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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평점 :
-20251125 알랭 로브그리예.
Nirvana-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https://youtu.be/hEMm7gxBYSc
나는 84살은 아니고 84년생이니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권 정도는 봐야 할 것 같았다. 1957년에 우리 아빠가 태어나던 해에 나온 소설이니 작가 할아버지는 작고하셨겠다. 살아 있으면 100살 넘었음… 인터넷은 이런 걸 찾아보라고 있는 거지만 까딱하기도 귀찮다.
책을 먼저 읽은 친구들은 재미없다, 오래전 읽었는데 나름 감동받으며 읽었다, 그런 반응이었다. 서사가 없는 소설이구만 또… 30쪽쯤까지 읽는데 이거 이전의 라슬로 600쪽 넘는 ‘서왕모의 강림’ 읽기보다 조금 더 힘들었다. 못 알아들었을까 봐 다시 얘기할게, 이러고 같은 스트로크로 덧칠하듯 어느 순간들이 또 또 나온다. 지네가 몇 마리 죽었는지 세어 보고 싶었지만 이게 그 지네인지 다른 지네인지 파악할 길이 없다. 작가는 그림자랑 건물의 구조랑 벗겨진 페인트랑 블라인드랑 창까지 열고 닫아가며 열심히 세밀화를 그려놨는데, 내 뇌는 그걸 따라 그릴 생각을 못해서 그냥 굳이 그리지 말고 글자나 따라가자, 했다. 바나나 농장인데 바나나 한 개도 안 먹는 거 실화냐… 판매용이라 안 먹는 걸까…
뒷표지에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이다.’하는 나보코프 선생의 말을 믿고 끝까지 읽었다. 확실히 나보코프 선생이 좋아할 것 같은 구성이긴 하다. 여러분 서사는 중요하지 않아요. 문체랑 구성이 다예요. 그건 선생님처럼 짓는 자의 마음이고 읽는 자는 또 달라요… 일단 관찰자가 A…나 프랑크와 도무지 소통하는 걸 안 그려놔서 답답해요. 집요하게 쳐다보고, 뒤져보고, 늦은 밤까지 기다리고, 되새기고, 돌아보고, 슬프게도 A…가 관찰자/서술자에게 다정한 말, 눈길 하나 안 줬다. 이 정도면 질투 정도가 아니라 절망해야 하는게 아닐지…
자기들끼리 읽은 소설로 꽁냥꽁냥 이야기하고,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고, 마누라랑 남사친이 그러고 있는데 그 자리에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멀찍이 지켜보는 듯한 서술만 반복하는 이 사람은 아니 이거 사실 A…의 남편 같은 뭔가가 아니라 시중들던 보이가 구경한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읽기 시작했는데, 페이지도 많지 않은데, 읽다 도망가면 그래도 사실 끝까지 읽어도 ‘마누라랑 남사친이 장보고 차 알아본다고 같이 차타고 새벽같이 시내 나가서 결국 그 날 안 들어오고 다음날 아침 돌아온 썰’ 외에는 특별한 서사가 없다. 거기에 귀뚜라미 소리나 원주민의 노래소리나 지네의 스스거리는 소리를 덧입히고, 해가 뜨고 기울고 지고 어둡고 그런 그림자의 변화를 그리고, 공간을 이동하는 사람을 추격하는 눈길을 그리고, 창이나 블라인드 너머로 다른 시선으로 주변과 사람을 들여다 보게 하고, 뭐 그렇게 140페이지 넘게 집요하게 쓴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나는 못해요 못해…
책 뒷표지가 또 재미있는게 해설자랑 나보코프 선생 말고 두 마디가 다 저자가 한 말을 남의 추천사 넣을만한 자리에 적어놨다.
‘줄거리 혹은 사건이 없는 소설, 매초와 매분은 있되 그것의 총합인 하루는 없는 작품, 정념은 있되 그 감정의 주인은 없는 작품’
‘세계는 의미 있는 것도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세계는 단지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다.’
세계는 존재하므로 존재하는 거군요 선생님… 의미도 부조리도 내가 다 갖다 붙힌 거군요… 여하간에 선생님의 책을 읽고 질투의 감정보다는 몹시도 쓸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졸립군요… 밤에 잠 안 올 때 보면 딱이겠다… 나는 얼른 책에서 빠져나오려고 낼름 읽었습니다…. 여기는 아프리카가 아닌데 에이와 남사친은 아프리카 배경의 소설을 읽고, 여기가 식민지이긴 한데 어딘지는 안 나오는데 내맘대로 인도네시아 쯤으로 여기고, 사실 여기는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나 흔한 플랜테이션 농장이었을 수도 있겠다. 바나나 먹고 싶다. 인스턴트 쌀국수도 먹고 싶었는데 참았다. 저녁이니까 두유 한 팩이랑 치즈 한 장만 먹고 이 닦음...기특한 나…
+밑줄 긋기(어째 하나도 안 옮겨 적었어서 느낌적 느낌이라도 나누려고 하나 뽑아옴)
-촘촘하게 주위를 둘러싸던 철창이 갑자기 끊겨나가면서 이 정육면체의 감옥은 스스로의 운명에 내맡겨진다. 이것은 자유로운 추락이다. 짐승들 또한 골짜기 깊은 곳에서 한마리씩 숨죽이게 되었을 것이다. 침묵이 너무나 공고해서 아주 약한 움직임마저도 불가능해진다. (갑자기 불끄고 램프 소리 마저 멎은 상태. 암흑. 정적.)
윤곽을 알 수 없는 이 밤을 닮은 비단결의 머리카락이 경련하는 손가락 사이로 흐른다.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지고 더욱 풍성해지며 촉수를 사방으로 뻗는다. 그러면서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처럼 점점 뒤엉킨다. 그러나 손가락은 그 얽힌 미로 속을 무심하게 쉽사리 빠져나간다.
머리카락은 마찬가지로 쉽게 풀리고 퍼져서 어깨에 느슨한 물결이 되어 굽이친다. 그 물결 속을 비단 브러시가 위에서 아래로, 위에서 아래로,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이 동작은 오직 숨소리에 의지해서만 감지할 수 있다. 숨소리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내며 무언가를 측정할 수 있게 한다. 아직도 측정할 무언가가, 구별할 무언가가, 묘사할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말이다. 이 완전한 암흑 속에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 (115-116, 머리카락과 손가락으로, 다른 곳에서는 옆얼굴의 잔상과 착붙 드레스로 인상 남긴 A… 여기쯤 쓰다가 작가도 아 묘사할 만큼 다 했다...지친다...불꺼진 김에 자야지 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