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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 무너뜨리기 - 세상을 지배하는 가부장제의 교묘한 작동 원리를 파악하고 해체하는 법
캐럴 길리건.나오미 스나이더 지음, 이경미 옮김 / 심플라이프 / 2019년 9월
평점 :
-20251130 캐럴 길리건, 나오미 스나이더.
어릴 때 나는 혼자였다. 나는 내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우연한 (알 수 없는) 때에 벗어날 수 있었다. 제법 이른 시기였고, 그것은 어느 정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있었다. 권위/권력/폭력으로 내리누르는 압박과 회유, 별종 취급을 당하며 무리에 속하지 못하는 (아마도 그들이 벌칙처럼 내리는) 소외, 정보 비대칭, 외로움.
이 책은 그 두 가지(관계냐 목소리냐)를 맞바꿀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구조가 가부장제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또다른 사람들은 권력과 지식의 복합체가 그랬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내 독서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이 제일 잘 들어맞는다고 주장할 정도는 못 되지만, 일단은 이번에는 가부장제가 잘못했다, 하는 목소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책의 번역은 말하는 것을 듣는 듯하게 -입니다체로 되어 있었다. ‘부당함에 맞서기’세미나를 계기로 캐럴과 나오미가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둘은 주고 받듯 스스로의 경험과, 경험하게 된 다른 이들의 이론이나 주장과, 연구 중 만나게 된 다양한 사례가 된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의 목소리를 겹겹 쌓아 나갔다. 성별, 인종, 계층 등 다양한 교차성을 불문하고, 모두가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되는 과정과 결과를, 관계를 위해 자신의 욕구와 목소리를 희생했지만 결국 그 때문에 제대로 관계 맺지 못하는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프로이트의 주장(애도와 분리의 인정을 성숙하고 건강한 반응으로 봄)을 뒤집는 분리에 대한 존 볼비의 주장이 특히 흥미롭게 읽혔다. 모두가 선천적으로 애착의 욕망을 가진다.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한 채 애착 대상을 상실하고, 관계 맺은 이들과 분리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할 때 점점 절망으로 나아가는 전개가 제법 내 일상의 고민과 들어맞는 부분이 있었다.
가만 보면, ‘낙화’니, ‘님의 침묵’이니, ‘진달래꽃’이니, 이별과 한을 다른 나아감으로 승화하는 작품들을 문학사에서는 꽤 높은 것으로 친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사실 여성의 목소리를 흉내낸 남성 시인들의 것이다. 대개는 크게 슬퍼하고 통곡하는 소리를, 곡비의 일을 천하고 약한 여성들의 것이라며 격하한다. 헤어짐이나 빼앗김에 분노를 터뜨리는 설정의 대중 예술 속 여성을 호감있게 보는 사람들은 신선한 것으로 여기고, 비호감으로 보는 사람들은 질척거리고 의존적이라고 비난한다. ‘삐딱하게’의 상실 후 막나가는 남성의 분노는 멋지게 보고 공감하지만, 여자 가수들의 이별 노래는 헤어진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거나(‘작별‘), 이 기회에 새롭게 달라져서 후회하게 만들거라 하거나(’보여줄게‘, ’배반의 장미‘), 더 좋은 다른 사람을 만나겠다고 다짐하거나(‘Go away‘), 꺼지라고 하거나(‘I don‘t care), 주체성 있다고 하는 노래들도 기껏해야 상대에게 복수하겠어- 하는 정도이다. 내가 대중가요를 많이 몰라서 이 정도밖에 못 읊는 걸 수도 있다. 언니들이 부르던 노랫말을 만든 사람이 내가 꼽은 곡중 딱 한 명 제외하고 다 남성들인 건 우연이라 할지 내가 그런 것만 고른 건지 판단하기에는 사례가 너무 적긴하다. 좋은 이별이란 게 있긴 해? 화사(언니인 줄 알았는데 나보다 11살 어리다… 아 시간이란…)가 굿 굿바이 하긴 했다만… 아, 내가 착각했는지도. 예나 지금이나 대중예술이나 서사에서 저항은 펑크와 락이 잠깐 시끄럽던 시절을 제외하면 설 자리가 없는 촌스러움일지도 모르겠다.
