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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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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가. 나의 주체는 온전히 나인가. 누군가에 의해 '나'를 대리하는 또 다른 '나'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수히 많은 고민이 시작됐다. 말 그대로 이 책은 이제 '시작'을 말해 주었을 뿐이었다. 갈 길이 멀다.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다 읽었다는 시원함이 남아 있지 않다. 아쉽고, 두렵다.
어쩐지 내가 원하는 답을 결국엔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내가 대학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저자의 이전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흥미롭게 읽었다. 흥미롭다는 표현보다 좀 더 정확하게는 공감했고, 아팠고, 어느 순간엔 참담했다고 말하는 게 더 맞겠다.

그 이후, 저자의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글이나 기사들을 찾아 읽기도 했고, 그다음 행보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일 년여만에 이 책  《대리사회》가 나왔다.

고백하자면, 이번 책 《대리사회》는 전작보다 더 좋았다.
굳이 고백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내가 아마도 이 저자를 앞으로 쭉, 좋아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대학을 그만두고, 강의실이 아닌 사회로 나온 저자는 1년 동안 글만 쓰겠다는 각오를 뒤로한 채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아내가 있었고,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태어날 아이까지.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그를 다시 거리로 나가게 했다. 대리운전을 하면서 만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거리에서의 기록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우리는 온전히 '자신'인 것 같지만, 결국엔 사회가 만들어 내는 무언가의 '대리'로 살아간다는 저자의 시선이, '대리사회'라는 명명이 와 닿았다.  책을 덮은 뒤에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한 문장이 있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이다.p183' 라는 문장.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을'은 '을'일 뿐이라고, 결국 '갑'의 욕망을 대리해서 힘겹게 싸우는 존재들이라고, 그러니 희망 따위 버리라고 말하ㄷ는 것만 같아서.

저자의 첫 책을 읽었을 때도 느꼈지만 이번 책에서도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사회적인 시선이나 개인적인 상황이나, 주변의 상황들이 저자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세상을,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여전히 희망을 갖고, 자신의 미래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점이 참 좋았다. 그래서 독자인 '내'게 와 닿는 감동이 조금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 글은 "내가/우리가 이 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썼다고 적었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그 누구도 가르쳐준 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는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어 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그때부터는 '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다만, 한 걸음만 물러설 용기를 가지면 된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도 다시 나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라고 적었다.

적어도 저자는 이미 자신의 길을 선택한 듯 보인다. 대학에서 나오며 두려웠겠지만 여전히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고 있다. 불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현재에 머물며 내내 머뭇거리는 내 안의 깊은 약점 하나를 이 책이 툭툭, 건드리고야 말았다. 이제 나의, 우리들의 선택이 남아 있다.

대리운전을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사람이라서, 대리운전에 대한 이야기들이 꽤 흥미로웠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했고, 갑질이나 진상 고객의 이야기에서는 마치 내가 겪은 일인 것 마냥 분노했다. 혹시 대리운전을 할 일이 있다면 꼭, 기사님께 감사 인사를 해야지 하는 감정 섞인 다짐까지.

저자는 다시 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또다시 대리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주체로서 선택한 완벽한 주체적 대리일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단순히 지명을 외우고 막차 시간을 계산하는 데서 나아가 그 안의 ‘사람‘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그들은 언제 나가고 들어오는지, 그들의 도시는 어떻게 외부와 소통하는지, 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그러한 사유로도 확장된다. 그렇게 경험한 삶의 문법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대리가 아닌 온전한 주체로서 내 몸에 남을 것을 믿는다. p61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타인의 눈으로 자신의 공간을 바라보는 일은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괴물에 잡아먹히지 않은 주체들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행위다. 그러고 나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행동과 말은 통제되더라도 사유하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아주 어렵게 배웠다. p77

