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20210228 김소영.

성탄절을 앞둔 교회 안은 추웠다. 성가대 연습 중 (성가대 지휘하던) 피아노 선생님의 어린 조카가 놀러왔다. 동그란 눈에 포동포동 귀여운 아이 목에 익숙한 목도리가 걸려 있었다. 어, 저건,
내 거예요.
남색 면으로 된, 상표까지 내 것이었다. 겨우내 아끼며 매고 다녔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서 너무 섭섭했다. 내가 피아노 학원에 두고 왔구나, 그걸 저 아이가 매고 왔구나 싶었다. 말 없이 한동안 잠자코 있던 선생님이 말했다.
네가 그렇다고 하면 네 거 겠지.
선생님은 조카의 목에서 목도리를 풀러 내게 건네주었다. 열두 살의 나는 대여섯 살 아이가 올 때보다 춥게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채 그저 잃어버린 물건을 찾은 기쁨에 신이 나서 연습을 마치고 목도리를 두르고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뒤 친구네 집에 갔더니 친구가 옷장을 열고 내 목도리를 내밀었다. 저번에 놀러왔다가 두고 갔다며. 재질과 상표는 같았지만 내 목도리는 남색보다는 남보라색에 가까웠다. 그걸 친구네 집에서 찾은 뒤에야 알았다. 집에 돌아와 두 개의 목도리를 나란히 걸어 놓고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끝내 목도리를 선생님께 돌려주지 못했다. 아직은 어리고 어리석었다. 내가 틀렸었다는 걸 밝힐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이십오 년이 흐른 지금까지 부끄럽다.
피아노 선생님은 그렇게 나를 처음 믿어준 어른이었다. 그뿐 아니라, 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내게 추가적인 수업료를 받지 않고도 시간을 내어 특별 레슨을 해 주고, 자장면을 사 주고, 피아노가 없는 내가 언제든 원하면 연습을 하러 오라고 주말에도 학원을 열어주셨다. 단순히 피아노만 가르치지 않고, 청음과 음악 이론까지 상세히 가르쳐준 뒤 문제를 다 맞추면 아이들에게 백점 맞은 개수만큼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라고 동전을 쥐어주셨다. 나는 주먹 한 가득 이걸 다 받아도 되나, 걱정하면서도 학원 아래 있는 슈퍼로 뛰어내려가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을 마음껏 사 먹었다. 여름방학 때는 희망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안보 와이키키 온천으로 여름캠프를 가기도 했다. 대부분 엄마아빠가 일을 하느라 여름휴가를 떠날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이었는데, 적은 비용만 받고 다른 친한 피아노 선생님을 섭외해 봉고차를 대절해 내려가서 놀이기구도 태워주고, 수영장도 데려가고, 아이들을 씻기고 머리도 묶어주고 일일이 다 챙겨주셨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렇게 아이들을 챙기고 돌보는 일이 보통의 마음으로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고마운 분이었는데 내가 조금 자라면서 피아노 치는 게 조금씩 재미가 없어졌고 어느날부터인가 흐지부지 학원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뒤늦게 선생님이 결혼할 예정이고, 그래서 지방으로 이사를 가신다는 소식에 슬퍼하면서 학원(겸 선생님 숙소, 어느 때부터인가 건물 임대가 끝나면서 선생님이 사는 빌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에 찾아갔다. 선생님은 외출해서 안 계시고 선생님 어머니만 집을 정리하고 계셔서, 엄마에게 졸라 준비해간 선물(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로 기억한다)을 건네고 아쉬워하며 돌아오던 기억이 난다.
내내 자존감이 낮은 삶을 살아왔지만,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이 내가 힘들어하면 위로해주고, 내가 잘 하고 싶었던 피아노 연주를 잘할 수 있게 독려해주고, 어린 아이가 누릴 만한(주전부리부터 여름캠프까지) 것들을 챙겨주었던 경험은 아직까지 마음 한 구석을 덥혀준다.
덕분에 아이들을 대할 때 존댓말을 하고, 어른 대하듯 말을 걸고, 한 번이라도 아이들을 웃기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말과 행동을 하는 어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남의 아이들에게는 조심스럽지만 내 아이들에게는 모진 때도 많아서 십 년 내내 반성하는 못난 어미이긴 하지만...ㅠㅠ 김소영 선생님이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읽으며 피아노 선생님이 내내 생각났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계셨으면 좋겠다. 지방에 가서도 나 말고도 다른 아이들도 많은 가르침 받았다면 정말 좋았겠다 싶다. 그런 어른들이 많은 세상이라면 가족 안에서 상처 받고 주눅들어 있던 아이들도 내가 그렇게 못난이는 아니라고, 나도 저런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고 크게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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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2-28 23: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놀랍네요. 그분 반응에 저도 당연히 열반인님 목도리인줄 알았어요! 살면서 저질러온 실수들은 참 오래 기억에 남아 곱씹게 되네요. 지금 제꺼 생각남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3-01 10:52   좋아요 2 | URL
미미님 버전도 듣고 싶네요. 정말 내 거인 줄 알았는데 그 덕에 내가 틀릴 수도 있다, 틀릴 때가 많다, 단단히 알았죠...

