관문 하나쯤을 가뿐히 넘어선 것은 아닐까.

이번 책, <나의 친애하는 적>은 그가 매일 쓴 글들을 모아 2년만에 묶어 낸 에세이 집이다.
그 사이, 많이도 썼구나. 참 부지런하게 살았구나 이 사람은. 그런 생각에 다시 한 번 문득 부러워진다.
글은 그냥 써지는 것이 아니어서, 많이 읽고 보고 느껴야 무언가 자신의 글이 나오는 것일 텐데 글을 쓰는 시간 말고도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났을 그의 부산스럽고 자유로웠을 그 시간들이 막연히 상상해 본다.

책 속에는 모두 59편의 에세이가 담겨 있다. 일기 같은 느낌의 글도 있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사회 이슈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특히 나는 그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에세이들이 참 좋다.

그가 여러 글에서 고백했듯, 힘들었던 대학시절의 경험들이 그가 세상을 살아가고, 사람들을 대하는데 큰 자양분이 되어준 듯 하다.

이 책 안에 <<엄마, 나의 가장 친애하는 적>>이라는 글이 있는데 나는 이 글을 읽고, 그만 울컥 눈물을 쏟고 말았다.

어릴 때 가장 거대하게만 보이던 엄마가 나이들고 보니 자기가 아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작고 약한 사람이었다고 고백하는 부분과, 엄마 생각을 하면 늘 조금 울고 싶어지지만 엄마 앞에서는 울지 못한다는 고백이 내 마음 어느 부분에 와 쿵, 하고 부딪쳤다.

그 글 말고, 고인이 된 신해철의 이야기를 적은 부분에서도 비슷했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 인 듯하지만 적어도 사람을 사람답게 대할 줄 아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강자앞에서 강하고 약자 앞에서 한없이 약해질 줄 아는 사람인 것도 같다. 삐딱하게 툭툭 내뱉는 말들 같지만, 애정어린 마음을 가득 담았을 거란 믿음 같은 게 생겼다. 적어도 그의 글 안에서 만은 말이지.

글을 통해 오래 그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오래 볼 수 있으면 좋겠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래 들을 수 있으면 좋겠고, 그가 만들어 놓은 친애하는 적들이 사는 세계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분명한 건, 나는 이 책을 읽고 조금 위로를 받았다는 것.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어요.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그렇다고 내가 경험해 보지 않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곧 비정상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왜 냐하면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기 때문이다. p33

그녀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아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작고 약한 사람이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엄마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엄마 생각을 하면 나는 늘 조금 울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엄마 무릎 위에서 울고 싶다. 하지만 나는 엄마 앞에서 울지 못한다. p138

전에는 뭔가를 내려놓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쉽게 까먹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아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까먹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까먹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까지 함께 잊어버리기 마련이더라. 그리고 그렇게 까먹은 중요한 것들은 너무 중요하고 소중해서, 반드시 훗날 가슴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 어쩌면 뭔가를 내려놓기 위해 필요한 건 망각이나 체념이 아니라 이해하는 태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 입장이었으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이해 말이다. p192

사람들은 간과한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 자신 또한 언젠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순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그 친구를 더 열심히 돕지 못했다는 이유로 종종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진다. 우리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던 그 많은 피해자들을 떠올려보자. 어쩌면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p224

우리에게 필요한 건 노블레스 오블리주 따위가 아니라 모두에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엄정하게 적용될 원칙과 약속이다. 착한 주인, 착안 임금, 착한 지배계급에 대한 판타지는 쓸모없고 오래된 노예 근성에 불과하다. 그런 걸 요구할 이유도 없다. 왕조가 아닌 이상 우리가 채택한 시스템에서는 모두에게 공히 적용되는 엄정한 원칙과 약속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가치다. ‘착한주인‘에 대한 전근대적 판타지를 없애야만 ‘모두에게 똑같은 원칙과 약속‘이라는 당연한 헌법적 질서가 뿌리내릴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느 지배계급의 스캔들을 다른 지배계급의 미담으로 덮는 식의 과정이 영원히 반복되는 세상. p250