어쩌면 가족은 끊임없이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우리는 너를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주체와 대리의 경계를 넘나든다. 나는 아직 모든 가족을 주체로 두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안내하고 든 아니하고 든, 조금은 더 많이 대화하려고 한다. 기꺼이 그들을 위한 대리의 삶을 살며, 그렇게 조금은 더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p105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다. 대리운전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동네 마트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그 어느 노동의 공간에서도,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 ‘대리인간‘으로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사회에서 타인의 운전석보다 나은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p174

나는 나의 아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장 어두운 밤에 나를 위해 깜빡이를 켜둔 그곳으로 기쁘게 걸어간다. 나는 기꺼이 아내와 아이를 위한 대리가 되고 싶다. 그리고 아내 역시 아이와 나를 위한 대리로, 하지만 당당한 주체로서 살아갈 것을 믿는다. 그렇게 서로를 대리하면서, 그리고 주체의 언어로 상대방을 상상하면서 우리는 ‘가족‘이 된다. p121

대리운전을 하며 만난 손님과, 어머니와 내가 공유하는 감정은 결국 ‘분노‘다. 현실이 가혹하고 절박할수록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상의 판타지가 강요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공감과 즐거움을 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저마다에게 외로움을 주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분노를 토로하는 개인들도 많아졌다. 아마도 곧 노래와 음식을 넘어 또 다른 대리만족을 주는 무언가가 새롭게 등장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다시 열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리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개인들은 다시 다양한 방법으로 분노할 것이다. 다만 그 분노가 개인을 향한 혐오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 익숙한 공간에까지 이미 침투한 대리사회의 괴물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강요된 환각에서 깨어나 온전한 나로서/우리로서 ‘즐겁게‘ 싸워나가야 한다. 그러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 p214-215

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동자의 주체성을 농락한다. 자신을 대신해 내세울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에게 언제나 가혹하다. 그런데 그것은 명백한 위법이나 합법도 아닌,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법의 틈새를 이용한 ‘편법‘이다.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부여하고서는 무임금으로 사람을 부리고, 언제든지 해고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조차 보장하지 않아도, 기업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에 더해 국가/정부는 기업을 위한 법안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 현장의 주체가 아닌 대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 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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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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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것은 존엄과 안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안전하기 위해 가만히 있는 삶이 아니라 활동과 의견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를 요구해야 한다. 안전하기 위해 시위를 피해 다니는 삶이 아니라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는 게 안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 시위 자체가 우리 삶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과 무관심, 그리고 무모함을 막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활동이 안전하지 못할 때, 국가는 더욱 무관심해지고 무능하며, 무모해지기 때문이다. 이 위험을 막기 위한 활동이 안전하지 못할 때 국가는 흉기가 되고 우리의 삶은 파괴된다. p167

'망했다', '망해버려라',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라고 종종 말하는 나를 본다.
때로는 의식적이고,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말이다. '망하다'라는 말의 뜻은 '개인, 가정, 단체 따위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끝장이 나다'라는 뜻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내뱉는 순간에도 나는 '망하고' 싶은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자조적으로 '망해버렸구나' 내뱉었던 것 같다.

이 책,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듯 하다. '망해버렸어',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라는 말 뒤에는 '다시 잘 해보고 싶어', '처음부터 시작하면 어쩐지 잘 할 것만 같아'라는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일 테니까. 그런데 정말 다시 하면, 처음부터 시작하면 잘 할 수 있을까. 다시 망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에잇, 그러면 그냥 포기해버리자, 이런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두고 사람들은 다들 절망적이라고 말하고, 희망이 없다고 말하고, 망할놈의 나라같으니라고, 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정말 '망해버려라' 하는 진심이 클까, 다시 잘 됐으면 좋겠어, 하는 마음이 클까.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면 매주 그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국민들이 '정치'걱정 따위는 하지 않고 자신의 발전과, 가족의 행복을 고민하고 그에 맞춰 삶의 질을 높이는데 자신의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나라가 좋은 나라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처럼 정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 조차 뉴스의 신문의 정치면을 제일 먼저 보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하게 국민들에게 정치를 생각하게 한다. 나라를 걱정하게 하고, 미래를 걱정하게 한다. 이건, 분명 제대로된 나라가 아니다. 두 명만 모여도 대통령이 하야를 할까, 탄핵이 가결될까를 이야기하는 나라라니.