캐럴은 가부장제를 민주주의와 대비되는 용어로 사용한 다. 그 점이 신선했다. 독재, 파시즘, 전체주의(다 비슷한 소린가), 중우정치, 신자유주의, 제국주의 등을 대척점에 세운 경우는 많이 봤지만 가부장제를 그 반대편에 놓는 건 내가 책을 너무 안 봐서 그런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또 자신을 잃고 사랑을 잃고 목소리를 잃게 만드는 이즘이라면, 그건 민주주의에 가깝진 않을 것 같다. 혹시라도 잘 몰랐는데 그런게 민주주의라고, 대의와 정의를 위해 잃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많은 사람이 말한다면, 난 패대기 칠 거다 그런 민주주의 따위… 그러니까 유교 민주주의 같은 소리는 제 앞에서는 치워 주시구요...
책 후반부에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의 갈등을 화해로 바꾸길 바라며 많은 여성이 모였던 이야기를 언급하는 부분은 감동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같은 여성들조차 짜치게 만들 언어도 있었다. ‘우리는 여성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어머니입니다.(182), ‘우리는 어머니이며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권력과 관계를 맺고 있으니 사실 발생하는 일에 관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길을 가로막지 않았으며(…, 183). 베껴둔 글 말고도 어머니 타령이랑 성경 속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딸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그에 대해(사라에 대한 부분) 쓰지 말라는 사람들도 언급한다.
모든 여성이 어머니는 아니다.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길 원하지는 않는다.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책에서 모성이라는 말을 한 번이라도 언급한 적은 없지만, 돌봄의 윤리에서 처음 알게된 캐럴 길리건이 말하는 돌봄이 그런 어머니들의 뭔가라면 자기들이 발딛고 선 부채꼴 각도를 너무 날카롭게 좁혀버리는구나 싶었다. 어머니냐 아니냐 가지고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고… 비혼과 기혼과 미혼이 서로 여성의 적이라며 헐뜯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그런 의도가 저자한테 없었더라도 여성 대표를 자처하면서 어머니성으로 좁혀버리는 건 논쟁의 여지가 있다. 여성이냐 아니냐 가지고 싸우다가 너넨 우리편 아님 하고 LGBT+ 일부를 배척하는 상황도 슬프구만… 전쟁 반대는 옳지만,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라는 명분은 고귀하지만 너무 좁다… 인간과 여성을 너무 좁혀 버린다.
책은 기대했던 것보다 좋았고, 읽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었다. 그래서 별 다섯을 주려다가 후반부에 캐럴의 일부 서술에 좀 짜게 식어서 하나 뺐다. 나오미가 미투 운동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리뷰해주며 경청과 지지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마무리한 건 도움이 되었다. 트럼프 1기 시절, 2018년에 나온 책을 2025년에 읽는데 아니 그 트럼프가 또, 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지난한 싸움에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버티고 있을까, 그 목소리들이 무엇에 묻혀 내게 닿지 않을까(아마도 내 게으름? 내 불안? 무지?) 싶었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읽을만한 책이었다. 그런데 표지디자인도 마케팅용 카드뉴스도 별로 안 끌리게 만들어놔서 그런가, 많이 안 읽힌 것 같아서 유감이다. 필요한 담론이, 논쟁이 널리 퍼지려면 자본주의가 열일해야 된다는 게 역설이구만...