부끄럽지만 정직한, 그래도 우리는 정직하게 이런 흑역사라도 남기려고 열심히 싸웠고 그래서 너희들은 우리보다 제발 조금 더 나은 세대가 되어달라고 있는 힘껏 외치는 근현대사 서술은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를 아주 조금이라도 응원할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이때 자기 과거를 거짓으로 낭만화하지 않고서는 더이상 현실을 견뎌낼 수 없을 만큼 노쇠한 자들은 입을 다물어야만 한다. ‘자랑스러운 역사‘란 왜곡된 자화자찬이 아니라 그 모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거듭해가며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유와 반성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과거는 대개 창피한 것이다. 그것을 사실 그대로 돌아볼 수 있는 정직함만이 늘 위대하다.p284-286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난다.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당장 힘들고 어렵더라도 자폭하기 보다 설득하고 싸워나가기를 포기할 수 없다. 요즘은 그렇게 원론적인 것들이 자꾸 마음이 간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던 가장 기본적인 믿음들이 세상을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아직도 그런 걸 믿느냐는 사람들에 의해 수시로 훼손되어 버려지고 있다. 나는 그게 너무 슬프다.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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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변호사 - 삼례 나라슈퍼, 익산 택시 기사 살인 사건, 그리고 재심
박준영 지음 / 이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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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연이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말하는대로>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박준영 변호사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음 스토리펀딩 페이지에서 무기수 김신혜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났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이 사람이 궁금해졌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박준영 변호사의 이야기들을 찾아보다가 최근 ,<<우리들의 변호사>>라는 책을 출간한 걸 알게 됐고, 바로 구입을 했고, 바로 읽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공감할 듯한데 이 책, 정말 잘 읽힌다. 중간에 멈출 수가 없다.
잠들기 전 침대에 기대 펼친 책이라 조금만 읽고 자야지, 이제 덮고 자야지 하다가 결국 다 읽고 나서야 책을 덮을 수 있었다.
그리고나서도 오래 잠들지 못했다.

    

'재심변호사' '파산변호사'로 알려져 있는 박준영 변호사.
이 책은, 이 책 속의 글들은, 사람을 먼저 보아야 읽히는 글이다.
'변호사'라는 직함을 떼고, 인간 박준영이 보이니 그의 글들이 하나같이 소중하고 애틋해졌다.

'작은 섬 노화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을 도와 연탄을 팔고 오징어를 팔고, 장례식에 쓰이는 종이꽃을 접으면서 자랐다. 중학교 때 엄마가 돌아가신 뒤 광주로 유학을 갔고, 가출과 방황을 일삼는 문제 청소년으로 살았다. '근면 성실하나 준법성이 요구'된다는 평가를 받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나마 들어간 대학은 1학년때 그만 뒀다. 군대에서 만난 배 병장을 따라 사법 시험 공부를 시작해 2002년에 합격했다. 수원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고, 국선변호에 열중하던 중, 2008년 운명의 사건 '수원 노숙 소녀 살인 사건'을 만났다. 이는 국가기관의 도움없이 형사 재판 재심에서 무죄를 이끌어낸 최초 살인 사건 사례가 된다. 이어 탈북자 간첩 사건을 변호하게 되면서, 재심과 공익 사건만 맡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덕분에 개인 재정은 파산 지경에 이르렀지만, 재심 청구에서는 단연 빛을 발한다. ... 대한민국 최고의 재심 전문 변호사로서 앞으로도 사회적 약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우리들의 변호사'로 살아갈 생각이다<지은이 소개, 같은 책 제공>'

상상해본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을 들을만큼 어렵게 성공해서 변호사가 됐다.
그 다음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들까. '이제 내 인생은 폈구나' '이제 편하게 살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을 것 같다. 물론 저자는 본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말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럼에도 결국 그는 지금 가장 힘들고 낮은 곳에서, 더 힘들고 더 낮은 이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동안 믿지 못했던, '사람이 희망이다'라는 말을 조금은 믿게 되었다.
결국엔 모든 게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다들 힘들어서 피하고, 더러워서 피하고, 이익이 되지 않으니 피하는 일을 나서서 하는 사람이라면 믿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이 책은 저자가 아들 진우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된다. 너무 바빠서 함께 놀아주지 못하고, 자는 모습만 보여주는 아빠라서 미안해하고, 좋은 집에 살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보통 아빠다. 그런데도 나는 그 아이, 진우가 참 부럽다. 이런 아빠를 둔 그 아이가. "물려 줄 재산은 없지만, 누구한테 얘기해도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 돈도 없고, 좋은 집에서도 못 살고, 진우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 수는 없지만 힘없고, 가난하고, 못 배워서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들을 지켜주는 멋진 아빠가 되도록 애쓸게!"라는 말은 마음 한 구석에 들어오 찡 하고 울린다. "진우야, 우리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 돈 많은 부자라고 행복한 게 아니야. 가진 게 만다고 행복하지도 않지. 함께 더불어 사는 거야. 서로 도와가며 살아야 해. 그래야 진짜 행복할 수 있어. 아빠도 주변에서 많이 도와줘서 여기까지 왔다. 아빠도, 건우도 나보다 힘든 주변을 도우며 함께 살아가자."라는 말은 우리 아이에게 언젠가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 힘들게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야기, 변호사로 살아가던 이야기, 재심변호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여러가지 재심 사건을 맡아 힘겹게 싸움을 해나가는 이야기까지 어느하나 놓치기 아깝다.
특히나, 이 책을 통해 뉴스를 통해서만 간략하게 접했던 '수원 노숙 소녀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강도 치사 사건' '익산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을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되어 좋았다. 그리고 세상에 얼마나 억울하고 힘든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내가 가진 힘듦만 생각하고 살지 말자고 조용히 다짐도 해 본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게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p157"
이 말이, 우리가 지금 추운 날씨를 견디며 광화문에 나서는 이유고, 촛불을 드는 이유일 것이다. 정의가 승리하는 날을 기다리는 이유일 것이다.