저자는 '나는 우리가 역사를 믿는다면서 왜 역사에 절망하며 역사 자체를 리셋하고 싶어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정념은 어떻게 우리를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시켰는지, 그리고 다시 역사로 귀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필요한지를 살펴보기 위해 이 책을 썼다'라고 프롤로그에 적었다.

1장 리셋을 원하는 사람들
2장 리셋을 부르는 세상
3장 리셋을 넘어서

세 장으로 나뉘어 서술하면서 우리는 왜 정말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분석하고,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쓴 게 우선 마음에 든다. 어렵다고 느껴지는 책은 시작부터 막혀버리게 되고, 그러면 그게 좋은 얘기는 아니든 우선 끝까지 읽지 못할테니까.

'전부다 가망이 없지만 특히 희망을 갖는 게 가망이 없다고 했다. 희망이란 삶이 지금보다는 나아진다는 기대가 있어야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런 기대가 없다는 것이다. 나아지려고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삶은 더 비참해지고 파괴될 거라고 우울하게 말했다.p18'

희망을 갖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 희망 자체가 절망인 사회.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  이 불온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정말 희망이란 가망없는 일일까. 그렇다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이 책은 이런저런 생각의 꼬리를 물게 만들었다.

'자아에 탐닉하지만 자기가 파괴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결코 심리적인 사건이 아니다. 개인이 병들고, 주체의 심리가 약해져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자기를 잃어가고 있고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바깥의 소멸과 함께 벌어진, 사회학적이며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지나치게 병리학적이다. 나는 주체를 '병리학'화하는 것이 바로 사회의 무능이라고 생각한다. p71'

세월호이후 우리는 멈추었다고, 생각한다. 2년이 지나는동안 변한 건 없었다.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다. 국민들은 국가를 믿지 못하고, 국가로부터 보호 받는다는 믿음은 사라진지 오래다. 국가를 부정하고, 스스로를, 나의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건 사회나 국가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라고 믿게 되었다. 국민들이 원하는 안전한 국가, 믿을 수 있는 국가가 될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또 다시 절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민 스스로 국가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촛불은 오래도록 꺼질 수 없을 것이다. 결국은 우리가, 국민들이, 당신과 내가 희망인 셈이다.

'고통 중에서 가장 크고 절망스러운 고통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을 직면하는 것이다. 그런 고통에 직면했을 때 사람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이 외면은 나만 살아남겠다는 외면이라기보다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다시 절망을 마주하고 좌절을 맛보지 않겠다는 외면에 가깝다.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 속에서는 서로의 얼굴을 대하는 것이 위로는 커녕 가낭 끔찍한 고통이 된다. 위로가 불가능하다는 것만을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덜 괴롭게 사는 것'을 택한다. p170-171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서운 생각을 한가지 하게 되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결국엔 희망이 사라진다면, 그래서 모두들 더 이상 희망따위 품고 살지 않게 된다면, 더 이상 촛불이 켜지지 않고 다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 살게 된다면 어쩌지, 하는 생각.
지난 역사가 부정되고, 우리 세대가 만들어가야 할 역사가 바로 쓰여질 수 없는 세상이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
그러면서 한편으로 다시 희망하는 내 마음을 만난다. 광장에 나가 서 있는 우리의 희망을 믿어 보기로 하는 내 마음을 만난다.