하나 2021-02-28 23: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으앙 이 책도 좋아하고 열반인님 리뷰도 좋아해요! 그때 그 피아노 쌤이 오늘의 열반인님을 매력맨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셨군.. 리뷰 읽으면서 생각한 건데,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우리가 어린이였을 때 환대 받았던 경험에 대해 말하게 된다는 점 같아요. 저도 고마웠던 기억이 몽글몽글 솟아나면서, 그걸 꼭 갚는 어른이 되어야지 다짐해보는 밤입니다. 어린이 한 명이 자라는데 마을 하나의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런 말인 거 같구.. 모든 것이 우리를 파편으로 조각내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관심을 놓지 말아야지. 꼭 코트 받아주는 어른이 되어야지... 잘자요!

반유행열반인 2021-03-01 10:54   좋아요 2 | URL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저 이야기 결말의 다른 버전도 생각났어요. 뒤늦게 섬유유연제 넣고 빨아다 제 착각이었어요 하고 선생님께 목도리 돌려드리고 선생님은 그랬구나 하고 책망하지 않는...그런데 지금 목도리 두 개 다 나한테 없고 일기장 뒤져도 목도리 사건의 실마리조차 없어서 그냥 죄책감이 만든 어나더결말인 것으로 ㅋㅋㅋ바랐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ㅋㅋㅋㅋ코트 받아주는 어른이 되어야지 2222

바람돌이 2021-03-01 0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 누구든 정말로 좋은 선생님 한분을 만났다는건 참 복받은 일인것 같아요. 그저 괜찮은 선생님은 많지만 나에게 정말 특별한 좋은 선생님은 쉽지 않지요. 그건 또한 그 좋은 선생님을 알아보고 마음에 남길 수 있는 마음가짐도 있어야 하는거잖아요. 반유행열반인님의 마음과 선생님의 마음이 서로 만나 오래도록 좋은 기억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

반유행열반인 2021-03-01 10:57   좋아요 1 | URL
네 제가 복받은 경험이 있어서 그나마 이 정도 사람 구실 시늉이라도 하게 된 것이겠죠 ㅋㅋㅋ저 분 말고도 좋은 선생님 많이 계셨네요 힘들게 하시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ㅋㅋㅋ어떤 어른이 되고 되지 말아야 할지 두루 경험했고 이젠 제 몫인데 마음에 남은 대로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얄라알라 2021-03-01 03: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짠해요. 열두 살 기억이 여태 갈 수 있는데는 강렬한 고마움, 미안함....피아노 쌤 말씀까지 다 기억하실 정도로 작지 않은 에피소드였겠어요. 어린 시절^^


반유행열반인 2021-03-01 10:59   좋아요 2 | URL
기억은 부분적이라 좋은 기억만 남은 건지ㅋㅋㅋ정말 고마운 선생님이긴 하셨어요. 책 읽다 떠오르는 기억 뒤져보면 이야기거리가 참 많더라고요. 독서의 장점이자 단점 ㅋㅋㅋ흑과거 소환 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3-01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선생님께 배워 좋은 선생반님이 되셨잖아요!

선생반님 이거 뭔거 이상하죠?
반선생님도 이상해서 고른건데..... 😥

반유행열반인 2021-03-01 11:38   좋아요 1 | URL
선생님 소리 듣는데 왜 안 맞는 옷 같을까요 후생님하고 싶다...생선님이나...책임감도 덜하고....반생선님ㅋㅋㅋ

Yeagene 2021-03-01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 ㅋㅋㅋㅋ
열반인님 이야기 읽다가 저도 모르게
엄청 당황해 버렸네요 ㅎㅎ
왜 제 이야기도 아닌데 제 볼이 빨개지는 듯한 느낌이죠;;;
지금 바로 생각나지는 않지만 저도 어렸을 때 비슷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아요.사실 다 비슷비슷하지 않을까요...
자라서 중학생들 과외 선생님 잠깐 해봤는데 어린 아이들 챙기는 게 손이 많이 가고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네요..피아노 선생님 대단하십니다.열반인님 좋은 선생님 만나셨어요..:)

반유행열반인 2021-03-01 15:4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직접 저지른 저는 회한 속에 삽니다. 올드보이처럼 어디 갇혀 군만두만 먹으래도 반성할 거 같아요 ㅋㅋㅋ 저도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은 못 되어도 나쁘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네요ㅎㅎㅎ

jiyun 2021-03-02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트릭미러‘ 리뷰를 보다가 이 블로그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재밌는 글, 상상하게 되는 글을 써주셔서 몰입해서 읽었네요. 어릴 때 피아노를 가르쳐주시던 그 많은 선생님들은 지금 다 어디에 계시는걸까요. 궁금해졌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반유행열반인 2021-03-03 02: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jiyun님. 제 부족한 글을 함께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피아노 선생님들은 아직도 아이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계기가 되어주시고 계셨으면 좋겠네요 ㅎㅎ