오래오래 버텨주기를 바란다. 오래오래 승리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믿는 가치가, 정의가 옳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시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 제가 살아온 날들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는 것은 제가 어떤 마음으로 재심 사건을 맡아 왔으며, 앞으로 하게 될 재심 사건들을 어떤 마음으로 할 것인지 보여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삼례 사건 재심 무죄 판결에서 받은 것과 같은 감동과 기쁨을 더 많은 분들과 함께하고 싶어서입니다. 모쪼록 이 책을 읽는 분들 가운데 단 몇 분이라도 약자들의 힘겨운 싸움에 함께 나서 주신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겠습니다.p282"

인간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을 감추기 위해 다른 사람을 사지에 몰아넣어서는 안됩니다. 그 상대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고, 배움이 짧고, 가난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리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의를 실현해야 할 법조인들이 먼저 나서서 사회적 약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p272

잘못을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제가 이런 입장이니 나중에 제가 뭔가 빌미를 제공하면 당연히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지난 제 삶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든 흠을 잡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때가 왔을 때 제게 그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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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화요란
오카베 에츠 지음, 최나연 옮김 / ㈜소미미디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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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삼십 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실패했거나, 연애불능자라거나 불완전해 보이는 걸까.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둬야는 거고,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는 일은 축하받아야 하는 걸까.

적어도 요즘 우리 사회 분위기에서는 능력있는 여자들은 결혼을 미루고 설령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경력이 아까워 기꺼이 맞벌이(물론 경제적인 부분도 크지만)를 하는 시대임에 분명한데, 이 소설의 근저에 깔려 있는 분위기가 우선을 살짝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결혼을 앞두고 회사를 퇴사하는 리카를 위한 송별회 자리가 마련되었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축하하고, 축하받으면서 조금은 아쉽지만 유쾌하게.
그런데 나는 이소설의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선배, 그렇게 행복하면 질투당하지 않아요? 그 여자친구들 한테."
"질투를 당하다니?"
"여자들끼리는 겉으로 사이가 좋은 척하면서도 뒤에서는 경쟁을 하거나 자기가 더 튀려고 하다가 결국은 서로 발목을 잡기도 하잖아요." p14

솔직히 말하면, 이 소설을 계속 읽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했다.
그렇게 고민하고 갈팡질팡하는 채로 끝까지 다 읽었다.

<리카는 직장 상사 소타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 회사에서 승진하겠다는 야심도 없고 소타를 향한 절절하고 애틋한 마음도 없는, 그저 본능에 충실하고 순간순간에 마음을 쓰며 살아간다.
소타의 부인 미츠코는 남편의 외도를 끝없이 의심한다. 결국 리카와 남편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아차린 미츠코, 그녀는 남편 소타가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지, 멀리하는지 알지 못하고 주변의 여자들이 남편을 유혹한다고 생각한다.
분노로 눈이 먼 미츠코는 복수하기 위해 리카에게 접근해 맞선 이야기를 꺼낸다. 리카의 상대는 소타가 친동생처럼 여기는 케이치로, 미츠코의 가족과 오랫동안 한가족처럼 지냈고 외동딸 미우가 오빠처럼 따르던 사람이었다. 마침 불륜으로 치부되는 사랑에 지쳐 있던 리카는 미츠코의 계략으로 인해 소타와도 멀어진다. 결국 리카는 케이치와 결혼을 결심한다.
리카는 ‘어른 친구’라 칭하는 마키와 이즈미에게 결혼 준비를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마키와 이즈미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여성들로, 서예 수업을 오랜 시간 함께 하며 리카와 친분을 쌓았지만 좀처럼 서로에게 속내를 비치지 않는다.
마키는 결혼생각이 전혀 없는 40대 커리어우먼으로, 수많은 남자들과 가벼운 만남이 자존감을 세운다 생각한다. 그러나 늙어간다는 것과 혼자 사는 삶에 고민이 많다. 이즈미는 30대 후반의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지만 남편과의 불화를 겪고 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철저히 숨기는 이즈미. 리카의 결혼 준비를 계기로 마키와 이즈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이를 계기로 고고하기만 하던 그녀들의 우정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
출처 : 알라딘

일본에서 이미 드라마로 방영되었다고 하니, 드라마에서 각각의 캐릭터가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잠시 상상을 해보았다.
20,30대 여성들의 삶과 사랑 우정 뭐 이런 타이틀이 부제로 달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사람들의 댓글에는 이렇게 달리지 않았을까?
"이런 막장드라마 같으니라고..."