'100만에 대한 열광 속에서 봤어야 하는 것은 내 옆에 선 이들의 '얼굴'이다. 민주주의를 만드는 협력은 내가 기꺼이 점이 되는 것에서 시작되고, 존엄은 옆에 선 이를 점이 아닌 동등한 목소리이자 얼굴로 기억하는 데서 시작된다.
나는 우리 사회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협력과 존엄. 광장에서 점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기꺼이 점으로 협력하자. 그러나 광장에서 나란히 점으로 있던 다른 이의 얼굴을 기억하자. 그 얼굴이 가진 나와 평등한 존엄, 나와 평등한 목소리의 힘을 기억하자. 삶의 전 영역에 드리워진 히드라처럼 증식하는 왕의 목을 치자. 만약 내가 왕이라면 기꺼이 내 목을 치자. 그래서 삶의 영역에서 '동료 시민'으로 서로 만나자. 민주주의가 실패한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p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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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페미니스트 여자의 몸을 말하다
문현주 지음 / 서유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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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닥터페미니스트 여자의 몸을 말하다>을 청소년기에, 결혼 전에, 임심 전에 읽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특히 초경과 피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나중에 아이에게 꼭 읽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37년을 여자의 몸으로 살았건만 아직도 여자의 몸에 대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랫배가 콕콕 쑤시면 더럭 겁부터 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여전히 산부인과에 가는 건 겁나고 꺼려진다. 그러니 아직 결혼전인 여자들은 얼마나 어려울까 싶다.

내가 처음 자발적으로 산부인과에 가기 시작한 건 스물 두살 무렵. 생각해보니 처음이었던 듯 하다. 시트에 다리를 벌리고 눕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여자인게 참 별로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면서 초경을 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생리통의 고통에 바닥을 데굴데굴 굴었고 고등학교 시절엔 몇달에 한번씩은 생리통으로 결석을 했다. 거짓말처럼 아이를 낳고 생리통이 사라졌다. 알 수 없는 몸의 신비를 경험한 셈. 그때, 나는 엄마에게 친절하게 생리에 대해, 여자의 몸에 대해 이야기 듣지 못했다. 오히려 그즈음 내게 생리대를 사다 준 건 아빠였다. 아빠 역시 여자의 몸에 대해 잘 알리 없으므로 아마 딸에게 생리대를 사주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내지 않았었을까.

아이에게 나는 꼭, 친구처럼 언니처럼 여자의 몸에 대해, 초경에 대해, 피임에 대해 직접 알려줘야지. 그래서 조금 더 이 책을 진지하게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여성으로 태어나 어머니의 딸로 두 딸의 엄마로, 숙명처럼 여성 환자를 만나는 한의사로 살고 있다' 소개가 마음에 든다. '닥터페미니스트'라는 단어도 어쩐지 믿음이 간다. 오래 여성의 몸에 대해 공부하고, 직접 여성 환자들을 만난 의사지만 책 속의 이야기는 전혀 딱딱하지 않다. 의학서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선배 여성의 따뜻한 조언이 담긴 이야기라는 쪽이 더 마음이 간다.

책은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Part 1. 몸이 보내는 신호 _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Part 2. 기적 마중 _ 엄마가 된다는 것
Part 3.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면 _ 우리가 하고 싶은 말

Part 1에서는 초경과, 생리불순, 피임, 수족냉증, 질염, 섹스 등 청소년기부터 알아야 할 여성의 몸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미 몸은 경험한 것들인데도 나 역시 무지했구나 싶을만큼 새로 알게 된 내용들이 많다. 엄마가 마치 딸에게 이야기 하듯 전해주는 '몸'에 관한 이야기.

Part 2에서는 소주제에서 밝히고 있듯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임신잘하는 법, 임신에 도움이 되는 음식, 해로운 음식, 건강한 임신을 위한 주문, 입덧에 관한 이야기, 산후조리에 관한 이야기 등 실제로 임신을 계획 중이거나 임신중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 들이다.

Part 3에서는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 들이다. 여성으로서 당당하거 건강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저자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야기 들이다.