+밑줄 긋기
-즉 가부장제는 관계란 어차피 틀어지고 회복할 수 없는 것이라 단정 지으며 그 관계를 희생양 삼지요. 달리 말하면 심리적으로 상처 입혀서 심리적 ’이득‘을 얻는 셈입니다. 따라서 피할 수 없고 참을 수 없다고 여겨질 상실에 취약해지지 않으려고 우리는 정말 원하는 것, 즉 사랑을 처음부터 회피합니다. (29)
-관계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으며, 가까이 있을 때도 있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있지만 언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멀리 가버릴 수 있다는 위험을 알기에 안정된 관계를 확보하려면 친밀해져선 안 된다는 사실도 알았지요. 아무것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뿐이라는 논리 말입니다.(51)
-소녀들은 자신의 솔직한 목소리,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 주체적인 목소리를 누군가가 “어리석고”, “유난스럽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점점 속마음을 감추게 됩니다. 관계를 맺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죠. (53)
-(볼비는) 애착을 인간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평생 달고 다니는 욕망이라 설명하고 자아와 타인 간의 거리 두기, 분리는 관계의 상실에 적응하지 못해서 나오는 반응이라고 봅니다. 모든 관계 안에 건강한 성장의 씨앗과 가장 고통스러운 트라우마의 씨앗이 공존한다는 그의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볼비는, 관계를 잃은 후에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을 때 몸이 고통스러운 것처럼 마음 역시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지므로 방어벽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이런 방어벽은 회복할 수 없이 망가진 관계에서 우리를 지켜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적응과 파괴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친밀함과 관계 맺을 가능성에서 자신을 배제하고 타인이나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게 되지요. (76-77)
-캐럴은 관계의 상실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이 너무 커지면 건강한 저항이 심리적 저항의 형태로 바뀌면서 자아와 타인과의 연결선을 끊어버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행위라 여겨지니까요.(77)
-일단 거리 두기 단계가 시작되면 우리는 돌봄이나 인간적 연대를 향한 염원을 부인하고 그것과 인연을 끊습니다. 관계에서 멀어질 때 발생하는 상실에 대처하기 위해 자기중심적이 된다거나 사람보단 물질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 것으로 보상받으려 하지요. 이것은 볼비가 ‘강제적 자기 의존’이라 부르는 전략입니다.(…) 거리 두기에 익숙해진 사람은 관계를 향한 열망과 잃어버린 대상이 뒤섞여 생긴 그림자에 정신 상태가 어둡게 가려진 상황이라고 보면 됩니다. 거리 두기를 하는 사람은 사랑을 향한 열망이나 상실의 고통을 품고 있다가 무의식 속으로 밀쳐버립니다. 따라서 그것이 관계를 형성할 능력을 압도하며 유령처럼 떠도는 그림자가 된 것도 모릅니다. (84-85)
-캐럴은 타인을 자애롭게 돌보라는 여성스러움의 명령이 관계 맺기를 막는 장애물이라고 말합니다. 여성스러운 돌봄을 구현하려면 자아를 가져선 안 되기 때문이지요. 자아 없이 돌봄을 행하면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경험, 생각, 감정, 욕구, 신념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아 없이 소위 이타적으로 돌보기만 하는 자를 여성스러움의 아이콘으로 혹은 이상형으로 떠받드는 가부장제 문화는 여성에게 ‘관계’를 위해 진정한 관계 맺기를 포기하도록 부추깁니다. 자신이 관계에 몰입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돌보는 것은 진정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달리 말해 돌봄을 받는 이와 관계를 맺지 않고 돌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지요. 가부장제는 돌봄의 행위에 필요한 지성과 능력을 무시하면서 돌봄 행위자가 저임금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102-103)
-그들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질문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푹 빠져 자신이 정작 포기했던 자아를 대신 발견해줄 이성애자 남자’를 갈망합니다. 반복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밀레니엄 시대 여성들과 내가 암묵적이건 명시적이건 끊임없이 들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들을 메시지, 즉 여성은 자신의 욕구를 부정함으로써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한다는 말을 생각합니다.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적당히 타협한 자아 개념은 보다 강력한 타인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함으로써 복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3)