마키는 여자라는 생물이 전반적으로 어려웠다. 본인의 행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서 타인을 밀어내야 할 때 주저 없이 발을 들어 차내려 하는 방심할 수 없는 동물. 본인보다 열등하다고 판단한 여자에게는 아깜없는 칭찬을 통해 짓밟고, 월등하다고 판단한 여자에게는 처음 본 순간부터 발을 거는 존재들. 남자에게서 상냥하다, 여자답다, 밝다와 같은 말을 듣는 여자들일수록 더더욱 빈틈이 없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모르고 곱게 자란 귀한 집 따님 같은 여자들일수록 등 뒤에 철저한 계산을 마친 책략을 감추고 있게 마련이다. p40

아무래도 여자에 대해 표현하는 부분들이 계속 걸린다.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서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아니 그래서 이 소설 전체가 불편했는지도.. ).

좋았던 문장만 딱 옮기고 그만.

"믿음이란 내 안의 의심을 뿌리치는 일일 거예요. 그런데 의심은 나를 지키는 갑옷이죠. 그러니 갑옷을 벗고 무엇을 믿는다는 건 대단히 무방비한 일이에요. 작은 일에도 극심한 상처를 입고 마니까요. 그래도 상대를 믿는 것,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몸부림을 치면서도 그를 믿는 것, 그게 아닐까 난 생각해요."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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릿터 Littor 2016.12~2017.1 - 3호 릿터 Littor
릿터 편집부 지음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취향의 문제 일테지만,  잡지를 펼치고 나면 제일 먼저 관심 가는 분야의 글을 찾아 읽게 된다.
순서대로 읽는 일이 좀처럼 되지 않는 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면 때론 중간중간 놓치게 되는 글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럼 어때, 다음에 또 찾아 읽으면 되지. 하고 넘기기도 한다.

지난 호에서 황인찬 시인의 인터뷰가 너무 좋아서 이번 호를 펼치면서 역시 인터뷰 페이지를 먼저 펼쳤다.
배우 박정민과 작가 김숨의 인터뷰.
누가 더 좋다라고 할 것 없이 역시 둘 다 좋았다. .
릿터 2호와 3호를 읽고 나서 알게 된 매력인데, 인터뷰를 통해 한 사람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영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활자화 된 인터뷰를 읽고 난 뒤에 더욱 더.
그전에  인터뷰라는 형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뻔한 질문, 예상되는 대답들이 대부분이기도 했고 작품에 대한 인터뷰 역시 그냥 그 작품으로  느끼고 싶었다.

릿터를 통해 읽으면서 본 인터뷰들은 활자화 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김숨 작가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아, 내가 작가의 작품을 어려워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아.
이 작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아우라가 크게 느껴진다. 깊은 우물 하나를 품고 사는 것 같다. 온 몸으로 소설을 쓰는 것만 같다.

이번호 주제는 랜선-자아
"랜선-자아들의 목소리 덕분에 일말의 가능성이 생겼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삭제되지 않는다. 랜선의 세계에서 삭제는 무의미하다. 없던 일이 될 수 없다. 랜선-자아들이 랜선 밖 타자들의 변화를 일으켰다.p3"

나 역시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열심히 한다.
'나'를 기록하는 방식이지만 때론 아니 종종 '나'가 중심이 아닌 '타인'이 중심이 되는 글을 올릴 때가 많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도록 글을 올리고, 댓글을 확인하고, 좋아요가 눌린 수를 확인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공유하고, 좋아하고, 댓글을 달면서 마치 오프라인에서 친근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인 듯 착각하기도 한다. 때론 사진 한장을 올리고 불안해하거나 , 바로 삭제해버리기도 하고.
그런면에서 나의 자아는 굉장히 '소극적'인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읽으니 이번 호의 주제와 글들이 꽤 흥미로웠다. 조금 더 자기 검열이 생길 것도 같지만.

리뷰 코너에선 다행이 대부분 읽은 작품이라 이해와 공감도가 높아서 좋았고,  김금희 작가의 단편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는 단연 좋았다. 안태운 시인의 <이 모든 것이 여름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역시 기억에 남는다.

소설과 시, 리뷰, 인터뷰, 산문 어느 것하나 놓치기 아깝다. 
아직 읽지 못한 한 두 편의 글은 아껴 읽을 생각이다.

저는 인간인 저 자신의 의지를 그렇게 신뢰하지 않아요. 인간인 저의 의지라는 것이 늦여름 잠자리의 날개만큼 얇고 나약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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