책을 읽으면서, 다 읽고 나서 내내 생각하는 건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의 아이에게 해 줄 '여성의몸'에 관한 것과 '건강한 몸, 건강한 마음' 만들기 이다. 몸이라는 건 '내가 무얼 먹느냐',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이리저리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건강하기를 바라면서 늘 몸에 득될 것 없는 음식들만 먹어왔구나, 운동은 지지리도 안했구나 나름 반성하게도 한 책이다. 그리고 다이어리의 계획에 적어두었다. '나와 가족의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음식 만들어 먹기'

자신의 몸이 변하고 있는 것을 느끼지만 터놓고 이야기 나눌 만한 어른이 주위에 없는 청소년들, 사춘기에 접어든 딸에게 '여성의 몸'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엄마들, 임신으로 난임으로, 육아로, 산후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많은 여성들이 이 책을 만나면 좋겠다.

월경은 부끄러운 일이 아냐. 성숙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매달 하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생리활동이니까. 세계 각지에서 전통 부족을 연구한 인류학자들은 각 민족마다 초경을 축하하는 다양한 의식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대. 부족 전체가 초경을 한 소녀를 축복하며 축제 같은 의식을 베풀기도 하고, 어떤 부족에는 초경을 한 소녀가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내면을 살피고 에너지를 모을 수 있게 돕는 문화도 있다고 해. 우리도 요즘엔 가족들이, 특히 아빠가 딸의 초경을 축하하는 행사를 많이 하던데 참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해.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어린이에서 소녀가 된 내 딸! 초경을 시작하며 몸에 대해, 건강에 대해 관심도 늘고 궁금한 점도 많아졌을 거야. 살짝 귀찮지만 안 오면 기다려지는 월경을 친구 삼아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사이좋게 지내렴. 월경이 보내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면서 스스로를 잘 돌본다면 어느새 지혜롭고 건강한 여성으로 성장해 있을 거야. p34-35

내 몸이 보내는 참 고마운 메시지 월경의 신호에 응답하세요. 너무 힘들게 몸을 혹사하고 있다면 잠시 쉬어가고 정신적 스트레스에 지쳐 있다면 토닥토닥 나를 위로하면서요. 몸에 좋은 음식으로 스스로를 대접하고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적정 체중으로 최상의 상태를 만드세요. 어느새 반란을 일으켰던 호르몬은 균형을 잡고 규칙적인 월경주기를 회복하면서 다시 일상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p42


자, 이제 당당히 피임을 이야기하세요. 가짜 상품 정보가 붙어 있는 콘돔을 은밀히 배송받거나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피임약을 구입하지 마세요. 나에게 맞는 효과적인 피임법을 찾고, 친구들과 피임의 경험을 자유롭게 공유하고, 나를 잘 아는 주치의와 편하게 상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모르는 척, 얼렁뚱땅 행하면 답이 없습니다. 꼼꼼하게 잘 따지고 성실히 실천하여 부디 계획하지 않았던 임신으로 눈앞이 깜깜해지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p75

‘참을 수 없는 내 몸의 무거움‘ 으로 고민 중인가요? 내 몸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 획일화된 기준에 내 몸을 꼭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건강을 해치는 과도한 살들과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혹시 몸이 어디 안 좋은 건 아니니?" "건강한 음식 제때 챙겨 먹지 못할 만큼 바쁜 건 아니고?" "운동할 틈도 없는 거야?" "스트레스가 있다면 잘 풀자고." 자기 자신과 이런 대화들을 나눠 보세요. ‘자뻑‘이면 어떤가요. 울퉁불퉁 튀어나오고 삐져나왔어도 활기차고 건강한 몸, 그 몸을 사랑하고 정성껏 돌보는 당신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p207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보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모여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 되고 죽음은 삶의 매듭이기도 합니다. 사는 동안 죽음을 자주 이야기하고 상상할 때 내가 원하는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저는 햇볕 잘 드는 창가, 가장 편하고 익숙한 공간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고 싶습니다. ‘이만하면 잘 살았다‘ 안도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장례식에서는 그동안 기록한 삶의 여정들이 소박하게 나눠지면 좋겠습니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도란도란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게 말이죠. 모든 것이 끝나면 땅으로 돌아가 평소 좋아하던 햇빛을 듬뿍 받으며 작은 나무 한 그루 키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p24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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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됨을 후회함 - 모성애 논란과 출산 결정권에 대한 논쟁의 문을 열다
오나 도나스 지음, 송소민 옮김 / 반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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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엄마가 된 걸 후회해'라고 말할 때, 마음 한 켠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사랑스런 나의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거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종종 사로 잡혔다.

