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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9월
평점 :
# 내가 다 기억할 수 없는, 죽고만 싶었던 숱한 순간에 나를 살린 누군가의 문장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도 회복의 과정도 전부 잊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나는 위대한 책들을 읽고서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삶을 연명하고 있을 뿐이라고 고백했던 헤르베르트를 봐도 그렇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한 뼘이라도 더 훌륭해지는 건 아니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쉼 없이 읽었다. 그리스 로마 고전, 과학적 사실주의, 우주비행, 벌의 삶에 관한 책들, 카츠 같은 시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플라톤, 데카르트, 스피노자, 니체 같은 철학자들의 책, 우파니샤드 같은 종교서 등등 가리지 않고 읽었다. 그의 고백처럼 책 속에서 연명했던 것이다. - p8
진은영 시인의 산문을 읽었다.
'다시 본다,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일보> 지면에 연재했던 글을 다듬어 엮은 책이다.
스물여덟 편의 글이 담겨 있다.
책을 읽으면서, 독서 모임을 하면서, 글방 친구들에게 혹은 블로그에서 익명의 이웃들에게
책을 읽는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고..... 말해왔다.
그건 내 경험에 의한 이야기였다. 누군가 책을 읽고 돈을 많이 벌었다는데, 이름을 알렸다는데, 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읽는다고 말했다. 그게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는 믿는다고.
책 서문에 작가의 문장을 읽으며 그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혁명을 일으지도 못하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못하지만 '살기 위해서' 책 속에서 연명하는 지도 모른다는 것.
나는 그게 무슨 의민지 안다.
앞으로도 책을 통해 무엇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계속 읽고, 그 안에서 살아가겠지. 그게 나를 살게 하는 일일 테니까.
# (...) 카프카, 울프, 카뮈, 베유, 톨스토이, 플라스, 니체, 아렌트...... 여기서 다른 저자들은 다 그렇다. 그들에게 삶은 계속되는 소송이거나 400년 내내 분투한 뒤에야 겨우 이룰 수 있는 소망,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윗돌, 보상 없이 행하는 사랑, 끝없이 헤매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겨울 숲 같은 것이다. 또는 내 속에 울음이 사는 시간, 경멸을 통해서 극복되는 운명의 시간, 사회가 찍어내는 자동인형 같은 삶에 맞서는 시간이다. 이들은, 내 책을 읽는다면 넌 아침에 슬펐어도 저녁 무렵엔 꼭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겠지만 그래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준다.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하고 그가 분명 내 책을 읽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 능력에 대한 철학을 펼칠 수 있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책이 포기하지 않는 독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혹은 용감한 독자와 용감한 책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릴케의 시구처럼 우리는 책에서 자신의 그림자로 흠뻑 젖은 것들을 읽는다. - p 10
릴케의 시구처럼 멋지게 말하는 법을 몰랐지만, 책에서 자신의 그림자로 흠뻑 젖는 것들을 만나는 순간은 알 것 같다.
그것들을 읽을 때, 너무 좋아 신이 나고,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이 생기는... 대책 없는 열정과 즐거움을 만나는 순간. 물론 위로까지.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속에는,
세상과 다르지만, 힘들지만, 포기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는 '살아가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책의 서문에서 '책 속에서 연명'했던 것이다,라는 문장 속 '연명'이라는 단어가 계속 생각났다.
책 속에서 '연명'하다.
책을 읽으며, 살아가며 내내 이 단어를 떠올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