-자유를 얻기 위한 여성들의 투쟁은 남성이 수치스럽다고 여긴 감정을 다시 각성하도록 부추길 수 있습니다. 남자가 되면서 감추어야만 했던 사랑과 연민에 대한 절실함 말이죠. 이런 시각에서 보면 페미니즘을 향한 포격과 반발은 여성이 해방되면 현재의 지위와 권력, 명예를 잃을 것이라는 남성의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게다가 여태까지 남성이 어떤 식으로든 부인할 수 밖에 없다고 느껴왔던 욕구를 어떻게 여성이 대신 담아내고 감추는 역할을 도맡아 왔는지 드러날 것이 뻔하지요. 이런 의미에서 폭력 및 폭력의 위협은 취약성과 갈망이라는 수치스런 감정을 추방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또한 여성을 떠나지 못하게 막으려는 절박한 시도이기도 했고요.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과 관계 맺은 여성의 경우 그녀를 가장 큰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는 그를 떠나는 것입니다. (106, 우리 아빠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상실을 강요하고, 항의를 수치스러워하고, 공명을 왜곡함으로써 가부장제는 우리를 항의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거리 두기로 이어지는 길 위에 서게 합니다. 즉 거리 두기라 함은 가부장제 문화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다 보면 생기는 병리적 상황에서 활용하는 심리적 방어 전술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파국을 맞은 관계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우리 내면의 능력과 우리 자신을 분리시키는 기제이기도 합니다. 관계의 파탄은 결국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등 온갖 형태의 억압을 의미하므로 결국 그런 부당한 구조까지 지속시키는 것이지요. (142)
-관계에서 일어나는 상실은 사실 문화적 각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기에 여기에 맞서 항의하다 보면 어떤 구조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 구조는 상실을 보이지 않게 만들거나 당연한 것 혹은 필요한 것으로 몰아감으로써, 회복할 수 없는 것으로 몰아감으로써 이것을 보존합니다. (151)
-민주주의는 일상적인 저항의 영역에 존재했습니다. 내 의견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내 욕구가 충족되기를, 내 소망이 고려되기를 주장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부당함은 철학적이거나 추상적인 이슈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줄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건 어쩌면 타인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할 때 얼마나 억울하고 부당하게 느껴지는지를 내가 잘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행위는 그저 올바르다고 여기는 것을 행하고 나를 포함해 내가 관심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자주 말하는 “그건 공정하지 않아요”라는 외침이 이게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가? (154)
-그들은 소녀들에게 실제로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지 말고 타인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라고 조언했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다른 성인 여성에게 제지당한 채 성인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 여성들은 말함으로써 치러야 할 대가와 말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이득을 알고 있지요. (160, 그런 성인 여성의 위치에 놓이고 싶지 않았어요...그렇지만 벗어날 수 없었고... 정교한 척하지만 사실은 허술한 기계의 부품일 뿐인 나...)
-내가 던진 질문(“정말 그렇게 생각해?” 또는 “그것이 왜 궁극의 악몽인가요?”)은, 자존감을 무너뜨려 소녀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아내의 외도를 최악의 상황이라고 여기도록 남성을 세뇌하는 가부장제 각본에 던진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짐으로써 깊이 묻어두었던 목소리가 드러났습니다. 그런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논쟁거리인 바로 그 목소리를 밖으로 해방시키도록 공명한 겁니다. 나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이 구조 때문에 수치스러움으로 낙인찍히고 침묵의 늪에 빠져 영영 돌아오지 못한 목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금세 깨달았죠. 또한 객관성 혹은 중립성을 지킨다는 명분이 연구에 적용되어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는 경우가 허다하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168)
-관계를 맺으려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관계 맺는 능력을 생각해봅니다. 위계질서를 만들어내고 이를 유지하려면 이런 능력이나 욕망은 제지하고 억압해야 할 표적이 됩니다. (171, 1984가 생각났다)
-볼비가 설명한 대로 상호 호응이 전제되지 않는 관계가 난무하는 환경에서는 거리 두기가 오히려 그 상황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전략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부장제 문화에 다양한 방식으로 적응합니다. 관계에서 거리를 두거나, 자족적이고 독립적이며 타인이 필요치 않은 것처럼 행세하거나, 아니면 자아가 실리지 않은 목소리를 내거나, 욕구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조차 없어 보이도록 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명예롭다거나 선하다고 말하지만 내면으로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172)
-우리가 말할 때 어떤 반응이 오는지, 우리가 하는 말이 타인과 공명할지 아니면 메아리 없이 사라질지에 따라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하게 될 것이 결정됩니다. 내가 한 말이 공명을 얻지 못하거나 왜곡된 상태로 돌아온다면 진심이 전달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므로 타인과 연결되어 있지 않음을 절감할 뿐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자신의 능력까지 의심하게 됩니다. (174, 사람들이 에이아이로부터 정서적 위안을 얻는다면, 그건 같은 말을 비스무레하게 반복해서 응답하더라도 그것이 덜 왜곡된 채, 공명을 얻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