"여성들은 엄마로서의 삶을 후회하는 것인지 아이 그 자체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라고 뚜렷하게 구별짓는다. 엄마가 아니고 싶어 하는 동경에는 자녀가 없는 상태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 소망이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p109"

아, 바로 그거였다. 나 역시 엄마가 아닌 한 여성으로서의 주체적인 삶을 동경하는 것이지 지금 내 사랑스러운 아이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책 <엄마됨을 후회함>은 그런 내게 시의적절하게 다가와 준 책이었다.

        

이 책은, 엄마됨을 후회한다는 고백이 아니라 '엄마가 되기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엄마가 되거나, 엄마가 되지 않거나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혼한 여자가 엄마가 되지 않기로 선택하는 건 쉽지 않다. 또 자발적으로 꼭 엄마가 되고 말거야 하고 아이를 낳은 경우도 그리 많지 않다(이 책에서 연구한 바에 의하면). 대부분은 결혼을 한 이후 엄마가 되는 게 당연시 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결혼을 하지 전에는 언제 결혼할거니?, 결혼을 한 뒤에는 아이는 언제 낳을거니? 아이를 낳은 뒤에는 둘째는 안 낳아? 하는 식의 질문을 끊임없이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에게 '엄마 됨'은 거의 강요 수준이다.

이 책은 저자 개인의 생각으로 적은 글이 아니라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엄마'가 된 이들을 인터뷰하고 연구해 낸 결과물이다. '이 책에서는 여성들이 엄마가 된 다양한 경로를 묘사하고, 자녀가 태어난 후 엄마들의 정신세계와 감정세계를 분석했다. 또 누구의 엄마도 아니고 싶은 소망과 아이들의 엄마라는 사실 사이에 놓인 갈등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서문 p13'

이 책을 통해 만난 여러 여성들, 여러 엄마들은 국적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지만 결국 비슷한 고민과 후회를 하고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그만큼 세계를 막론하고 여성이 엄마가 되면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과, 억압받는 것들이 많다는 게 안타까울 뿐 .

' 엄마로서의 삶에 대한 후회가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회적 난관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된다. 후회를 개인 적인 일로 치부할 때, 즉 개인적으로 엄마이기를 포기한 것으로 해석할 때, 엄마가 될 것을 촉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면 수많은 사회가 여성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여성들이 얼마나 불이익을 당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이다. 서문 p13'

책의 서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엄마가 된 걸 후회'한다고 말하는 게 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임을, 그걸 말하는 순간 나쁜 엄마가 되는 것만 같아 죄책감을 느낄 이유 또한 없음을 이 책을 통해 조금 인정받은 듯 했다.

물론, 이 책이 그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하나의 주체로서의'나'와 아이 '엄마'로서의 '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할 것이다. 아이를 가장 우선순위에 둘 것이고, 아이를 위해서라면  '나'는 저 만치 내팽개쳐 두기를 주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발적으로 선택했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든 나는 역시 '엄마'이기 때문에.
다만, '나'의 행복을, '나'의 안녕을, '나'의 꿈을 꾸는 일에 주저하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굳건히 세운다. 그리고 응원하단 세상의 모든 '엄마'들과 엄마됨을 포기한, 포기할 수많은 '여성'들을.

