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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원이 되고 싶어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품절
-20211017 박상영.
어떤 사랑은 우연히 같은 책을 읽고 나서 시작되기도 한다. 또는 이미 생겨난 마음이 따라 읽으라고 한다. 그렇게라도 자취를 좇고 싶어서, 알 수 없는 상대의 속내를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서, 같은 서사를 따라가면 잠시나마 같은 세상에 머무는 느낌이라서, 어쩌면 한 마디라도 더 나눌 구실이 되지 않을까 하며. 욕심이 자라나면 너도 이걸 읽으면 참 좋아할텐데, 네가 나와 같은 이야기를 읽는다면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질까, 읽고 나면 나에 대해 조금은 더 잘 알게 되고 우리는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한다.
자라는 동안 그것은 소설책이기도 했고, 음악, 만화책, 영화, 게임이기도 했다. 당장의 나를, 내가 놓인 환경과 상황을 극적으로 바꿀 수 없을 만큼 어리고 약하던 나와 내 또래의 아이들은 다른 어딘가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글이나 그림이나 소리로나마 접하는 게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 떠날 유일한 방법이자 위안이었다.
그리고 가족 바깥의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내 일상과 내면도 궁금해하며 들어주고, 그렇게 어찌할 수 없음을 보듬어주며 서로에게만은 어찌할 수 있는 사이로 연결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갈망한 관계가 사랑인지 우정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그렇지만 어리고 제대로 이어져 본 적 없는 탓에 절실할수록 서투른 말과 행동이 되풀이되었다. 가까워지길 바라는 사람들을 오히려 밀어내고 끝내 홀로 숨죽여 우는 밤이 많았다. 그런 외로운 시간을 채우는 건 또다시 책, 음악, 만화, 영화, 게임. 그런 것들을 조금씩 파먹으며 자라다 이제는 자라는 일도 멈췄다.
내 삶을 내 뜻대로 굴려볼 처지가 되고, 정말 운이 좋게도 이런 나라도 그대로 좋아하며 곁에 머무를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렇게 내가 나인 걸 조금 견딜만한 때를 만나는 일은 내가 가진 젊음과 시간을 다 태워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렇게 다 태워버리고 난 뒤에야 알았다. 너무도 또렷하고 생생해서 문득문득 이불을 팡팡차며 부끄럽게 만드는 기억이 이제 겨우 희미해지는 중인데 이 책이 나타나서 야, 맘대로 떠나보내는 건 안 되지, 너 캔모아 기억 나냐? 너 만날 동네가 떠나가게 노래 부르던 거 이웃들이 못 들었겠냐? 중고등학교 때 주고 받던 편지 20년 만에 다 버렸던데 일기장은 아직 있지? 하면서 부끄러움을 내 몫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그런데 이쯤 되고 나니 그렇게 부끄러울 일은 아니었잖아 싶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얘도 쟤도 다 그러면서 견디고 살아 남아서 여태 여기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냥 그런 거였지, 너도 그랬다니 재미있네, 했다.
십대 중후반의 핸디캡을 주렁주렁 달고 하는 사랑의 보편성, 받아들여지지 않은 마음을 붙들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 엉망진창이 된 원가정을 벗어나고 싶지만 당장은 그럴 힘이 없는 안타까움, 내가 거쳐오고 지금 이런 가치관과 취향을 품도록 기여한 문화 컨텐츠 목록이 줄지어 나오는 이 소설을 나는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워낙 쌍끌이 저인망으로 잔뜩 던져놔서 여기 하나라도 걸리는 청소년 시절을 보낸 삼사십대가 제법 될 것 같고 그래서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것 같다. 반대로 세대나 영향력을 미친 하위문화의 범주가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여기에는 서태지도 에이치오티도 동방신기도 안 나오거든….), 혹은 혼자하는 사랑의 애틋함 같은 거 모르고 열심히 모범생으로 공부만 했거나 디아블로와 와우만 열심히 한 사람들이라면 결이 안 맞을 수도 있겠네, 싶었다.
점으로 존재하던 우리가 면은 못 되어도 선으로나마 이어지기 위해 서로를 향해 뻗어 나가던 그 시간들, 말들, 수많은 삽질들, 그런 걸 되돌아보면 지금의 중고등학생이 제일 불쌍해 보인다. 쟤들은 마음대로 누굴 만나지도, 사랑하지도 못해…학교에서 스킨쉽한다고 막 불러다가 혼내… 그러니까 머리에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밤새도록 웹툰이나 게임에 빠져 있는 것도 매일매일이 아니라면 너무 뭐라 하지는 말아요… 어떻게 해야 나아질지 달라질지 몰라 지금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을, 자신을 견디고 있는 중입니다…
+밑줄 긋기
-당시 나에게 가족이라는 것은 나를 속박하는 굴레에 불과했으며, 내가 가진 모든 욕망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했다.
지금의 이 삶을 벗어나고 싶다.
사람 한 명 없는 독서실의 고요함을 뚫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세상과 나 사이에 유리막 하나가 놓인 기분. 바깥에서 축제가 벌어지는 동안 나는 더 철저히 혼자였다. 모두가 하나가 된 세상에 속하고 싶지 않다는 치기 어린 반항심이 들면서도 단 한 순간만이라도 어딘가에 속해보고 싶다는 과장된 고독감이 나를 휘감았다 .그러니까 제발 누군가 나를 이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 구원해줬으면. 단 한 번만이라도 내게 손을 내밀어줬으면.
그 순간, 거짓말처럼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41)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절박한 방식으로 서로를 끌어 안았다.
그 순간 세상이, 우리가 속한 차원의 세상이 멈춰버렸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였고, 우리였으며, 우리인 채로 고유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 순간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심지어 나머지 인생 전부와도 바꿀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218)
-“쟤네 왜 저렇게 싸워대냐.”
“진짜 사랑하나보지 뭐.”
“진짜 사랑하면 싸우는 거야?”
“어. 그렇다던데.”
“그래서……우리도 매일 싸우나?”
“우리가……자주 싸웠나?”
“그러게.” (262)
-집으로 돌아와 나는 윤도가 준 반지를 책상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아무도 발견할 수 없게.
그래서 오롯이 나의 것으로 남을 수 있게. (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