- 아이들은 자아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커지면서 엄마를 떠나 개인으로 성장하는 반면, 여성은 엄마로서의 정체성에 의해 다음 단계로 발전한다. 포대기를 두르던 엄마에게서 유모차를 미는 엄마가 되고, 헤어지면서 손을 흔들어주는 엄마가 되고, 마중 나가 서 있는 엄마가 된다. 하지만 항상 엄마다. 여성의 발전은 수직적인 반면, 아이들은 엄마와 떨어져나가는 `수평적` 발전을 보인다. p62

- 현재 여성은 절대로 `그냥` 엄마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인정받고 싶으면 직업도 가져야 하고, 시간을 쪼개 유치원이나 학교 어머니회에 기꺼이 참여해야 하고, 아무리 피곤해도 섹시함까지 유지해야 한다. 메레디스 브룩스는 노래를 통해 `난 개년, 난 애인, 난 아이, 난 엄마, 난 죄인, 난 성녀`라고 모순되는 특징들을 지적했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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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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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사전에서 <사회학>의 정의를 찾아 보았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라는 책 제목을 보고 난 뒤, 실은 <사회학>이라는 용어에 방점이 찍혔다. 어렴풋이 알 듯하지만 정확한 정의가 뭔지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었다.

 

이 책의 추천사에 철학지 지바 마사야는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기묘한 '바깥'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대단한 모험은 아니다. 기묘하게 단편적인 장면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사회. 한순간 반짝이는 이질감.'

이 추천사로 책에 대한 호기심이 더 높아진 게 사실인데, 아마도 사회학 이라는 용어가 가진 '여러가지 사회 현상의 통일적인 관계'에 썩 어울리는 추천사가 아니었나 싶다. '기묘한 바깥'이라는 말이 이 책과 가장 어울린다고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생각한다.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1967년 생으로 사회학자이다. 오사카 번화가를 자주 어슬렁거리며 재즈와 동네 책을 좋아한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면서 <동화와 타자화>,<거리의 인생> 등의 책을 썼다. 저자는 '사회학자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경우에는 한 사람씩 찾아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당사자 개인의 생화사를 듣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니까 이 책 역시 저자가 만난 사람들, 길거리의 이야기이다. '콕 집어 내세울 만한 주제나 내용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글자 그대로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주욱 늘어놓고, 그것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해 생각한 책입니다.'라고도 적었다. 

이 책의 제목이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라는 것, 그게 책 속의 글들과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개개인의 삶이란, 어떤 큰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어찌 보면 자잘한 에피소드들의 묶음 일 테니까. 저자 역시 그 부분을 집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일본인 저자이다 보니, 책 속에 담긴 에피소드들이 간혹 우리의 정서와 맞지 않아 낯설기도 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일본이든 한국이든 한 사회 안에서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다르지 않으니 읽으면서 점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저자의 어슬렁거리기는 실제로 길거리를 넘어서 인터넷 속의 블로그까지 이어진다. 내가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들을 블로그에 적고, 그것을 누군가 읽고 생각하고 그 너머의 이야기까지 만들어 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괜스레 짜릿해진다.  젊은 사람, 연륜이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 길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거창하게 사회학이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좋을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밑줄 그으며 읽은 문장들이 많았는데, 그만큼 이 책이 내게 알려 준 게 많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때론 삶의 지혜를 다른 누군가의 글을 통해 배우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밑줄 그은 부분을 많지만 다 옮겨 본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어 보고 싶어질 것이고, 누군가는 밑줄 그은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만족할지 모르니까.


- 어떤 사람이든 다양한 `서사`를 내면에 담고 있다. 그 평범한, 보통다움, `아무것도 아님`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쥐어뜯기는 것 같다. 우메다 번화가에서 옷깃이 스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보통의` 이야기를 붙안고 살아가고 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인생의 이야기가 구술 채록의 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조차 뜻하지 않게 이야기가 늘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실은 이런 이야기가 딱히 숨어 있는 것은 아니지 싶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눈앞에 있고, 우리는 언제나 그것과 접촉할 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p29

-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란 본래 `우리`에게조차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잃어버리지도 않고 단절당하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고,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 무언가일 뿐이다. p34

-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 가든 있을 곳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다. (중략)
소수자(minority)라고 불리는 사람들, `당사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들 소수자나 이른바 `보통시민`은 모두 기본적으로 자기가 있을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일이나 가족이나 인간관계 등으로 골치가 지끈지끈 아플 때만, 잡다한 일에 마음이 얽매여 눈코 뜰 새 없을 때만, 우리는 있을 곳의 문제를 잊고 지낼 수 있다. 우리에게 있을 곳이란 없든지, 아니면 일시적으로 그 문제를 잊고 있을 뿐이든지, 둘 중 하나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도, 누구와 있어도, 있을 곳이 없다. 비록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있어도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바깥세상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p80-81

- 우리는 우리 인생에 꽉 묶여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언가 아주 불합리하고 복잡한 사정에 의해,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장소에서 태어나, 다양한 `불충분함`을 떠안은 `나`라는 것에 갇혀, 평생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이란 것은 종종 퍽이나 쓰라리다.
무언가로 상처를 입었을 때, 무언가에 상처를 입혔을 때, 사람은 우선 입을 다문다. 꾹 참으면서 견딘다. 또는 반사적으로 화를 낸다. 소리를 지르거나 말대꾸를 하거나 노려보기도 한다. 때로는 손찌검을 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한편 웃을 수도 있다.
마음이 아플 때의 반사적인 웃음도, 당사자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는 자학적인 웃음도, 나는 둘 다 인간의 자유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이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실현 같은, 말만 그럴듯한 것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렇게 거대하고 용장한 서사 속에 없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가장 괴로울 때 웃을 자유가 있다. 가장 힘든 상황 한복판에서조차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가 있다. 사람이 자유다. 이 말은 선택지가 충분히 있다든가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버티고 있는 꽉 막힌 현실의 끝자락에서, 딱 한 가지뿐인 무언가에 남겨져 그곳에 존재한다. 그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p97-98

-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는, 때로, 다양한 형태로, 그것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된다. 이를테면 행복을 믿은 탓에 행복에서 길을 벗어나 버렸을 때는 이미 대처할 수 없을 만큼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일 경우가 있다. p108

- 돌이켜 보면 정말 한심하고 별 볼일 없는 문제로 끙끙댔구나 싶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때때로 상상해 본다. 잘생기고, 행복하고, 아무것도 부족할 것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는 자신을..., 남에게 칭찬받고, 평안하고,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인생을... 가족과 더불어 행복한 인생을...
지금 현실적으로 그러하듯, 매일 무사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은 부족한 것 투성이, 아귀가 잘 맞지 않는 것 투성이다. 그것은 껄끔껄끔하고,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어릴 적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고, 협소하고, 단편적이다. p115-116

- 아픔을 견디고 있을 때, 사람은 고독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도, 우리가 느끼는 격렬한 통증을 뇌에서 꺼내서 건네줄 수는 없다. 우리의 뇌 속으로 찾아와 느끼고 있는 아픔을 함께 느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다른 누군가와 살을 맞대고 섹스를 하고 있을 때에도 상태의 쾌감을 느낄 수는 없다. 부둥켜안고 있을 때조차 우리는 그저 각자의 감각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p138-139

- 누구도,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계, 자기가 누구인가를 완전히 망각한 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은 우리 사회가 꾸는 꿈이다. p170

-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가 양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올바름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 본 올바름이다. 이것이 타자에게도 통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속임수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이비 의학에 빠져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제멋대로 우리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도저히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이라도, 그 상황은 그 사람에게 `진정한` 자기 자리일지도 모른다.
이러할 때 단편적이고 주관적인 올바름을 휘두르는 것은 폭력이다. p201

- 우리는 우리가 놓인 이 처지를 어떤 벌을 받았다거나 누구의 탓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자신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떤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무의미한 우연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미한 우연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타고나 자신으로 존재하다가 죽어 가는 수밖에 없다. 다른 인생을 선택하기는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p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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